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에 따르면 백제 무왕에게는 적어도 두 명의 이상의 왕비 후보가 있다. ‘서동요’의 주인공 선화공주와 미륵사지석탑의 건립자 사택왕비이다. 둘 다 무왕의 왕비였는지, 혹은 그 중 한 명은 설화 속 인물에 불과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렇다면, 무왕의 아들로서 백제의 마지막 왕이 된 의자왕의 친어머니는 누구일까. 선화공주일까, 아니면 사택 왕후일까.

익산 미륵사지에서 사리봉안기가 발견된 후 이를 주제로 하는 두 번째 세미나가 열렸다. 신라사학회는 3월 21일 국민대 경상관 학술회의장에서 ‘익산 미륵사지 출토 유물에 대한 종합적 검토’를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백제 무왕대의 미륵사 석탑 사리봉안’을 발표한 충남대 김수태 교수는 무왕의 왕비를 3명 혹은 4명으로 꼽았다. 의자왕의 어머니, 선화공주, 사택 왕비, 그리고 교기의 어머니가 그 후보들이다.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무왕의 왕비로 의자왕의 어머니, 선화공주, 교기의 어머니 셋을 꼽아왔지만 이번 사리봉안기의 출토로 또 한명의 후보가 추가된 것이다. 만약 세 명 중 한 왕비가 의자왕의 생모로 파악된다면 무왕의 3명의 왕비로 축약된다.

김 교수는 “무왕 말년에 등장하는 사택씨를 의자왕의 어머니로 보기는 어렵고, 선화공주 또한 의자왕의 생모로 보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의자왕이 치열한 대신라전을 전개했다는 점에서 신라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것으로 언급되는 선화공주를 의자왕의 모후와 동일 인물로 보기 어렵고, 또한 의자왕이 무왕의 원자라는 점에서 무왕 말년에 (갑자기) 등장하는 사택씨를 의자왕의 어머니로 보기도 어렵다”는 것이다.

의자왕의 어머니에 대한 해석은 이날 ‘미륵사탑 건립과 사택씨-사리봉안기를 실마리로 삼아’를 발표한 이용현 국립부여박물관 학예연구사의 논문에서도 드러났다.

이 학예사는 “무왕 당시 막대학 영향력을 지녔던 사택 씨는 의자왕 초기에 타도되는데, 이는 사택 왕후 의자왕의 모후가 아님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이 학예사는 또 “사택지적 등이 의자왕 초기에 타도되는 반면 여러 왕자와 내좌평 기미 등 40여명은 국주의 어머니가 죽은 다음에야 비로소 섬으로 추방된 정황을 볼 때 이 사람들은 의자왕의 어머니가 후원하는 사람들로 보인다”며 “의자왕은 어머니가 죽은 후 친정을 강화하기 위해 어머니와 연관된 친인척들을 대거 숙청한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의자왕의 어머니가 누구였냐 하는 해석은 무왕대 귀족세력의 실태를 파악하는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무왕의 정치적 파트너였던 사택 씨는 왜 의자왕 초기에 대거 숙청당하게 되는 것일까. 그리고 사택씨가 건립주체로 참가한 미륵사는 어떤 정치적 배경에서 창건된 것일까.

이에 대해 이날 김수태 교수사는 미륵사 사리 봉안이 귀족세력에 대응하는 왕권 강화를 위한 조치라는 주장을 제기했다. 1주일전 한국사상사학회에서 ‘백제 익산 미륵사 창건의 신앙적 배경’를 발표한 한국학중앙연구원 조경철 연구원과는 정반대되는 주장이다.

