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만강에서 멀지 않은 병영.
 관동군 소속의 기무라 대좌 부대였다. 그렇지만 이미 기무라는 중국군과의 전투에서 죽었다. 멀리서 대포 소리가 들렸다. 왜애엥 비행기가 지나갔다. 도대체 어느 나라 비행기인지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건 이곳이 말로만 듣던 전장의 한가운데라는 사실이었다. 총소리는 끊이지 않고 사방에서 들렸다.
 점점이 떠 있는 막사 옆으로는 수많은 전차와 트럭이 부지런히 오가고 있었다. 단층의 긴 건물 몇 채, 말할 수 없이 너른 광장, 그런데 담은 없었다. 하기야 사방이 온통 허허벌판이라 여자들이 도망
갈 길은 없어 보였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바로 그 광장 오른쪽 귀퉁이의 긴 초가 한 채였다. 허름한 초가 앞에 줄을 선 인원은 대략 20명 남짓, 언뜻 보아도 거의 대부분이 조선 여자들이었다. 아니 조선 애들이었다. 모자와 가슴에 누런 훈장을 단 장교가 호루라기를 분 다음 큰소리로 외쳤다.
“이 시간 이후부터 너희들은 자랑스런 우리 대일본 제국의 찬란한 꽃송이로 다시 태어났다. 지금 이 시간부터 너희들이 쓰던 이름, 너희들이 쓰던 말과 글은 몽땅 잊어버려라. 이곳에서 우리 대일본 제국의 말을 쓰지 않으면 그 즉시 처벌한다. 어떤 처벌인지는 지금 여기서 말하지 않겠다. 그때가 되면 분명히 알려줄 것이다. 그럼, 자아, 지금부터 이름을 배당한다.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도록 해라. 너희들의 집은 바로 이곳이다.”
 장교가 초가를 가리켰다. 짐작한 일이었다.
“병사들이 이름을 알려주면 큰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외쳐라.”  
 장교의 훈령이 끝나자 입실이 시작되었다. 초가 문 앞에는 몇 명의 병사가 서 있었다.
“1번 너는 이토에”
“이토에.”
 우습게도 사랑과 은혜란 뜻이었다. 맨 앞의 아이가 마지못해 말했다.
 병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다시 한번 말한다. 자신의 이름을 큰소리로 외쳐라!”
“2번 너는 쿠미코.”
 아름다운 여자란 뜻.
 그러나 그다음 아이도 작게 말했다.
“후미......”
 입실은 거기서 중단되었다.

 

 

