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을 떠나 강원도로 접어들었다. 차창 밖 들판에 채 녹지 않은 눈과 얼음이 을씨년스럽게 깔려있는 것을 보니 괜스레 마음은 싱숭생숭. 어느새 굽이굽이 길을 따라 ‘지뢰’ 표시가 있는 철책이 이어져있음을 확인하고야 이곳이 북한을 너머에 둔 전방인 것이 실감났다.

날씨는 그다지 춥지 않았다. 이따금씩 외투 속을 파고드는 냉랭한 공기만 아니라면 ‘철원’이라는 말에 겁을 지레 먹고 두껍게 껴입은 옷이 무색할 정도로 햇살은 따사로웠다. 그 햇살 아래에서 총을 든 군인들은 열을 맞춰 서서 기합을 넣었다.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청년이라면 일생에 한 번은 군용 귀마개를 하고 철모를 쓴 장병이 되리라. 생소하고도 애잔한 기분에 웃음이 나왔다.

곧 총무원장 자승 스님이 부대에 도착했다. 이곳은 강원도 철원하고도 제6사단 수색대대. 아름다운동행의 12월 자비나눔 방문의 주인공은 최전방 국군장병들이었다.



총무원장 자승 스님과 격려방문단이 군장병들과 함께 부대 앞을 걷고 있다.



이등병 병사와 마주보고 앉은 자승 스님이 공양을 하고 있다.

자승 스님의 첫 일정은 병사들과 함께 점심공양을 하는 것이었다. 자승 스님 앞자리에는 이제 갓 입대한 이등병이 앉았다. 아직 앳된 얼굴에 맨드라미 같은 여드름자국이 선연했다. 이등병에게는 제 앞에 한국 불교의 장자종단, 조계종의 총무원장 스님이 앉아있는 것보다 별을 세 개나 단 상사가 있다는 것이 더욱 아득했을 것이다.

대학시절 군복무 중인 남자 동기들에게 편지나 보내던 것이 고작이었던 나는 이날의 메뉴인 비빔밥 위에 얹힌 도톰한 반숙의 계란 프라이가 ‘특식’이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점심공양을 마친 자승 스님과 격려방문 일행은 김현집 제5군단장, 이재형 6사단장 등에게 격려금 800만 원을 전달했다. 장병들의 간식과 텔레비전 두 대, 스포츠용품 등 자비나눔 물품은 사전에 전달됐다고 했다. 이재형 6사단장은 “덕분에 따뜻한 겨울이 될 것 같다”며 거듭 감사를 표했다.

이후 자승 스님은 평화전망대로 이동해 북녘을 향해 뚫린 창 앞 앉았다. 백마고지, 강산 저수지, 피의 고지, 김일성 고지…. 북측의 고지(高地)들과, 그와 관련된 한국전쟁 일화를 설명하는 연대장은 창 너머로 보이는 저 들판이, ‘적’의 땅이라고 했다. 전경에 대한 설명을 듣는 격려방문단의 표정이 자못 숙연했다. 평화전망대 아래 위치한 군법당에서 삼배를 올리던 스님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는지.



냄새 안 나게 청소 잘 했지? 하는 상사의 농담에도 각 잡힌 병사들의 자세는 흐트러짐이 없다.

실제 장병들의 숙소인 내무반을 찾았다. 기합이 잔뜩 들어간 경례에 합장으로 화답한 자승 스님은 가장 젊은 날 전방에서 나라를 위해 근무하고 있는 장병들을 보며 자신의 어린 날을 회상하는 듯했다.

“여러분을 보니까 제가 21살에 군복무를 한 생각이 떠오릅니다. 여러분들이 계시기에 후방은 늘 평안하고 안전합니다. 자발적이기보다는 의무 근무를 하고 있지만 지금 여러분은 사회와 국가에 도움이 되는 가장 유익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군복무 가운데 사고 없이 건강할 수 있도록 기도하겠습니다. 건승하시고, 좋은 일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자승 스님의 덕담이 끝나고 난 후 한 장병이 쭈뼛쭈뼛 손을 들었다. 관등성명을 크게 말한 그 이가 자승 스님의 군 생활을 물었다. 스님의 입에서 군대라는 말이 나온 것이 퍽 신기한 모양이었다. “지금 어디에 계시냐”는 질문도 나왔다. 자승 스님은 질문을 한 장병에게 특별 자비 나눔을 했다. 군단장에게 “두 질문자에게 특박이나 외박을 줄 수 있겠느냐”고 간청한 것이다. 자승 스님이 내무반을 나설 때 두 장병은 주먹을 불끈 쥐고, 작은 소리로, “앗싸!” 했다.

구불구불한 흙길을 걸었다. 소초로 향하는 길이었다. 방문단을 수행하는 장병들은 민첩하고 날렵하게 둔덕 위를 뛰어다녔다. 기자도 사진을 찍겠다고 어설프게 그들을 흉내내보았다. 1미터 남짓한 둔덕 위에서 내려가지도 전진하지도 못한 초짜는 결국 자비의 손길을 잡고서야 엉금엉금 내려올 수 있었다.



자승 스님이 소초 부근에서 북녘 땅을 바라보고 있다.

겨울의 소초는 더욱이 고되다고 했다. 해가 짧은 탓에 긴 밤을 보내야 한다는 것. 혹한기에 밤새 경계근무를 서고 나면 온 몸이 뻣뻣하게 굳는다고 했다. 그것은 이쪽의 우리 장병들뿐만 저쪽 소초에서 이곳을 예의 주시하고 있을 인민군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미래의 어느 때에는 양 측 한계선을 넘어 북 쪽에도 자비의 온기가 전해질 수 있을까? 그 과정이 보다 안전하고 평화적일 수 있도록 꽃다운 젊은이들은 혹한과 고립감 속에서 용맹정진하고 있는 것이리라.

2012년 12월 20일. 빨갛게 언 손으로 부대를 빠져나가는 버스를 향해 경례를 하던 그 동생들의 얼굴이 어른거린다.



수색대대 장병들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