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타폰의 달빛6
정(Dsong)
(삽화 정윤경 작가)
멀리 알프스 산봉우리들이 푸르게 보였다. 몬타폰 협곡이 가까워진 것은 분명했다. 베르너 박사가 휴게소에서 쉬어가자고 제안했다. 내려다보이는 깊은 골짜기에는 벌써 산그늘이 어둡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오후의 햇살을 고스란히 품은 산등성이 숲들은 밝았다. 베르너 박사와 권 회장은 작은 잔에 나오는 에스프레소를, 정 작가와 박 여사는 오렌지 주스를 시켰다. 박 여사가 휴게소 부근의 지붕이 붉은 민가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스트리아는 도시 집들보다 시골집들이 더 아름다워요. 베란다에 있는 꽃들이 참 동화 속에 나오는 집들 같아요.”
“맑은 날씨 때문에 더 아름답게 보일 거예요. 이곳 날씨도 한국의 가을날 못지않아요. 며칠 전까지만 해도 비가 계속 왔어요. 이처럼 날씨가 맑게 개면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천사가 소풍 가는 날’이라고 말해요.”
자신이 다니는 성당에서 꽃꽂이를 전담해 왔다는 권 회장이 말했다.
“오스트리아 시골 마을에서는 꽃으로 집을 아름답게 가꾸는 사람을 뽑아 상을 주기도 하죠. 아마도 사는 게 여유가 있으니 그럴 겁니다. 도시 직장인들보다 시골 마을 사람들 소득이 더 높은 나라가 오스트리아입니다.”
베르너 박사의 말에 정 작가가 말했다.
“땀 흘리는 사람이 잘 사는 나라가 이상적인 국가겠지요. 땀은 신성한 것이니까요. 운전하시느라고 수고 많으셨고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하하하.”
정 작가는 베르너 박사의 “천만에요.”라는 말에 소리 나게 웃었다. ‘천만에요’가 지금의 수고비가 ‘천만 원입니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승용차는 아스콘 포장이 잘된 지그재그 산길을 계속 달렸다. 이윽고 권 회장이 빌리에 대한 미처 하지 못한 이야기가 있다면서 입을 열었다.
“해인사를 다녀온 뒤 프란체스카 도너 여사가 살던 이화장을 갔어요. 프란체스카 여사는 비엔나 근교의 인저도르프 출신이랍니다. 빌리 씨는 프란체스카 여사의 일생 얘기를 듣더니 매료됐어요.”
“빌리 씨가 여사의 어떤 면에 매력을 느끼던가요?”
“이화장을 지키던 관리인이 이승만 박사와 프란체스카 여사의 첫 만남부터 이야기했지요.”
권 회장은 빌리 씨에게 통역을 해주었기 때문에 정확히 기억했다. 이 박사와 프란체스카가 처음으로 만난 때와 장소는 1933년 스위스 제네바였다. 이 박사는 제네바 국제연맹회의에 참석해서 일본의 억압에 시달리는 한국인들의 처지를 호소하고, 각국 대표와 신문기자들을 만나 ‘한국을 독립시켜야 극동의 평화가 유지된다’며 호소하던 중이었다. 반면에 프란체스카는 어머니와 함께 파리를 경유해서 스위스를 여행하고 있었다.
그때 레만 호반에 있던 한 호텔의 식당에서 두 모녀는 지배인이 양해를 구해 한국에서 온 독립운동가 58세의 이 박사와 합석했다. 그날 식당은 손님들로 꽉 찼던 것이다. 다음 날 프란체스카는 이 박사가 신문에 인터뷰한 기사를 오려 전해주었는데, 그것이 서로 인연이 깊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영어통역관 국제자격증을 가지고 있었고 속기(速記)와 타자가 특기였던 당시 33세 프란체스카는 이 박사의 어려운 사정을 듣고는 무료 봉사하기로 결심했다. 이 박사에게 타자를 쳐주고 비서 역할을 맡아주기로 했던 것이다.
마침내 두 사람은 사랑의 감정이 싹터 여러 가지 장애와 반대를 무릅쓰고 1934년 10월 8일 뉴욕의 몬테클레어 호텔 특별실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프란체스카 어머니가 극구 반대한 결혼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 박사 주위의 시선도 곱지 않았다. 독립운동하는 사람이 외국인 여성을 맞아들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프란체스카 여사의 영어 및 독어의 능숙한 실력은 망명 생활을 하는 이 박사에게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두 사람이 결혼한 지 10년 만이었다. 한국은 1945년 8월 15일 해방 독립이 되었다. 이 박사는 10월 16일에 먼저 귀국해 돈암장에서 머물렀다. 고국을 떠난 지 33년 만이었다. 이 박사 뒤를 따라 프란체스카 여사도 귀국했다.