“밖으로 끌어내!”
 키가 작은 아이였다. 다른 아이보다 긴 머리칼을 가진 열여덟 살 정도. 아이는 벌벌 떨고 있었다. 총검을 든 두 명의 병사가 달려들었다. 머리채가 병사들의 손에 잡혔다. 아이는 금방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병사들은 쓰러진 아이의 옷을 사정없이 낚아챘다. 엉성한 조선의 치마저고리를 벗기는 데는 손가락 몇 개면 충분할 터였다. 아이는 금방 나체가 되었다. 아이가 울부짖었다. 그러나 병사들은 이미 그런 일에 익숙한 동작을 하고 있었다. 발가벗겨진 아이의 배 위로 새파란 칼날이 지나갔다. 아이는 더 이상 울지 못했다. 피가 흘러내렸다.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여자들이 고개를 돌리지도 못하고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사람이면 저지를 수 없는 일이었다. 지옥인 것이다. 옥아는 또록또록 눈을 뜨고 있었다. 맞문 이빨이 부서지고 있었다.
“분명히 경고했다.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된다는걸. 처음이니까 죽이지는 마라!”
 장교의 짤막한 말이 떨어지자 아이에게 옷이 입혀졌다. 아이는 실신한 상태였다. 그러나 그 누구도 아이에게 달려가지 못했다. 옥아가 천천히 아이에게 다가갔다.
“11번 멈춰라!”
 옥아의 번호가 11번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옥아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일본군 병사들이 움직이지 않았다. 옥아는 허옇게 거품을 물고 실신한 아이의 배를 살폈다. 다행히 깊이 패이지는 않았다. 교활한 놈들, 한두 번 한 솜씨가 아니었다. 매번 이곳에 여자들이 올 때면 이런 식으로 했을 터였다. 첫 본보기로.
“붙잡아!”
 그제야 병사 둘이 옥아를 향해 돌진했다.
“비켜라!”
 옥아는 일부러 일본 말로 외쳤다.
 병사 둘이 주춤거렸다.
“우리가 대일본제국의 꽃이라고 하면서 어째서 짐승 취급을 하나. 사람은 짐승이 아니다!”
 옥아는 연단의 장교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순간적으로 장교가 당황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병사들이 몰려들었다. 동시에 연단에서 소리가 들렸다.
“손대지 마라.”
 옥아는 아이를 업었다. 등이 뜨거웠다. 축축한 피 냄새, 옥아는 순간적으로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옥아는 아이를 들쳐 업고 조용히 일본 말로 물었다. 
“의무실이 어디요?”
 병사 하나가 앞장섰다.
 의무실은 본부 막사의 한쪽 끝에 있었다. 말이 의무실이지, 긴 수술대와 침대 몇 개, 그리고 구급약통으로 보이는 하얀 상자 몇 개가 전부였다. 옥아가 아이를 수술대에 눕히자 졸고 있던 의무병 하나가 놀라서 일어났다.
“빨리 치료해 주시오.”
 의무병이 아이보다 옥아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옥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옥아가 밖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운동장엔 아무도 없었다. 옥아는 천천히 걸어서 초가로 들어갔다.

 

 몸도 마음도 바치는 일본 <패랭이꽃>
 성전대승의 용사 대환영

 

 나무판에 새긴 일본어 팻말. 
 <패랭이꽃>, 그것이 눈에 들어왔다. 옥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눈물이 났다. 하필이면 왜 패랭이꽃일까? 가만 보기만 해도 가슴이 저린 꽃. 더구나 그 작은 꽃들은 하나가 아니고 여럿이 모여 서로의 깃을 맞대고 산다. 그 보잘것없음. 그래서 억장이 무너지는 꽃. 무엇이든 남이 좋다는 것은 자신들에게 모두 갖다 붙이는 교활한 족속. 언감생심, 패랭이라니? 정말 일본이라는 나라에 패랭이꽃의 아름다움을 알고 있는 사람이 단 하나라도 있을까?
 옥아는 그 팻말을 보면서 회령 경찰서 앞에서 일장 연설을 하던 일본인 서장을 떠올렸다. 무언지는 몰라도 제 나라 일이라면 선악, 노소를 막론하고 입에 거품을 무는 일본인들. 옥아는 그것이 가슴 아팠다. 눈물만 많은 조선인들, 말만 많은 조선인들, 그녀는 자신이 조선인임이 부끄러웠다. 너무 부끄러웠다. 삼천리 금수강산이라고 자랑하는 조선의 전국 방방곡곡에서 끌려와 일본군의 성 노예로 죽음보다 못한 삶을 살아가는 제 나라 여자들을 두고 그 많은 조선 사내들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 것일까? 아버지와 오빠를 너무 잘 둔 것이다.
 옥아는 11번으로 향했다. 오른쪽에서 다섯 번째 방이었다. 11번이라는 표시가 뚜렷했다. 말로만 듣던 위안소였다. 두 평 남짓한 창문 없는 방,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침대, 그 위에 드러누운 군용 담요, 세숫대야에 늘어진 수건, 컵에 자리 잡은 칫솔과 치약, 한쪽에 놓인 비누, 소독약, 다섯 개가 든 한 봉지 삿꾸, 붉은 전등.
 옥아는 조용히 침대 끝에 내려앉았다. 눈을 감았다. 나비가 날고 있었다. 이게 꿈일까? 그녀는 잠잠히 두 손을 앞으로 모았다. 그러나 기도가 될 리 없었다. 결정적인 순간에는 이 세상 그 누구도 도움이 될 리 없었다. 그것은 부처님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회산의 말처럼 부처님이란 있는 것일까?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정말로 그분이 이 세상에 왔고, 이 세상 어딘가에 지금도 그분이 존재하고 있다면 결코 이런 일은 있지 않을 것이다.  
 그때 종소리가 울렸다.
 밖으로 집합하라는 스피커 소리가 들렸다. 바깥에서의 소란 거림, 문득 옥아도 일어났다. 미용실은 초가 바로 옆에 있었다. 나무 의자가 다섯 개 있었다. 그 앞에 생전 처음 보는 가위를 들고 일본 병사 다섯 명이 서 있었다. 아무도 말이 없었다. 그야말로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여자들의 머리칼은 순식간에 잘렸다. 옥아는 잘려나가는 여자들의 머리칼을 보면서 전택경의 아내를 생각하고 있었다. 일본식의 짧은 머리칼, 병사들은 그 머리를 만들고 있었다. 능숙한 솜씨였다. 옥아의 차례, 그러나 기실 옥아의 머리는 이미 짧은 일본식이었다.

