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살은 조견 중에 무엇을 보았을까?
정찬주(소설가)
일러스트 정윤경
두말할 것도 없이 관자재보살은 ‘눈을 뜬 이’다.
눈을 뜨지 않고서 어찌 반야,
‘순수한 절대지혜’를 볼 수 있겠는가.
통찰이란 안팎을 투과해서 실상 그대로를
명명백백하게 보는 것이 아니겠는가.
‘행심바라밀다시(行深般若波羅密多時)......’ 하고
중얼거리는 나는 ‘눈을 뜬 이’가 아니다.
과거를 보고, 현재를 보고, 미래를 보는
역사적인 자아를 보는 ‘눈을 뜬 이’가 아닌 것이다.
문득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한 말이 떠오른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것만도 무슨 공덕이 있을까?
내가 나 자신을 조금은 알게 됐으니까 말이다.
내가 반야의 눈을 뜨지 못한
장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함부로 나서지 않는 데만도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린 것 같다.
벌써 나는 칠순을 바라보는 늙은이가 되어 있다.
사십 대 후반에야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남도 산중에 들어
산중 농부처럼 20년째 있는 듯 없는 듯 살고 있으니 말이다.
관자재보살이 부럽고 거룩하다.
바라밀다는 파라미타(paramita)의 음역인데,
파라미(parami)는 ‘피안에 도달한’이라는 뜻이고,
타(ta)는 ‘상태’라는 뜻이다.
반야바라밀다를 의역하면 ‘지혜의 완성’이 된다.
또한 반야바라밀다 앞에 깊은(深; gambhira)이라고
수식한 것은 우리들이 헤아릴 수 없는 ‘눈을 뜬 이’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경지를 나타낸 말이 아닐까 싶다.
14살 때 통도사로 출가한 일타스님은
사후에 미국에서 태어나 명문학교를 졸업한 뒤
한국으로 와서 출가하겠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또 극락암에 주석하셨던 경봉 스님은
한 신도의 전생을 보시고 지장기도를 시켜
그 신도가 쌓아온 업장을 소멸시켜 주기도 했다.
이처럼 과거와 현재, 미래를 통찰하면서
행하는 자비행이 ‘행심반야바라밀다시’인 것이다.
관자재보살과 같은 조견삼매가 없다면
‘행심반야바라밀다시’라고 할 수 없으리라.
우리들은 집중 혹은 몰입을 삼매라고 하지만
관자재보살의 조견삼매는 통찰이 틀림없다.
얕은 수준의 의식이 아닌 깊은 의식이 깨어 있기 때문이다.
수행이라는 의미도 결국에는 깊은 의식을 깨워
순일하게 향상을 지속한다는 뜻이 아닐까.
나는 깊은 의식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어떤 이는 불성(佛性)이라고 할 것이고
또 어떤 이는 마음자리라고 할 것이고
또 어떤 이는 본래심이라고도 할 것이다.
그런가 하면 불학(佛學)을 공부하는 이는
무의식 저편에 있는 제8식(아뢰야식)이라고도 할 것이다.
나는 그것을 작가적인 관점에서 영감(靈感)이라고 부른다.
내 의지나 의식을 다 무장해제한 상태에서
아침에 눈을 떴을 때나 무심히 산책하다가 툭 떠오르는
영감이 내가 고민하던 문제를 해결해 줄 때가 많은 것이다.
한 달 내내 떠오르지 않던 <이순신의 7년>이나
<소설 무소유>란 소설 제목이 금쪽같이 반짝 떠올랐고
<다산의 사랑>은 인도 여행 중에 윤제림 시인 아우가 훈수했고
산길을 걷던 중에 막혔던 소설 줄거리나 문장이 솟구쳤던 것이다.
관자재보살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의 조견(照見)은 무엇일까?
보살이 조견삼매 중에 보았던 지혜는 무엇일까?
새삼스럽게 발견하고 말 것도 없는 문제이다.
조견 다음에 나오는 가르침이 바로 정답이니까.
오온개공(五蘊皆空)이 바로 그것이다.
오온, 즉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 다 공하다는 것이다.
나라고 주장할 근거가 없으니 무아(無我)라는 말이다.
오온개공의 깨달음은 삶의 분기점일 터
깨달음 전은 나라는 존재를 고집하며 사는 소아(小我)
자각하고 나서 물리적 변화가 오면 대아(大我)
깨쳐서 화학적 변화, 사고의 분자구조가 바뀌어버리면 무아(無我)
그렇다. 보살이 본 지혜는 무아였음이 틀림없다.
새벽 4시. 범종소리가 어김없이 들려온다.
잠든 생명을 깨우는, 눈을 뜨게 하는 범종소리다.
푸른 새벽을 불러오는 범종의 자비로운 울림이다.
내 안의 잡티를 헹구어주는 소리가 분명하다.
범종도 보살처럼 자애롭게 자비행을 행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