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타폰의 달빛10
깊은 대화 3
-내면의 절대고요
(삽화 정윤경 작가)
빌리 씨와 두 번째 만나는 날은 박 여사도 합석했다. 베르너 박사의 안내로 몬타폰을 구경하는 것보다는 빌리 씨의 얘기를 듣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다. 빌리 씨와 대화를 나누는 장소는 어제와 같았다. 빌리 씨 자택 2층 거실에서 둥근 테이블 주위에 빌리 씨와 정 작가, 권 회장과 박 여사가 둘러앉았다. 테이블 가운데는 어제와 같이 투명한 유리주전자에 레몬차가 들어 있었다. 레몬차를 한 잔 마시는 시간부터 먼저 가졌다. 이번에는 정 작가가 먼저 말했다.
“빌리 선생은 작곡을 머리로 하지 않고 몬타폰 자연의 소리를 받아 적는다고 하셨는데, 그 말씀을 이해할 것 같습니다. 작가의 의지나 노력에 의해서 얻어지는 작품은 하급의 수준이고, 그것을 뛰어넘어 영감으로 얻어지는 작품이야말로 작가들이 원하는 바라고 생각합니다. 제 경우도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소설 제목을 정하거나 구상할 때 책상 의자에 앉아서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던 것이 어느 날 새벽에 머릿속을 스칠 때가 많습니다. 잠에서 깨어나 눈을 막 떴을 때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는 순간에 떠오르는 겁니다. 그때 머릿속을 스친 제목으로 결정하곤 했는데 대부분 흡족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노력해서 얻었다기보다는 모든 이들의 재능이 합쳐진 것 같은 영감이 준 선물이지요. 그런데 그런 영감은 우연이 아니라 인연이 무르익어 나타난 필연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빌리 씨가 손으로 턱을 괸 채 진지하게 듣더니 자신의 경험을 고백했다. 권 회장의 통역은 어제에 이어 두 번째였으므로 좀 더 즉각적이었고 자연스러웠다. 박 여사는 빌리 씨와 정 작가가 대화하는 내용을 녹음하려는 듯 엄지손가락만 한 소형녹음기를 꺼내놓고 있었다.
“정 작가님 말씀에 공감합니다. 저는 독특한 영감으로 작곡하고 있습니다. 제가 의도적으로 무엇을 작곡하겠다, 음악의 내용과 형식을 미리 정해 놓고 작곡한 곡은 거의 없습니다. 몬타폰과 알프스의 자연이 주는 음악을 만나서 그대로 받아 적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저의 음악은 그 스스로 어느 산자락 그곳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저는 음악을 발견했을 뿐입니다. 정말로 저는 지금이라도 정 작가님을 모시고 노래가 들렸던 여러 군데의 장소를 같이 갈 수가 있습니다. 제가 젊은 시절만 해도 자연보호지역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높은 산들의 계곡에 콥스 호수(Kopssee)가 있었습니다. 너무 멀고 산길이 위험하기 때문에 수십 년 동안 사람들이 잘 가지 않았던 곳입니다. 호수 밑으로는 원시림이 있지요. 원시림에는 태곳적 고요가 있었고요. 거기에 음악이 살고 있었습니다.”
“태곳적 고요가 여러 번 말씀하신 절대고요입니까?”
“그렇습니다. 음악은 그런 곳에 있습니다. 그곳에는 나무와 풀 같은 생명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음악도 살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정 작가님께 음악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 그 지점을 알려줄 수 있습니다. 지금도 음악은 그곳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오염시키지만 않는다면 음악은 그곳에 영원히 살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호주머니에 항상 색연필 하고 종이를 갖고 다닙니다.”
“색연필이요? 음악과 색연필이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지요?”
“저는 그곳의 음악을 듣지 않습니다. 음악이 보입니다. 때문에 보이는 음악을 색연필로 그리는 것입니다. 음악을 색연필로 종이에 스케치해서 집으로 가지고 옵니다. 저는 어느 날 제 내면의 고요 속에서 스케치해 둔 음악을 보고 곡을 완성합니다.”
정 작가는 이 부분에서 말문이 막혔다. 소리를 귀로 듣지 않고 본다고 하니 ‘이게 도대체 가능한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빌리 씨는 자신의 말을 증명하듯 예를 들었다.
“기상이 좋지 않으면 갈 수 없는 몬타폰의 깊은 산자락이나 알프스 협곡에는 백여 명 이상의 연주자들이 필요한 오케스트라곡 음악이 살고 있지요. 기회가 되면 정 작가님을 모시고 그곳에 갈 수 있습니다. 제가 그 음악을 종이에 색연필로 그렸던 곳입니다. 물론 저는 그곳에 가지 않더라도 일주일 내지 몇 주간 동안 앉아서 열심히 작곡하면 그런 비슷한 음악을 만들어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거는 저의 경우 음악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머릿속에서 구상하고 수학적으로 계산해서 만들어낸 음악은 인위적이어서 결코 음악의 순수한 공간과 깊이를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까? 좀 전에 말씀드렸지만 머리로 작곡하는 음악은 하급이고, 자연의 소리를 받아 적은 음악이야말로 천상의 수준일 것 같습니다.”
빌리 씨는 정 작가가 자신의 말을 이해해 주자 신바람이 난 듯했다. 자신의 속마음을 거침없이 고백했다.
