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타폰의 달빛3
결심
(삽화=정윤경)
정 작가가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남도산중에 이불재를 지어서 내려온 지는 25년째였다. 문득 정 작가는 서울에서 만났던 스님들이 떠올랐다. 그 스님들 가운데 두 분이 먼저 생각났다. 한 분은 정 작가의 스승인 법정스님이었다. 법정스님은 순천 불일암에서 서울에 올라올 때마다 정 작가를 부르곤 했다. 당신의 언행을 보고 언젠가 기록하라는 무언의 당부인 듯했다. 송광사 서울포교당인 법련사에서 법정스님이 정 작가를 또 불렀다.
정 작가가 근무하는 직장 샘터사에서 법련사까지는 승용차로 15분밖에 걸리지 않는 가까운 거리였다. 법련사는 조선시대 임금이 머물던 경복궁 바로 옆에 있었다. 정 작가는 법정스님이 계시는 방으로 들어갔다. 법련사 현호 주지스님은 법정스님을 속가 형님처럼 모셨다. 법정스님이 단 하루도 잔 적이 없지만 법련사에는 현호스님의 배려로 법정스님 방이 하나 있었다. 방에는 이미 두 명의 손님이 먼저 와 있었다. 현호스님이 법정스님에게 소개하려고 한 손님인데, 한 분은 중년의 여성이었고 또 다른 분은 중년 여성의 비서인 듯한 사내였다. 법정스님이 두 손님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계셨다.
“작년에 유럽 성당들을 돌아보다가 파리에도 절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파리에 사는 우리 교민이나 유학생들에게 쉼터를 하나 만들어주고 싶었던 것이지요. 성당에 익숙하지 않은 한국인들이 파리에서 겉도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어요.”
“스님께서 파리에 절을 건립하신다면 제가 벽돌 한 장부터 완공 때까지 전부 도와드리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중년 여성이 말하자 사내가 수첩을 꺼내 적으려고 했다. 그러자 법정스님이 만류했다.
“적을 거 없어요. 도움받으려고 절 얘기를 꺼낸 것이 아닙니다. 파리에 갔더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것뿐이에요.”
중년 여성이 겸연쩍어하자, 법정스님이 말했다.
“고마운 말씀이오. 그런데 절은 모두가 조금씩 보시해서 지어야 해요. 그래야 ‘내 절’이라는 주인의식이 생기는 겁니다.”
“스님 말씀이 맞습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조금이라도 도울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고맙습니다. 저를 도와주고 싶다면 법련사를 도와주세요. 법련사도 제대로 포교당 구실을 하려면 문화회관 같은 건물이 필요합니다.”
“스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법정스님은 중년 여성의 제의를 거절한 대신 법련사를 도와주라고 부탁했다. 법련사가 포교당 구실을 하려면 문화시설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스님은 달라이라마 존자가 유럽에 가서 어떤 신부가 불교의 ‘자비’가 무엇이냐고 묻자, ‘친절’이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도 들려주었다. 그러면서 한국 절 스님들이 대부분 불친절하다고 평했다. 자비롭지 못하다는 평가였다. 스님은 유럽인들이 신에게 의지하지 않는 자기 구원의 불교에 매력을 느끼고 있는데, 파리에 친절한 절을 짓고 싶다는 의중을 드러냈다. 나중에 정 작가가 현호스님에게 들었던바, 중년 여성은 D그룹 회장의 부인이었다.
또 한 스님은 정 작가의 산문집 <암자로 가는 길>을 보고 찾아온 영국인들에게 불교를 전하고 있는 젊은 분이었다. 스님은 몹시 차분하여 고요한 기운을 풍겼다. 점심때 정 작가의 직장 샘터사로 찾아왔으므로 정 작가가 점심을 대접하겠다고 하자, 미소를 지으며 거절했다. 방금 절에서 싸 온 도시락을 부근 공원 벤치에서 먹었다는 것이었다. 정 작가는 직장 건물의 카페에서 스님과 대화하면서 영국교회 현실이 어떤지 자세히 알았다. 빈 교회들이 많아서 그 가운데 하나를 저렴하게 빌려 절 간판을 내걸고서 포교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영국에 빈 교회들이 많다니 놀랍습니다.”
“영국뿐만 아닙니다. 제 도반은 독일에서 빈 교회를 얻어서 불교를 전하고 있습니다. 불교에 매력을 느끼는 서양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9월 10일에 오스트리아로 가겠다고 결심한 정 작가에게 두 스님이 영감을 준 것은 사실이었다. 불교에 관심이 많아진 유럽인들에게 ‘한국인에게 불교란 무엇인가?’를 강연할 기회를 갖는다면 오스트리아행이 더 뜻깊어질 것 같았다. 정 작가는 불교학자가 아니므로 불교의 진리나 역사를 강의하기보다는 아주 먼 시대부터 불교를 접해온 한국인의 의식을 소개하는 것이 더 편하고 덜 부담스러울 듯했기 때문이었다.
