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회 2

(사진=장명확)

저희들이 참된 성품 등지옵고 무명 속에 뛰어들어(但某甲 自違眞性 枉入迷流) 

운허스님이 ‘저희들이’라는 복수형으로 번역한 ‘모갑(某甲)’은 불특정 인물을 가리키는 인칭대명사다. 아마도 해인강원 초대 강주 시절 운허스님이 이산혜연선사 발원문을 번역할 때 해인강원의 학인들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므로 복수형으로 옮겼을 것으로 보인다. 

모갑은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사용돼 온 용어인데,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다. 그 의미는 ‘아무개’ ‘어느 누구’ 등인데, 문학작품이나 법률 문서 등에서 익명 또는 가명을 사용하여 인물을 지칭할 때 종종 쓰인다. 결론적으로 ‘모갑’은 불특정 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고풍스러운 표현으로 볼 수 있다. 

모갑 앞에 위치한 단(但) 자는 ‘다만’ 또는 ‘부질없이’ 등의 의미를 나타내는 부사(副詞)다. 운허스님이 원문의 ‘저희들이 부질없이’를 ‘저희들이’라고 압축해서 옮긴 것이다. ‘부질없이’는 대수롭지 않거나 쓸모가 없다는 뜻과 ‘공연히’ 또는 ‘괜히’라는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다. 저희들이 부질없이 ‘참된 성품’을 등져 무명 속에 뛰어들었다는 것이다. 부질없이 참된 성품을 등졌다는 것은 참된 성품을 오염시키거나 가리는 온갖 번뇌를 육근을 통해 전달되는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다스리지 못해 낭패를 자초했다는 뜻이다. 

문제는 이 ‘참된 성품[眞性]’을 이해하는 것이 결코 녹록지 않다는 점이다. 진성을 잘 설명하고 있는 가르침으로 우선 『능엄경』의 핵심 개념인 ‘여래장묘진여성(如來藏妙眞如性’)을 들 수 있다. 여래장묘진여성을 줄여서 진성(眞性)이라 하는데, 곧 불성(佛性)이다. 불교에서는 불성 그 자체에 유위법(有爲法)은 없다고 본다. 유위법은 인연으로 생기는 것이므로 마치 마술사가 마술을 부려 나타내는 허깨비와 같다고 본 것이다. 유위법을 허공꽃(空華)에 비유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런데 진성은 유무(有無)를 초월하는 개념이므로 유위(有爲) 또는 무위(無爲)로 판단할 대상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진성은 유위도 아니고 무위도 아니다. 그래서 ‘실답지 못한 것이 허공꽃과 같다.’고 비유한 것이다. 

두루 알다시피 범부(凡夫)는 유(有)에 집착하고 이승(二乘, 성문승과 연각승)은 무(無)에 집착한다. 이런 집착은 성(性)에 미혹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성에 미혹하면 진(眞)이 될 수 없다. 망(妄)을 수단으로 삼아 진(眞)을 나타내면 망(妄)과 진(眞)이 모두 망(妄)이 된다. 조금은 어려운 말일 수 있겠지만 성(性)은 논리를 세워 판단할 대상이 아니다. 그래서 진실도 아니고 진실이 아닌 것도 아니어서 능소(能所)가 없다고 한다. 진실이 아닌 것은 허망도 아니라는 말이다. 

능견(能見)과 소견(所見)은 근(根)과 진(塵)이다. 근은 주관을 이루고 진은 객관을 이룬다. 그래서 근진이 상대(相對)하면 주객이 나뉘어져 식심분별(識心分別)이 일어나지만, 성품 자리는 주객이 없는 자리라는 것이다. 『법성게』에서는 이것을 ‘식심분별시허망 생사열반상적멸’라고 표현한다. 『대승기신론』은 일체의 법이 마음으로부터 일어나고 망령된 생각에 의해 차별이 생기므로, 결국 모든 분별은 자기 마음을 분별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모든 존재의 중심이 마음이기 때문에, 마음이 빚어낸 경계가 마음 밖에 따로 있는 것이 될 수 없다. 비컨대 꿈속에서 무엇을 보는 경우, 실제로 보는 바가 아니므로 보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마음에 매듭이 생긴 것을 근(根)이라 하고, 육근(六根)을 여섯 매듭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육근은 육식(六識), 즉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의식 등 6가지 의식을 낳는 근원이다. 다시 말해 육근, 즉 눈·귀·코·혀·몸·마음의 여섯 기관이 각각의 감각 대상, 즉 모양(색), 소리, 냄새, 맛, 촉감, 심리 현상을 만나서 촉발되는 여섯 가지 의식이 육식이다. 

육식의 근원인 육근이 맺히면 범부고 풀리면 부처인데, 중생은 맺혀 있는 육근에 부질없이 집착하고 매달리지만 부처는 이것을 완전히 풀어버렸기 때문에 어떠한 집착도 없다. 진성을 미혹하면 무명(無明)이 되고 펴서 밝히면 해탈(解脫)인데, 매듭을 차례로 풀어서 여섯이 풀리면 풀릴 것이 하나도 없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의식적 사고와 지성은 사실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욕망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인간을 욕망과 의지의 동물로 본 것이다. 인간 사고의 근저에는 개인의 이익을 관철하려는 이기주의적인 의지나 종족보존에의 의지 그리고 안락과 쾌락에의 의지가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의지는 이성보다 강하기 때문에 언제든 심미적(審美的) 관조(觀照) 상태를 파괴할 수 있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심미적 관조상태, 즉 욕망에서 벗어나 사물이나 현상을 호젓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은 순간적으로만 의지의 노예로 존재하는 상태로부터의 해방을 가져다줄 뿐이다. 의지로부터의 지속적인 해방은 의지의 부정, 즉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무명업상(無明業相)이라는 말이 있다. 『대승기신론』에 나오는 삼세육추(三細六麤)에서 삼세의 첫 번째 미세한 마음을 말한다. 즉 무명(無明)에 의해 최초로 마음이 움직인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아직 주관과 객관의 구별이 없는 단계다. 여기서 업상은 무명이 청정한 진여자성을 오염시키는 것을 가리킨다. 무명업상은 무명에 의해서 청정한 진여자성이 물들면서 생멸심(生滅心)이 처음으로 일어나는 상태다. 무명업상에서는 생멸심의 본질적인 특징인 능견과 소견, 즉 나와 세상 내지 주관과 객관의 분리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따라서 무명업상은 생멸심의 기점이 되고, 또한 마음이 생사윤회하는 업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것이므로 모든 고통의 출발점이 된다. 

이산혜연선사는 이런 범부중생의 성향을 자위진성, 즉 참된 성품[眞性]을 스스로 어기거나 등지는 것[自違]이라고 표현하셨다. 이런 삶은 필연적으로 스스로 자신을 어두운 길[무명]로 이끌어 길고도 쓰라린 고통의 길, 즉 윤회의 흐름 속으로 빠져들게 했다[枉入迷流]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