“저는 음악을 받아 적기 위해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1초도 허비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음악을 찾기 위해서 집을 떠나 몬타폰 깊은 산자락 움막에서 수년 동안 살았고, 이탈리아 토스카나 같은 아주 특이한 곳에서 몇 년을 살았습니다. 기다리다 보면 외부의 적막을 찾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제 안에도 내면의 적막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내 안에도 적막이 있구나 하고 발견하는 순간이었지요. 절대적막이라고 할까요? 그 속에서 음악이 시작하지요. 그 음악은 제가 원해서 만나는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저의 권한 밖에 있는 음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음악의 시작과 끝은 제가 결정할 수 없었지요. 그러니까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25분 혹은 40분이 소요되는 음악을 요청한다고 해서, 또 제가 원한다고 해서, 저의 음악적 테크닉 만으로 음악은 만들어질 수 없지요. 제게 주어지는 것 이상의 어떤 힘, 절대고요를 만나게 되었을 때 완성되는 그것이 제가 작곡하는 곡이라는 겁니다.”
“저는 빌리 선생의 음악이 어떻게 탄생하는지 불교적으로 이해됩니다. 빌리 선생이 말씀하시는 내 안의 절대고요, 절대적막을 불교에서는 공(空)이라고 합니다. 공이란 텅 비어 있으면서도 무언가 충만해 있는 상태입니다. 이를 ‘텅 빈 충만’이라고 부릅니다. 내 안이 텅 비었다는 것은 인간의 온갖 욕망이 하나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적멸(寂滅), 혹은 진공(眞空)이라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텅 빈 경지에서 지혜가 솟아 나온다고 합니다. 빌리 선생은 텅 빈 공의 경지에서 나오는 지혜를 소리로 보는 것 같습니다.”
빌리 씨는 정 작가의 해석에 몹시 감동한 듯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그러자 권 회장이 일어나서 빌리 씨에게 가더니 그를 잠시 안고서는 진정시켜 주었다. 정 작가는 빌리 씨가 동양의 선사(禪師)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미 선승이 도달한 깨달음의 경지, 즉 자기 내면의 공이라는 절대고요 속에서 음악을 만나고 있기 때문이었다. 빌리 씨의 고백은 계속 이어졌다.
“어느 때는 절대고요, 즉 절대적막을 찾아 몬타폰 산자락을 헤매기도 하고, 알프스 깊은 협곡을 거닐기도 했지만 어느 때가 되자 그 장소가 바로 나이고, 내 안에서 그것을 찾았습니다. 자연과 저는 하나였습니다. 내 안에서 절대고요를 찾은 뒤부터 10여 년이 지나고 나서는 아무리 시끄러운 고속도로에서도 저의 내면에 있는 절대고요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경우도 있었습니다. 클라리넷 곡인데 그 음악이 사는 장소에서 색연필로 스케치한 종이를 집에 몇 년 동안 두었는데 제 안의 절대고요를 만나고 나서는 순식간에 작곡을 완성한 적도 있지요.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주관단체에서 요청한 곡이었습니다.”
빌리 씨와 정 작가가 나누는 대화가 너무 진지했던지 권 회장이 화제를 바꾸었다.
“몬타폰의 주요 수입원은 관광이잖아요. 그러려면 관광객이 많이 와야겠지요.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첩첩산중까지 다 오픈한다는 얘기를 신문에서 보았는데 사실입니까?”
“몬타폰의 마지막 계곡까지 완전히 오픈하자는 얘기가 있어요. 산악마라톤 경기도 하고 자전거 도로를 낸다는 것입니다. 저에게도 오픈하는데 힘을 합치자고 요청했지요. 걱정입니다. 거기 사는 음악이 다른 장소로 옮겨갈 위험이 있으니까요. 그래서 제가 시 당국에 그런 거 하지 말자고 반대했더니 모두 다 나를 비웃더군요.”
정 작가도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눈에 보이는 세계 속에서만 사는 그들은 이해 못 하겠지요.”
“제가 반대했지만 몇 년 후 그들은 산악마라톤 경기를 개최했습니다. 이후 매년 7월에 산악마라톤 경기가 열리곤 합니다. 제가 만났던 음악들은 산악마라톤 코스를 떠나 산속 깊이 들어가 살고 있는 상태입니다.”
“절대고요 속에 평화롭게 살던 음악들이 피난을 가버렸군요.”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비웃어도 저는 산중에 살고 있는 음악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존경심을 가지고 있지요. 그런데 음악들이 살고 있는 지점이 점점 희귀해져 가고 있어요. 자연이 파괴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몬타폰만 해도 자연이 너무 많이 훼손되고 있습니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이라고나 할까요? 몬타폰에는 아직 음악이 살아 있는 곳이 몇 군데 있지요. 동네 계곡에서 50km 안입니다. 그런데 앞으로는 점점 더 계곡 깊이 들어가야 음악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관광객 발길이 닿지 않는 곳까지 말입니다.”
“험하지 않으면 저도 한 번 가보고 싶군요.”
“좋습니다. 지금 가보시죠.”
빌리 씨는 정 작가의 제의를 바로 받아들였다. 그럴 계획이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말했다. 박 여사는 소형녹음기를 끈 뒤 자주색 크로스백에 넣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