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눈개비 부스스 흩날리는 오후, 부랴부랴 간단한 짐을 챙겨 봉원사로 향한다. 몇주전부터 작심하고 있던 서울도심의 산사와 역사를 따라 찾아나서는 산행 겸 탐방길이다.
금화터널을 빠져나온 택시는 고가 아래서 우회전을 하여 300m 가량을 올라가서 버스종점에 내려준다.

버스종점 뒤로 커다란 절집의 지붕이 드러난다. 한국불교 태고종의 총본산인 봉원사가 바로 저곳이로구나. 부도탑이 늘어선 길을 따라 조금을 오르니 좌측으로 비각이 나타나고 그 뒤로 작은 연못이 보인다.
살얼음 낀 연못 가운데 조그만 섬 위로 향나무 한그루가 온몸을 비틀며 기묘한 모양으로 자라고 있다. 생긴 모양새가 독특해 한참을 쳐다보았다. 수령이 족히 200~300년은 넘은 듯 하다.


대웅전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른다. 그 중간에서 좌우측으로 모셔진 16나한의 흰석상을 만나고 그 우측으로는 범종각이 보인다. 계단을 마저 오르니 대웅전이 전면에 섰다. 그 우측으로는 봉원사라는 현액이 걸린 대방이 그 좌측으로는 규모가 엄청난 삼천불전이 섰다.
삼천불전은 1950년 한국전쟁 때 소실된 전각을 1988년 복원불사를 하여 9년에 걸쳐 완공한 전각으로 비로자나불과 삼천불을 봉안하였다.
단일 목조건물로는 국내최대로 전각의 넓이가 210평이고, 대들보의 무게만 해도 7톤이란다. 쇠못 하나 쓰지않고 지은 이 전각은 봉원사의 또 다른 자랑이다.
봉원사는 창건 당시 지금의 연세대 자리에 지어졌던 사찰이었는데 임진왜란 당시 소실되고 정조때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다. 당시 정조가 하사한 친필 현액은 아쉽게도 소실되어 남아있지 않다.
봉원사의 창건은 신라 진성여왕 3년(889년)에 도선국사가 했다. 고려 말에 태고 보우스님이 크게 중창을 하였으며, 조선시대로 건너와 태조 이성계가 승하한 후에는 따로 전각을 지어 태조의 어진을 봉안하기도 한 유서 깊은 사찰이다. 또 봉원사는 중요무형문화재로도 유명한데, 목조건물의 색 고운 단청과 불교의식의 하나인 영산재가 그것이다.


봉원사의 고색창연한 전각들을 두루 돌아본다, 빛 바란 목조건물의 단청들. 특히나 극락전의 창틀 마다 채색된 조화류의 목조조각들의 아름다움은 무척이나 인상 깊게 남는다.
미륵전 앞에 이르니 표지석 하나가 반갑다. 100년전 이곳에 세워졌던 한글학회를 기리는 표지석이다. 봉원사는 이렇게 또 하나의 근세사를 품에 안고 있었구나.


봉원사의 뒷산인 안산으로 오른다.
12월 초순에 내리는 진눈개비는 초봄날 내리는 그것처럼 이미 흙 속으로 녹아들어 질척이고 있었다. 오솔길을 따라 안산으로 오르는 길. 햇볕 많은 양지라서 그런 것일까? 철없는 개나리들이 철모르고 산개해 있다. 한 두 송이 피워낸 것이 아니라 제법 숲이 노란빛으로 자작하다. 철 없은 철부지 개나라리라도 반갑기만 하다. 스산한 겨울숲의 풍경을 걷어내기에는 그만이다.
폭신폭신한 오솔길을 따라 구비구비 돌아 오르니 안산의 정상의 암봉 아래에 도달을 한다. 암봉을 따라 오르는 길. 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자꾸만 돌아다본다.


한낮에 내렸던 진눈개비가 만들어낸 수증기가 안개가 되어 서울 도심 위를 떠다니고 있다. 산으로 오르는 것일까? 아니면 바다를 떠다니고 있는 것일까?
멀리 보이는 남산 서울타워는 등대처럼 떠있고, 그 뒤로 더 멀리 떠있는 것은 섬 같은 관악산이다. 하나는 등대로 또 다른 하나는 섬으로 서울이란 바다 위에 떠있는 형국이다. 서울 도심에도 안개가 깔리니 이런 풍경이 연출될 수 있는 것이구나.
안산의 정상에 이르렀다. 봉수대 하나가 우두커니 서서 운해 위에 떠있었다. 멀리 삼각산의 연봉들도 운해에 떠 있는 커다란 섬처럼 눈에 들어온다.
안산의 봉수대. 안산의 봉수대는 안산 정상에 세워진 봉수대로 평안북도에서 시작된 봉화가 황해도와 경기도를 거쳐 이곳까지 전달이 되어 한양 서북쪽의 위급상황을 알려주는 봉수대이다. 이곳 안산 위에 연기가 피워올려지면 평안도와 황해도에 위급상황이 생겼다는 이야기다. 당시로는 가장 빠른 통신방법이었던 것이다.
운해 위에 떠있는 섬 같은 서울 도심의 풍경을 바라보며 산을 내려간다. 인왕산으로 가자. 인왕산 선바위를 찾아가자. 옛 서대문형무소 담장을 따라 길을 걷는다. 한쪽으로는 옛 서대문형무소가 다른 한쪽으로는 고층아파트가 서로의 다른 역사를 쓰고 있다. 하나는 일제시대의 가혹한 형벌을. 다른 하나는 현대와 미래의 편의와 안락을. 하나는 조국의 광복을 위해 지르던 처절한 비명소리가 또 다른 하나는 단란한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한성과학고교를 빠져나오니 무악재 아래 독립문 방향이다.


