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타폰의 달빛2
세 번의 전화
(삽화=정유경 작가)
권 회장이 정 작가를 초대한 이유는 다소 엉뚱했다. 적어도 정 작가는 그렇게 받아들였다. 권 회장이 자신과 음악적으로 매우 유대가 깊은 오스트리아 작곡가 헤르베르트 빌리(Herbert Willi) 씨를 정 작가에게 소개하고자 초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 작가는 빌리 씨와 아무런 인연이 없었으므로 그를 왜 만나야만 하는지 그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러니까 정 작가가 빌리 씨를 찾아가 만나는 것은 권 회장의 일방적인 계획일 뿐이었다.
‘오스트리아에 간다고 해도 빌리 씨를 꼭 만나야 하나?’
정 작가는 빌리 씨 인생이나 음악에 대해서 아무런 지식도 없고, 클래식 음악을 잘 모르는 처지였기 때문에 더욱 망설여졌다. 그러나 권 회장은 집중력이 뛰어난 사업가이자 수완가였다. 그녀는 자신이 세운 목표를 관철하고자 인내심 갖고 동분서주하면서 결코 포기하는 일이 없었다. 클래식 뮤직 공연기획사인 IMK를 설립하여 오스트리아 최고의 공연기획사로 성장시킨 것만 봐도, 그녀의 집념과 열정을 엿볼 수 있었다.
권 회장이 정 작가가 살고 있는 산방(山房) 이불재를 처음으로 찾아온 것은 2013년 2월 하순이었다. 한겨울 끝자락에 봄날 같은 날씨가 며칠 동안 계속되면서 이불재 마당가의 청매, 백매, 홍매 꽃봉오리가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며칠 후면 개구리들이 겨울잠에서 깨어날 것도 같았다. 매화꽃이 피기 시작하면 개구리들이 겨울잠에서 깨어나 화답하듯 개골개골 노래하곤 했던 것이다.
오스트리아 교민이 정 작가의 독자로서 이불재를 찾아온다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 미국 교포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정 작가의 장편소설 <다산의 사랑>을 읽고서 방문한 적이 있지만 결코 흔한 일은 아니었다. 최근에 미국 위스콘신주 로랜스사립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메티(Matty Wegehaupt) 교수가 정 작가의 광주민중항쟁을 소재로 한 장편소설 <광주아리랑> 영역을 감수하고, 이불재를 두 번이나 왔다가 간 것은 권 회장과는 목적이 분명 달랐다. 동양역사를 전공한 메티 교수는 1980년 5월에 일어난 광주민중항쟁에 감화를 받고 광주로 와서 3년 동안 살았을 정도로 인연이 깊었기 때문이었다.
권 회장은 이불재 아래쪽에 있는 천년고찰 쌍봉사에서 3박 4일 동안 머물렀다. 밤에는 쌍봉사에서 자고, 낮에는 이불재로 올라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비로소 정 작가와 아내 박 여사는 권 회장을 좀 더 이해했다. 그녀의 고향은 예천인데 안동 권씨이며, 아버지는 빌로드 원단 공장을 운영하다가 파산하여 어려워진 가정 형편으로 학비가 없는 국립의료원 간호학교를 졸업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이후 파독간호사 1기로 가서 두 명의 간호사와 함께 독일의 한 병원에 취업했으며, 그중에 한 명의 간호사는 독일식 식사에 적응 못하고 고향생각이 날 때마다 울다가 결국 한국으로 돌아갔다고 말했다. 향수병에 걸린 간호사와 달리 자신은 독일식 식사를 아주 맛있게 먹었으며, 오스트리아인 의사 남편을 만나 비엔나공항에 내려 첫발을 내디디는 순간 마치 고향에 온 것처럼 편안했다고 웃었다. 그때 권 회장의 이야기들 가운데 정 작가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녀가 이불재를 떠날 때 한 말이었다.
“쌍봉사에서 편하게 잠을 잤어요. 성당만 내게 편한 줄 알았는데 절이 내 몸에 맞는 옷이라는 것을 느꼈어요.”
그때 정 작가는 권 회장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나름대로 짐작했던바, 아마도 어머니가 절에 다녔거나 소풍을 절로 다녔던 어린 시절의 영향이 아닌가 싶었다. 정 작가는 권 회장이 자신의 정체성을 쌍봉사에서 되찾았다는 말로 이해돼 가끔 생각났던 것이다. 어쨌든 권 회장은 오스트리아로 돌아가 몇 달 만에 전화로 그곳 소식을 주었다. 권 회장이 헤르베르트 빌리 씨에게 정 작가의 불교적인 소설과 명상적인 산문집을 얘기했더니 영문으로 번역된 책이 없느냐고 물으면서 관심을 보이더라는 것이었다. 아마도 권 회장이 정 작가의 작품세계를 흥미롭게 보고 나서는 한국인을 좋아하는 빌리 씨 역시 관심을 가질 것 같아서 얘기했을 듯싶었다. 그러면서 권 회장은 오스트리아에 아무 때나 한번 오라고 정 작가에게 권유했다. 정 작가는 그녀의 권유를 박절하게 거절하기보다는 검토해 보겠다는 식으로 대답했다.