이때부터 프란체스카 여사는 한국인으로 살아가기로 결심했다. 한복을 입고 한국 음식 조리법도 배웠다. 이 박사 부부는 1947년 이화장으로 이사했고, 이 박사가 대통령이 되면서 부부는 경무대로 입주했다. 그러다가 이 대통령이 한국 국민들의 요구로 1960년 4월 하야하자, 다시 이화장으로 돌아왔다. 한 달 후 이 박사는 하와이로 망명했고, 이후 1965년 7월 유해가 되어 한국으로 돌아와 이화장에서 마지막으로 휴식하고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이 박사가 하와이로 망명하자 모국인 오스트리아로 떠났는데, 한복과 한국 음식이 그리워서 1970년 5월 16일 다시 이화장으로 돌아와 양아들 이인수, 조혜자 부부 가족과 함께 살다가 1992년 3월 19일 92세를 일기로 푸른색 한복을 입은 채 눈을 감았다.
그때 프란체스카 여사의 유언은 다음과 같았다. ‘22년 동안 사용했던 틀니를 꼭 끼워달라. 틀니를 끼고 이 박사를 만나야겠다.’ ‘나 죽거든 꽃을 사용하지 말라. 쓸데없는 곳에 돈을 쓰는 것보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게 훨씬 낫다.’ ‘이 박사가 독립운동하던 시절 사용했던 태극기 및 성경책과 찬송가집을 관 속에 넣어달라.’ ‘관뚜껑에는 이 박사가 즐겨 썼던 휘호인 남북통일(南北統一)을 써달라.’ 등이었다.
“그때 저는 빌리 씨에게 프란체스카 여사가 한국으로 돌아온 것은 한국인의 정(情)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말했어요.”
“빌리 씨 반응은 어땠습니까?”
“조금은 이해한 듯했어요.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빌리 씨의 강연이 끝나고 자유토론 시간에 음악에 대한 빌리 씨의 열정 및 사랑은 한국인의 정 같은 것이라고 제가 말하자, 빌리 씨는 정이 무엇인지 학생들에게 질문했는데 결론은 ‘주고받는 마음의 선물’ 정도로 의견이 모아졌거든요.”
권 회장이 또 말했다.
“빌리 씨는 한국인의 정을 자기 나름대로 서서히 이해해 가고 있는 것 같았어요. 연대, 연민, 사랑, 애정, 공감 등의 단어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말했으니까요. 그리고 해인사를 들렀던 것이 좋았나 봐요. 한국 방문을 마치고 오스트리아로 돌아가는 날인데, 또다시 절에 가고 싶어 했어요. 그래서 서울 강남에 있는 봉은사 영산전을 갔어요.”
“자기 내면의 고요를 반조하는 듯한 부처님 모습에 매력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또 소음을 꺼리는 빌리 씨가 산사 특유의 적막한 분위기가 좋아서 그러지 않았을까요?”
“그건 잘 모르겠어요. 어쨌든 빌리 씨가 봉은사 영산전에서는 불상 앞에서 무릎을 꿇고 한동안 기도를 하더라구요. 마치 신심이 돈독한 불교 신자 같았어요.”
정 작가는 권 회장과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엉뚱한 상상을 잠시 했다. 빌리 씨가 전생에는 한국 절에서 수행하던 수행자가 아니었을까 하는 그런 상상이었다. 해인사에서 법당의 벽화를 보고 한동안 최면에 걸린 듯 움직이지 않고 보았다는 점이나 봉은사 영산전에서 불교 신자처럼 기도했다는 것이 상상의 날개를 펴게 했다. 더구나 봉은사는 빌리 씨가 원해서 간 절이었다. 마치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것과의 작별이 아쉬웠기 때문에 그러지 않았을까 싶었다.
어쨌든 인천공항으로 가는 승용차 안에서 빌리는 또 한 번 더 권 회장을 놀라게 했다. 봉은사를 떠나면서부터 눈을 감고 있더니 바다 위로 놓인 공항대교를 지나서 눈을 떴다. 권 회장은 빌리가 피곤하여 잠을 자는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소냐, 오케스트라 작품 <정(Dsong)> 3악장을 다 구상했다. 공항으로 오는 동안 다 끝냈다. 나는 ‘정(情)’을 프란체스카 여사에게서도 느꼈어요.”
어느새 일행을 태운 승용차는 산으로 둘러싸인 몬타폰 협곡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긴 터널을 두 개쯤 빠져나오자 마을과 붉은 지붕의 집들이 보였다. 집들은 해발 6백 미터의 산비탈과 작은 분지에 옹기종기 들어서 있었다. 베르너 박사는 권 회장의 이야기가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 유쾌하게 끼어들었다.
“<정>을 작곡한 빌리 씨가 사는 상트 안톤마을에 곧 도착합니다. 우리는 정 작가에게 한국인의 ‘정(情)’이 무엇인지를 더 들어봐야 합니다.”
운전하면서 줄곧 침묵하고 있던 베르너 박사는 일행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다 듣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그도 역시 한국을 좋아하고 한국인을 사랑했던 것이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