수원을 그리 많이 다녀봤어도 막상 수원을 대표하는 성인 화성을 돌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저 차창 밖으로 보이던 성루와 성곽을 바라보는 것이 전부였다. 아마도 적잖은 사람들이 그러했으리라.
마침 수원에 볼 일이 있던 차에 몇 시간을 더 내어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인 수원화성을 돌아보았다.

세계문화유산인 수원 화성을 돌아보는 그 첫 걸음은 동장대에서 시작이 된다. 연무대라고도 하며 장수가 병사를 지휘하던 곳이기도 하다.

동장대와 팔달산의서장대를 왕복하는 용의 모습을 하고 있는 관광열차. 시간 관계상 이 관광열차를 타고 관람을 시작하기로 한다.

관광열차를 타고 수원화성을 관람하는 것은 편하기는하지만 수박 겉핥기식이란 생각이 든다. 성곽 아름다운 동암문을지나면서...
화성에 오르면, 먼저 연무대로도 불리 우는 동장대에 도착한다. 장대(將臺)는 장수가 병사들을 지휘하던 공간으로 대개 사방이 탁 트인 전망이 좋은 곳에 위치해 있어 적군의 움직임을 살피는 역할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동장대 앞에 이르니 붉은색 관람열차가 관람객을 기다리고 있다. 제일 앞의 열차는 용머리를 하고 있고 객차는 가마의 모양을 하고 있다. 시간도 아낄 겸 수원 화성을 반 바퀴 도는 이 관람열차를 이용했다.
표를 끊고 열차에 오른 뒤 5분여 가량을 기다리니 열차가 출발을 한다. 동장대에서 서장대까지 운행하며 화성을 감상하게 된다.
성곽을 따라 달리는 열차는 느린 속도로 달리지만 그렇다고 성곽에 설치된 시설물이나 전각들을 자세히 감상하기 아무래도 무리인 듯 싶다. 몸은 조금 편하지만 세세하게 관람하는 즐거움은 다음기회로 미뤄야 한다.

화홍문 오른쪽 얕은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방화수류정. 보물 제1709호로 지정되었으며 전시용 건물이지만 그 아름다움은 빼어나다.

봄빛 감돌고 개울물 졸졸졸 흐르는 곡선 아름다운화홍문의 풍경. 화강암의 다리 위에 문루를 지어 그 아름다움이 더하고 있다.
동장대를 출발해서 전각이 아름답기로 잘 알려진 방화수류정을 지나 화홍문 앞에 이른다. 수원천을 따라 내려가던 열차는 다리를 건너 다시 화홍문 쪽으로 향한다. 이때 다리를 건너며 바라보는 화홍문의 풍경이 볼만하다.
화홍문을 지난 관람열차는 장안문과 화서문을 지나 서일치에서 다시 성곽 안쪽으로 접어든다. 그리고 오르막길을 따라 올라 서장대 입구에 이르게 된다.
높이가 낮은 팔달산을 올라 서장대에 도착을 한다. 수원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 팔달산의 서장대가 있는 곳이다. 그곳에서 수원 화성의 지나온 풍경들을 내려다본다.

화성장대라는 편액이 걸려있는 서장대의 모습. 이층 망루로 조성되어 있으며 팔달산 위라서 사방이 훤히 내려 보인다.

팔달산 정상 서장대에서 내려다 본 수원 시가지와 화성의 풍경. 팔달산은 높이 143m의 낮은 산이지만전망은 좋다.
수원의 화성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을 옮기면서 능행차시 이용할 화성행궁을 지으면서 화성과 함께 축성했다. 명분은 아버지 사도세자가 왕위에 오르지 못함에 수원에 행궁과 축성을 하여 사후일 지라도 아버지의 꿈을 이루어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정조는 그 보다 더 큰 꿈을 꾸고 있었다. 수도를 옮기고 왕권을 강화할 목적이 내포되어 있었던 것이다.
당시 조정에는 당파싸움이 끊이지 않았으며 신료들의 권력이 너무 강해 상대적으로 임금의 목소리가 약해지던 시대였다. 그래서 정조는 아버지의 능행을 이유로 수원에 신도시를 건설하고 조세와 부역의 감면, 시장을 만들어 신도시에서 정치 실험을 하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천도를 한 다음 훈구대신들 대신한 참신한 신진세력들을 중심으로 이끌며 새로운 정치를 그리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조의 꿈은 그의 돌연사로 인해 역사의 뒤안길로 묻히고 말게 된다.
수원 화성은 사실상 복제품에 가깝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치루면서 많은 부분이 파괴되다시피 한 수원 화성은 복원공사를 통해 지금의 모습에 이르게 되고 복원공사를 마친 화성은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를 신청했다.
그러나 너무 많은 부분이 복원이 되어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인정하기 어렵다며 고개를 내젓는 지정 심의위원들에게 화성 성역의궤를 보여주자 그 옛 모습을 확인한 유네스코 지정위원들은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허락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만큼 화성 성역의궤는 축성방법과 도면뿐만 아니라 사용된 장비 및 인원까지 세밀하고 정확하게 기술된 소중한 기록문화재였던 것이다.
결국 화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었던 가장 큰 공의 주인공은 의궤나 조선의 기록정신, 그리고 바로 정조와 꿈을 함께했던 정약용과 채제공일 것이다

서장대를 내려와 화성행궁으로 내려가던 중에 만난 절집 대승원. 산문의 모습이 단아하다.