조 연구원은 한국사상사학회에서 “미륵사 건립이 미륵불 신앙을 지닌 무왕과 석가불(법화)신앙을 지닌 사택 씨의 정치적 결합의 산물”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김수태 교수는 “무왕으로 대표되는 왕권과 사택 씨로 대표되는 귀족세력이 서로 갈등관계에 있었고, 익산 미륵사에 사리가 봉안된 것은 미륵불 신앙과 석가불 신앙이라는 두 신앙의 갈등대립 속에서 건립되었음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수태 교수는 “불사리는 석가불 신앙을 상징하고 이는 왕권을 상징하는 반면 새로운 세계의 도래를 의미하는 미륵은 왕이 아닌 귀족을 상징하는 것”이라며 “무왕대 익산에 미륵불이 출현하였다는 사실은 그만큼 무왕의 왕권이 새로운 제약을 받게 됨을 의미하며, 동시에 부여 능산리 사원이나 왕흥사에서 볼 수 있듯이 불사리를 통해서 왕경을 보호하고 왕경의 권위를 내세우려는 것과도 대비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이어 “무왕은 석가불 신앙을 중심으로 불국토를 점차적으로 확대시키면서 국토를 재편하려는 계획을 전개시키는데, 이러한 변화는 특히 왕권에 협조하며 부여를 세력기반으로 하는 정치세력에게는 커다란 문제가 되었을 것”이라며 “사리봉안은 익산지역을 중심으로 한 미륵신앙에 대해서 부여지역을 중심으로 한 석가불 신앙세력들의 반발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즉 사리봉안은 익산지역을 중심으로 한 미륵신앙에 대해서 부여지역을 중심으로 한 석가불 신앙세력들의 반발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미륵불의 출현을 바탕으로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고자 하는 세력에 대한 통제가 바로 사택 씨의 사리봉안으로 표출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용현 학예사는 김 교수의 주장과는 반대로 미륵사가 무왕과 사택 씨의 정치적 결합 속에서 창건됐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이 학예사는 “미륵사 창건의 발원자가 왕후였다는 것은 곧 이 절이 왕실의 원찰이었음을 의미하며, 그 왕후가 당대 최고위 좌평인 사택씨였다는 것은 동시에 사택씨의 재력이 가람건설에 투입되었음을 의미한다”고 지적했다.

이 학예사는 또 조경철 연구원의 학설인 성왕(전륜성왕)-위덕왕(대통불)-법왕(석가불)로 이어지는 계보가 사택지적(석가의 형제)과 연관되는 점에 주목했다.

이 학예사는 “본래 국왕가로 이어져야할 계보가 국왕이 아닌 인척의 대표자인 사택지적에게 이어진 것은 의자왕 초기에 사택지적의 정치적 권력과 위상을 상징한다”며 “의자왕 초기에 사택지적이 타도되는 것은 이에 대한 반작용”이었다고 주장했다.

이 학예사는 또 “무왕대의 국왕권 강화 과정에서 국왕과 결합한 인척 귀족세력의 권력도 함께 강화되었는데, 그 피크를 이룬 것이 특히 무왕대 말기였다”고 강조했다. 이 주장에 따르면 미륵사의 건립은 무왕과 사택씨의 정치적 결합에 따른 산물인 셈이다.

조경철 연구원 또한 김수태 교수의 ‘미륵-석가의 대립’이라는 견해에 대해 비판을 던졌다. 조 연구원은 “김수태 교수는 미륵사의 미륵을 귀족세력이라고 보고 있지만 당시의 미륵은 무왕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며 “측천무후나 궁예 등 특수한 케이스뿐만 아니라 어느 시대에서도 항상 미륵불은 당대의 최고권력인 국왕을 상징하는 존재”였다고 주장했다.

조 연구원은 이어 “사상사 연구에 있어서 한 시대의 정치와 사상은 분리될 수 없지만 정치사적 접근 방법은 사상과 신앙에 대한 이해의 기반위에서 정치적인 맥락을 짚어 볼 수 있는 것”이라며 ”미륵사 건립에 있어서 미륵신앙과 석가신앙을 대립의 관계로 보는 것은 지나친 해석“ 이라고 비판했다.

일부 학자들은 미륵사지 사리봉안기의 발굴을 백제불교사의 판도라 상자를 연 것이라고 표현한다. 똑같은 문장을 두고 학자들 저마다의 해석이 다르고, 이에 대한 백제불교의 역사 또한 180도 달라지고 있다.

1주일 사이에 또 한번의 반전과 역전을 거듭하는 백제불교사, 이 논쟁은 앞으로 수개월 아니 수년을 두고 전개될 것으로 보인다.

4월 24~25일 원광대에서 열리는 ‘미륵사 출토 유물’ 학술대회에서는 또 어떤 해석들이 제기될까. 학계의 시선은 이미 4월의 원광대 마한백제연구소로 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