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승려로서 왕위에 올랐던 우리 역사상 유일한 이가 궁예다. 그는 역시 승려였던 종간 등과 함께 현실 속에서 미륵의 나라를 건설하려 했던 주인공이었다. 미륵의 나라, 그러나 그가 꿈꿨던 이 이상국은 채 그 꽃 봉우리를 열지 못하고 처참히 내팽개쳐졌다. 호족의 대표들로 구성된, 궁예가 민중들의 지지를 받아 강성한 세력을 형성했을 때, 다투어 항복하며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했던 이들의 모반에 의해 나라를 잃은 것이다.
이 궁예왕이 기득권 세력의 약화를 노려 개경에서 도읍을 옮긴 곳이 철원이다. 새 왕국의 수도 철원에 위치한 명성산은 그래서 필연적으로 궁예왕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명성산 아래 펼쳐진 철원 땅에서 새 세상, 새 나라를 건설하고자 했던 궁예의 꿈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고, 궁예는 명성산으로 숨어들었다.
곳곳에 궁예왕의 한이 서린 곳, 명성산(鳴聲山). 이 지역 사람들은 그래서 이곳을 울음산이라고도 부른다. 명성산은 한북정맥이 뻗어나온 산줄기로 산형은 기암절벽이다. 이 산이 전국적 명성을 갖게 된 것은 일천여년 전 궁예왕이 은거했던 산이기 때문이다.
궁예왕은 서기 904년 태봉국을 세우고 철원으로 도읍을 옮겨, 후고구려를 자처하면서 18년간 나라를 통치했다. 명성산의 철원군 갈말읍 강포리 쪽 능선은 특별히 궁예능선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모반으로 나라를 뺏은 왕건의 공격을 막기 위해 쌓은 궁예왕이 쌓은 성벽과 숨었던 굴이 남아 있어 역사와 권력의 무상을 웅변으로 알려주는 능선이기도 하다.

궁예왕은 기층민중의 지지를 등에 업고 궁예가 중심이 되어 개국한 태봉국이 왕건으로 대표되는 기득권 세력들에 의해 축출되어 명성산으로 내쫓긴 후 재기를 도모했지만 끝내 실패로 돌아가자, 그를 따르던 장졸들과 백성들을 해산했다. 이때 이들의 애절한 울부짖음을 기려 산의 이름을 명성산이라고 했다. 당시 궁예와 장졸, 민초들이 흘린 눈물이 계곡을 타고 흘러내려 산 아래 한 곳에 모여드니, 곧 산정호수가 되었다고 호사가들은 말한다.
기층을 대변하는 권력이 얼마나 허약한 것인가를 일찍이 궁예왕의 역사는 우리에게 잘 알려주고 있다. 정권을 지키려 수도를 개성에서 철원으로 옮기고, 때로는 강권을 휘두르기도 했으나 머릿수는 많지만 나약하고 어리석은 민초에 기댄 부실한 기반은 20년도 견뎌내지 못한 채 끝내 무너져버렸던 것이다.

이 아픈 현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 아픈 역사가 되풀이되고 있는 것을 털끝만큼이나 인식하는지 무관심할 뿐인지, 저 산정호수를 떠다니는 배에 탄 청춘남녀는 뜨거운 사랑의 눈길을 나누기에 여념이 없고, 명성산 줄기 산마루에는 6만평을 뒤덮은 억새의 장관을 즐기러 온 인파의 웃음소리로 가득하다.
이달 초에는 억새축제가 예정돼 있어 한동안 명성산이 인파로 떠들썩해질 기세다. 축제가 아니더라도 벌써부터 갈래갈래 바위틈과 나무 사이로 난 산길마다 색색의 옷을 입은 등산객들로 빼곡하다. 이들의 행렬은 막 가을을 머금으며 갖가지 색깔을 틔우려는 초목과 어울려 멋진 앙상블을 이루고 있다.
정상의 높이가 해발 923미터로 1000미터에 채 미치지 못하지만, 험준한 산세와 웅장한 바위, 당당한 초목들은 축출된 궁예왕이 왕건과 전쟁을 벌이기에 충분한 지형적 요건을 갖추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