광배까지 포함하여 높이가 19m에 달하는 장대한 미륵존여래불. 처음에는청동이었던 여래불에 개금불사를 하여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서장대를 내려와 화성행궁을 둘러보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구불구불 비탈진 길을 따라 내려가 보니, 담장도 얕고 대문도 없는 굴뚝 모양을 한 대문 하나가 나타난다.
불교사상을 연구하는 연구회이자 절집인 대승원이다. 오색 연등이 가득 걸린 마당을 가로 지르니 황금빛 대불이 햇빛을 반사하고 있다. 미륵존여래불로 광배를 포함한 높이가 무려 19m에 이르는 대형 미륵부처님이다.
원래는 1954년에 창건한 마하사라는 사찰이었는데 후에 대승원으로 개칭하고 불교사상연구소로 등록하면서 오늘날까지 이르게 된 것이라고 한다.
어느 종단에도 소속되지 않은 대승원은 우리나라 불교가 광복 후 불교전쟁을 치루면서 불교 본래의 목적인 중생구도는 뒤로하고 재산다툼이나 하는 모습이 안타까워 우리 불교의 원래 모습인 호국불교, 중생구도를 이념으로 불교 중흥과 홍법포교를 연구하는 불교사상연구소를 창립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팔달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화성행궁으로 들어 선다. 화성행궁은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 참배를 위해 지은 별궁이다.

유여택의 풍경. 유여택은 평상시에는 화성 유수가 거처하는곳이다가 임금이 행차하면 임금이 신하를 접견하는 장소로 쓰였다고한다.

유여택 전각 한칸에 전시되고있는 혁필로 그린 민화. 이 혁필 민화는 판대도 하고 있었다.
대승원 큰법당에서 참배를 마치고 다시 화성행궁으로 발길을 돌린다. 화성행궁의 정문인 신풍문 앞에 도착을 하니 해는 어느새 팔달산 산마루에 걸터앉아 있다. 늦은 오후여도 관람객들이 제법 많다. 화성행궁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 행차시 사용하던 별궁이다.
그래서 그런지 행궁 안에는 뒤주가 놓여있고 뒤주 안에 들어가 보는 체험도 할 수 있게 해 놓았다. 좁디좁은 뒤주 안에서 꼼짝도 못하고 갇혀 죽어 갔을 사도세자의 공포를 잠시나마 느껴보는 시간이 될 수 있겠다. 성군으로 이름난 영조였지만, 권력은 부자지간에도 나눌 수 없다는 정치의 철칙을 벗어나지는 못했던 것이다.

정조대왕이 그의 모친인 혜경궁 홍씨에게 문안인사를 드리는 모습도 재현되어 있다.

운한각의 풍경. 운한각은 화령전의정전으로 정조의 어진을 봉안한 전각이다.

운한각에 모셔진 정조대왕의 어진. 정조는 학문이 빼어났을 뿐만 아니라 무예에도 능했으며 특히 활솜씨는 대단했다고 전해진다
행궁의 전각은 정조와 그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에 관한 일들을 재현해 놓아 역사적 사실들을 이해하기 쉽게 해 놓았다.
행궁 안을 돌아 나와 마치 화석 같아 보이는 고목을 지나니 오래된 전각 하나가 나타난다. 운한각이 있는 화령전으로 정조의 어진을 봉안한 곳이다. 참도를 따라 가 운한각 안을 들여다보니 정조의 어진이 일월오봉도 앞에 걸려 있다.
풍채 좋은 정조대왕은 참 잘생긴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학문이 높고 무예까지 뛰어나던 정조대왕은 잘 생기기까지 했으니 팔방미인이란 말은 그를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수원화성과 화성행궁을 돌아보며 이런저런 생각들이 오간다. 만약 정조대왕이 갑자기 돌연사하지 않고 그의 꿈이 이루어졌다면 지금 이 나라의 역사는 어찌 흘러가고 있을까? 지금의 모습과는 얼마나 많이 달라져 있을까?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며 부국강병을 꿈꾸던 정조대왕을 생각하며 돌아보던 수원화성과 화성행궁에는 정조대왕의 못다 이룬 꿈들이 봄바람을 타고 흘러 다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