“인터넷 매체인데 ‘미디어붓다’에 장편소설 <천강에 비친 달>을 연재하고 있기 때문에 시간을 살펴봐야 가능할 것 같습니다.”
정 작가로서는 연재소설에 매진하고 있으므로 단정해서 답할 수 없었다. <천강에 비친 달>은 독특한 역사소설이었다. 조선시대는 한국인들이 중국의 한자를 빌려와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던 시기였는데, 조선시대 성군 세종대왕이 백성들을 위해 한자보다 쉬운 한글을 만들어 보급하고자 중국을 숭배하던 주류 학자들 몰래 당시의 고승 신미대사와 함께 비밀리에 창제한다는 것이 연재소설의 줄거리였다. 따라서 고증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설득력이 떨어지므로 정 작가로서는 <천강에 비친 달>이야말로 다른 소설들보다 몇 배나 더 힘든 집필이었던바, 외국여행을 한다는 것은 함부로 결정할 수 없었음이었다.
정 작가가 간다고 확답하지는 않았지만, 권 회장은 기회를 보아 오스트리아에 오겠다는 말로 오해했음이 분명했다. 한국에서 검토하겠다는 것은 보류하겠다는 뜻이 강하지만 오스트리아에서는 힘써 보겠다는 말로 이해하는 듯했다. 몇 달 후 권 회장이 또 정 작가에게 국제전화를 했기 때문이었다.
“언제 오시겠습니까?”
“지금 쓰고 있는 연재소설이 끝나면 알려드리겠습니다. 저는 내년에도 연재소설을 쓸 것이기 때문에 당장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빌리 선생에게 작가님을 말씀드렸더니 곡 만나 뵙고 싶어 합니다. 빌리 선생은 모차르트 미완성 악보가 발견되면 완성해 달라고 의뢰할 정도로 대단한 분입니다.”
권 회장은 빌리 씨를 대단히 존중하고 아끼고 사랑하는 듯했다. 모차르트가 1756년생이고 빌리 씨는 1956년생이었다. 그러니까 서로 2백 년 차이가 나는데, 권 회장은 빌리 씨를 모차르트 후신(後身)이라고까지 생각했다.
권 회장이 세 번째로 전화한 것은 한 해가 지난 2015년 1월이었다. 정 작가는 <천강에 비친 달> 연재를 끝내고 또 다른 연재소설을 시작하려고 할 무렵이었다. 마침 전라남도 도청 예술국장이 이불재를 찾아와 새로 취임한 도지사의 지시라며 도청홈페이지에 이순신 장군의 구국 의지와 충의를 연재하자고 제의해 왔던 것이다. 도지사는 정 작가가 무슨 작품을 준비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정치인이었다. 그가 국회의원 시절에 이불재를 방문한 바 있었는데, 그때 대화 중에 그가 “전라도가 의향(義鄕)이라고 하는데 그 말이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라고 했을 때, 정 작가가 “전라도 해안은 나라를 구한 이순신의 혼이 어려 있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으며 덧붙여 이순신 관련 현지답사나 연구를 10여 년 해왔다고 알려 주면서 장편소설 <다산의 사랑>에 서명해 주었는데, 인연이 더 이어졌다. 그가 “저는 신문기자 출신이라서 그런지 문장이 정확한 작가를 좋아합니다.” 하고 정 작가를 신뢰하겠다는 말을 또다시 이불재로 와서 말했던 것이다.
아무튼 권 회장의 세 번째 전화는 대단히 도발적이었다. 아마도 두 번씩이나 국제전화를 했는데 정 작가의 대답이 시원치 않자 약간은 실망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작가님께 이제 레드카드를 내밀어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빌리 선생은 작가님을 납치라도 해서 데리고 오라 합니다. 작가님,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권 회장의 강요 반, 하소연 반이었다. 정 작가는 이제 오스트리아행에 대해서 단안을 내려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권 회장의 레드카드라는 표현에 신의(信義)라는 단어가 떠올라 뜨끔하기도 했다. 아무리 연재소설이 중요하더라도 신의를 저버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생면부지의 빌리 씨가 자신을 납치라도 해서 데리고 오라고 했다니 도대체 그가 어떤 인물인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빌리 씨가 오스트리아 최고 작곡가이기 때문이 아니라 무슨 대화를 하고 싶어서 그런지 작가로서 호기심이 솟구쳤던 것이다. 정 작가는 무엇에 홀린 듯 권 회장에게 약속하고 말았다.
“권 회장님, 가을에 아내와 함께 가겠습니다.”
“숙소는 비엔나에 이미 마련해 두었습니다. 오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정 작가는 마음이 후련하기보다 몹시 부담스러워졌다. 전라남도 도청홈페이지에 3년간 연재하기로 한 대하소설 <이순신의 7년>은 아직 시작도 하기 전이었던 것이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