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이 금강산에서 돌아온 지 며칠 안 된 어느 날이었다. 그는 화실로 쓰는 웃방에서 금강산을 돌아볼 때 그린 산수화를 다시 보고 있었다.

 

 

 

그런데 조용하던 안방에서 갑자기 “아뿔사!”하는 아내의 비명 가까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선은 무슨 심상치 않은 일이 생겼음을 직감하고 안방 사이문을 열었다.

 

순간 그의 눈앞에는 뜻밖의 광경이 벌어졌다. 방 한구석에는 엎지러진 국사발이 딩굴고 있고 당황한 기색의 아내는 방바닥에 펴놓은 비단치마자락을 행주로 부리나케 닦고 있었다.
“어찌된 일이요?” 정선이 급히 물었다.
“제가 그만 실수하여 비단치마에 고기국물을....”
아내는 말끝을 흐리며 저도 모르게 “후”한숨을 쉬었다. 그럴 만도 하였다. 비단치마로 말하면 같은 중인 출신의 어느 한 집에서 빌려온 것이었다. 정선은 아내 곁으로 다가가 비단 치마를 훑어보았다.

 

치마는 생각하던 바 하고는 너무나 험하게 더러워져 깨끗이 빨아 손질한다 하여도 본 모양대로 될 것 같지 않았다.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다.

 

 

 

아내는 고정한 남편에게 때 아닌 근심을 끼친 죄스러움으로 하여 고개를 푹 숙이고 연송 한숨만 쉬었다. 걱정하는 아내를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며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던 정선은 갑자기 환하게 웃으며 치마말기를 뜯고 주름을 펴서 더러워 진데를 깨끗이 씻으라고 아내에게 일렀다. 아내는 의아스러운 감이 없지 않았으나 정선이 시키는 대로 하였다.

 

며칠 후 유달리 날씨가 청명하고 대기 또한 청신한 아침이었다. 정선은 문갑을 열고 아내가 정히 손질해 넣어두었던 비단치마를 꺼내었다. 모두 세 폭이었다. 그는 그 가운데서 제일 큰 폭을 방안에 쭉 펴놓고 이미 생각해 두었던 금강산전경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잠시 잠간 사이에 그림이 완성되었다. 그런데 그가 그린 산수화가 얼마나 섬세하고 현란하였던지 금강산 1만2천봉우리와 골짜기를 통째로 떠 옮겨다 놓은 듯하였고 정채가 흘러넘쳤다.

 

정선은 나머지 비단 두 폭에도 금강산풍경을 그렸다. 그림마다 기막힌 솜씨여서 둘도 없는 보배로 될 만 하였다.
그 후 비단치마의 임자가 찾아왔다. 정선은 수인사를 나누자 “내가 얼마 전에 그림그릴 의욕이 부쩍 동했는데 좋은 바탕천이 없어서 한스러웠소. 마침 댁의 비단치마가 우리 집에 와 있다기에 주인의 의향을 묻지 않고 거기다가 금강산 1만2천봉우리를 옮겨 놓았소. 부인과 딸이 들으면 놀랄 터인데 어떻게 하면 좋겠소?”라고 걱정하면서 비단치마에 그린 산수화를 펴보이었다.

 

비단치마의 임자는 그림의 품격을 아는 사람인지라 그림을 보자 대뜸 “이것은 천하의 보물이다!”고 부르짖으며 정선에게 거듭거듭 고맙다는 인사를 하였다. 천하의 명화를 얻은 반가움과 기쁨에 넘쳐 집으로 돌아간 그는 사례로 잘 차린 음식을 정선의 집에 보내오기까지 하였다.

 

 

 

비단치마의 임자는 그림 세 폭 가운데서 제일 큰 것은 장정을 잘하여 가보로 삼았고 작은 것 두 폭은 중국에 가는 사신일행을 따라 가는 기회에 연경(베이징)에 가지고 갔다.

 

그가 두 폭의 그림 중에서 우선 하나를 화사에 가져다 보이고 있는데 때마침 사천성의 승려 한사람이 지나가다가 들어와 보더니, 세상에 보기 드문 희한한 그림이라고 절찬하였다. 그는 “우리가 방금 절간 하나를 새로 세웠는데 이 그림을 부처님 뒤에 붙이겠으니 은 100냥에 팔아주시오.”하고 간청하였다. 그림임자는 그렇게 하라고 선선히 응하였다.

 

그런데 이때 남경에서 온 선비 한사람이 그림을 보더니 다짜고짜 100냥에 20냥을 더 얹어주겠으니 자기에게 팔라고 조르는 것이었다.

 

그러자 승려가 크게 화가 나서 선비를 책망하였다.
“내가 이미 값을 정하고 사기로 한 것인데 명색이 선비라는 사람이 도리를 잃고 이렇게 할 법이 어디 있소. 내가 30냥을 더 내고 가져가겠소.”
그러면서 은 150냥을 꺼내놓았다.
그림임자는 남경선비를 타일러 보낸 다음 “당신 같은 사람에게는 50냥만 받겠소.”하며 금강산그림을 승려에게 안겨주었다.
그는 이국땅에서까지 경탄을 자아내는 금강산의 경치와 겸재 정선과 같은 명화가를 가진 자랑으로 가슴 들먹이며 화사를 나섰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