과거에도 이곳 안산과 인왕산 사이의 무악재를 넘어 수많은 사람들이 넘었을 터. 이 고개를 넘어서 개성이고 평양이고 신의주까지도 다녔을 것이다. 과거의 사람들은 과거의 사람들대로. 현재의 사람들은 현재의 사람들대로. 달라진 것이 있다면 현재의 사람들은 개성이고 평양이고 신의주라는 이름이 적국의 지명이 되어버렸다는 사실.
100년 전만 해도 호랑이 무서워서 삼삼오오 짝을 이뤄 넘었을 이 고개. 이제는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자동차들의 굉음만 무성할 뿐이다.
안산에서 내려와 인왕산으로 들어가는 길로 접어든다. 그 처음은 횡단보도에서 시작된다. 도심의 대로를 건너니 인왕산아이파크 아파트 사이로 이정표가 보인다. 인왕산 인왕사라고 적은 밤색 이정표가 드러난다. 쉽게 눈에 띠지 않더니 아파트 진입로에 들어서자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아파트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가다보니 중간 중간 계속해서 이정표들이 나타난다.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걷다보니 어느새 아파트 뒤쪽 산허리다. 그리고 나타난 일주문 하나. 인왕산인왕사다.
일주문을 지나 가파름이 심한 오르막길을 따라 오르니 골목길들이 갈라진다. 마치 달동네의 골목길을 연상케 하는데 골목 마다 전부 절집들이다. 생소한 종단의 절집들이 골목 마다 한두 개가 아니다. 이런 절동네가 있었던가? 가정집은 하나도 없고 온통 절집 투성이다. 종단의 이름이 무엇이면 어떠하리. 부처님의 설법을 온전히 설파한다면야. 하지만 골목 마다 돌다보니 꼭 전부 그렇지는 않을 것이란 걱정도 들기는 한다. 불교보다는 무속의 냄새가 더 짙은 절집들이 다수 있는 듯하다.
바위 산 중턱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절집 골목들을 돌고 돌아 오르니 선바위 입구다. 기괴한 모양의 선바위 입구에는 이곳이 서울시의 민속자료4호로 지정되었다는 안내판이 눈에 보인다. 선바위는 아들을 소원하며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이 많았다하여 기자암으로도 불린다는 내용과 무악대사와 태조 이성계에 관한 전설이 얽힌 내용도 알려준다. 바위가 마치 장삼을 걸치고 있는 모습과 닮아 무학대사라는 설과 태조 이성계의 부부의 상이라는 설화가 그 내용이었다.

선바위 앞에 도착을 하니 정말 많은 사람들이 바위에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선바위의 모습은 너무나도 기묘하고 신묘한 모습이었다. 바위 모양이 이러하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소원을 빌러 찾는 것이로구나. 거기에 일제시대 남산의 국사당이 이곳으로 옮겨와져 바위숭배사상과 더욱 밀착하다보니 이곳에 절집들이 많이 들어선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선바위를 뒤로 돌아 커다란 기암의 봉우리에 올라본다. 바위 중간중간마다 하얀 페인트로 이름과 생년이 쓰여 있다.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다. 꼭 이렇게 해야만 소원을 이룰 수 있는 것일까? 바위 위에 누군가 빌고 간 흔적이 남아있다. 양초를 태웠던 종이컵. 무엇을 그리 간절히 염원했던 것일까?
커다란 바위 봉우리 끝에 시선을 가져가니 그 위로 엄청난 바위가 눈에 들어온다. 아! 아! 저 모습은 분명 관세음보살님이 반가부좌를 하고 계신 그 모습이었다. 미술책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대번에 반가사유상을 떠올렸으리라. 그랬구나. 그래서 그랬구나. 그래서 그 바위 아래 많은 사람들이 끝없을것 같은 절을 올리고들 있었구나. 어쩌면 저런 자연의 신비하고 경이로운 모습 때문에 이곳에 절집들이 많을 거라는 어림짐작도 해볼 뿐이다.
선바위에서 내려와 국사당으로 발길을 옮긴다. 한양성곽복원공사로 출입이 통제되어 인왕산으로 오르는 길은 더 이상 진입 할수 없는 상황이었다.
국사당에서 징과 쾡가리 북소리가 계곡을 울려퍼지고 있었다. 국사당 안의 풍경이 궁금하여 얼굴을 들이미니 촬영금지라고 바로 쫓겨나고 만다. 무슨 보안이 필요한 굿판인가보다.
사직공원을 향하여 발길을 돌린다. 황학정에 이르르니 국궁을 날리던 궁사들이 휴식중이다. 황학정은 조선의 오사정 중에 하나로 궁술훈련장이 지금까지 그 맥을 잇고 있는 국궁수련장이다.
사직공원 안의 사직단도 돌아본다. 여름내 푸른빛으로 가득했을 잔디밭이 누런 황금빛으로 가득하다. 토지의 신 사와 곡식의 신 직에게 올리는 제단, 사직단. 일년에 네 번 선잠과 선농 그리고 기곡제와 기우제를 지냈는데 모두 백성들의 풍요로운 삶을 기원하는 제사였다.

안산을 넘어 인왕산으로 오르던 길. 그 산길과 옛길에는 우리의 역사가 자리마다 숨 쉬고 있었다. 길섶에서 바위에서 나무에서 느껴지던 역사들. 아픈 역사든 기쁜 역사든 전부 우리들의 역사가 아니던가.
반나절의 산행 겸 탐방길, 역사는 길이고 길에는 또 역사가 있었다. 또 후세들에게 오직 기쁜 역사가 더 많이 남겨지길 발원해보는 소중한 기회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