정 작가는 즉시 권 회장에게 오스트리아인과 교포를 상대로 강연할 수 있는지 메일을 띄웠다. 그러자 며칠 후 메일로 답이 왔다. 한국인이 한 번도 강연한 적이 없는 비엔나 추기경문화회관((Kardinal Koenig Haus)에서 강연 일정을 섭외했다며 강연 주제를 물었다. 한국으로 치자면 명동성당 문화관 같은 곳이었다. 정 작가는 강연 주제를 왜 ‘한국인에게 불교란 무엇인가?’로 정했는지 두 가지로 설명해 또 답을 메일로 보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오스트리아인들에게 한국인이 어떤 정서를 가지고 있는지를 설명해 주면 도움이 될 것이고, 두 번째는 서양인들에게 관심이 증폭되고 있는 불교가 어떤 종교인지를 소개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답이었다. 정 작가는 오스트리아 여행 기간을 아내 박 여사와 상의했다.
“연재소설 때문에 보름 이상은 무리인 것 같소.”
“9월 10일 떠나기로 했으니까 25일 돌아오면 되겠네요.”
“내 강연만 생각했는데, 당신 도예전을 가져보는 것은 어때요?”
“좋아요.”
박 여사는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도예전을 가져보자는 정 작가의 제안을 흔쾌하게 받아들였다. 더욱이 작년 가을에 장작가마에서 나온 작품들이 있으므로 당장 도예전을 연다고 해도 무리는 없었다. 물론 갤러리가 정해진다면 비엔나까지 운송하는 문제가 있고, 카탈로그를 제작해야 하는 과정이 있지만 그것은 부수적인 문제들일뿐이었다.
정 작가는 권 회장에게 여행 기간과 박 여사의 도예전 문의를 휴대폰 문자로 보냈다. 그러자 며칠 만에 문자로 답이 왔다. 먼저 정 작가의 추기경문화회관(KKH)의 강연 날짜는 9월 20일로 잡혔고, 박 여사 도예전은 마침 국제전을 기획하고 있는 비엔나 중심가의 갤러리 암 파크(Galerei Am Park)에서 9월 14일부터 18일까지 초대전 형식으로 전시회를 가질 수 있으며, 또 추기경문화회관에서 오스트리아 여류도예가 사비네(Sabine Bauer)와 20일에 2인전을 해볼 수 있다는 답이 왔다.
다만, 권 회장은 오스트리아 갤러리 암 파크에서 14일에 개막행사를 하고 난 다음 날인 15일에는 빌리 씨를 만나러 몬타폰으로 가자고 못을 박았다. 빌리 씨 작업실 옆에 숙소를 정해놓고 최소한 3박 4일 동안 머물자고 제안했으며 비엔나에서 몬타폰까지 승용차로 8시간이 소요되는데, 권 회장의 남편인 의사 베르너(Werner Stockinger) 박사가 운전해 줄 것이라고 했다. 권 회장이 정 작가를 부른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으므로 다른 일정은 뒤로 미루었다.
권 회장이 요구한 또 한 가지는 정 작가 부부가 머무는 기간이었다. 9월 26일에 비엔나 무지크페라인 골든홀에서 IMK가 해마다 치러온 음악 행사가 있는데, 정 작가 부부가 감상하기를 권유했다. 평소 클래식 뮤직을 접해보지 못한 오스트리아 노인들을 음악회에 초대하는 IMK의 자선행사였다. 오스트리아 각주에서 초대받아 온 노인들은 한국인의 효도문화를 음악을 통해서 체험하는 셈이었다. 이번 효도 공연행사에 참여하는 피아니스트는 중국인 쉬란 왕(王詩然, Shiran Wang)과 한국인 신예 바이올리니스트라고 알려 주었다. 클래식 마니아인 박 여사는 여행 기간을 늘려서라도 IMK 음악회를 봐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가 또 언제 골든 홀에서 음악감상을 할 수 있겠어요.”
“귀국 날짜를 3일만 늦추면 되니까 그렇게 합시다.”
결국 오스트리아 여행 기간은 18일간으로 늘어났다. 이후 정 작가는 틈틈이 오스트리아에서 강연할 원고 구상에 들어갔고, 박 여사는 도예전 카탈로그 작업에 착수했다. 마침 전라남도에서 화가나 도예가들에게 해외전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 있어서 카탈로그 제작자금은 지원받을 수 있었다. 박 여사는 도예전의 주제를 ‘한국의 미(美), Beauty of Korea’로 정해놓고 사진작가를 섭외해 자신의 전통 장작가마는 물론 화순군의 명소인 적벽과 운주사, 쌍봉사 그리고 보성군의 명소인 율포해수욕장, 차밭 등에서 도자기 작품을 놓고 사진 작업에 들어갔다. 한국의 아름다운 풍경과 전통 백자를 현대화한 도자기를 오스트리아인들에게 선보이자는 취지에서였다.
어느새 정 작가의 오스트리아행 목적은 두 가지가 더 추가된 셈이 돼버렸다. 권 회장의 권유대로 빌리 씨를 만나는 것 외에 정 작가의 강연과 박 여사의 도예전이 그것이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