 

 

 

 머리칼을 가지고 나라, 목숨, 애국 운운하던 한 조선 양반이 있었지. 목은 잘라도 조상이 물려준 머리칼은 자를 수 없다고 순국했지. 순국. 흐흐. 나라와 조국이 아니라 양반을 내놓기 싫었겠지. 한 줌도 되지 않는 그 양반이라는 계급장을 대대손손 물려주고 싶었겠지. 그래서 난 이렇게 머리칼을 몽땅 밀었다. 그런 사람들이 싫어서. 그런데 더욱 비극적인 것은 지금 그 사람이 몽매한 조선 사람들에게 절대적 애국자로 추앙을 받고 있다는 거지. 흐흐흐.

 

 그녀는 아득히 회산의 말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밥 먹고 한 일은 제자를 만든답시고 공자왈 맹자왈을 읊어 세력을 키운 일과 그야말로 끝없는 상소였다. 그가 한 일은 오로지 그뿐이었다. 그것으로 그는 대단한 벼슬을 따고, 그것으로 서푼도 되지 않는 유림의 명성을 얻었다. 그렇게 언필칭 유림의 대표라고 자부하던 그에게 만인평등과 신분 철폐는 사대부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하여 그가 지키고자 했던 것은 이 땅의 백성도, 강토도 아니었다. 안으로는 끝까지 못난 이씨왕조를 떠받들어 언제까지나 백성들 위에 군림하고 싶었고, 밖으로는 자신들의 이익을 세세생생 담보할 수 있는 중화주의와 사대사상의 지킴이고 싶었던 것이다. 그 노인의 입에서 나온 나라와 백성 운운 그 자체가 우스운 일이었다. 일본이 이렇게 악독하게 조선 백성들을 괴롭힌 것은 오히려 몇 십 년의 세월이었다. 그러나 그 노인들의 부류가 양반이라는 이름 아래 백성들의 고혈을 짜낸 세월은 헤아릴 수 없이 길었다. 옥아도 회산처럼 그 노인의 이름조차 떠올리기 싫었다. 날려버리고 싶은 것은 정작 일본이 아니라 바로 그 이름이었다. 안타깝게도 난설헌이 날려버리지 못한 것들. 옥아는 아득히 아득히 난설헌의 시를 외고 있었다.

 

 獨鶴望遙空/夜寒擧一足/西風苦竹叢/滿身秋露滴. 외로운 학이 먼 하늘 바라보며/밤이 차가운지 다리 하나를 들고 있네/가을바람에 대숲도 괴로워하는데/온몸이 가득 가을 이슬에 젖었네. 

 

 옥아는 잘려나가는 머리칼을 보면서 소리 없이 울고 있는 조선 여자애들을 잠잠히 바라보고 있었다. 옥아는 비로소 창 너머로 보이는 지옥의 위안소를 훑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