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현대 선불교의 중흥조 경봉 대선사의 법문과 일기, 그리고 대선사의 상좌로 한문 번역에 탁월한 견해를 가진 명정 스님이 풀어 쓴 ‘경허집’과 ‘신심명’ 등이 5권 1세트의 전집으로 구성돼 ‘2014 극락호국선원 시리즈’로 새롭게 출간됐다. 특히 이 책들은 이미 30~40여 년 전 출간 이후 절판됐던 책으로 지난 3년의 기간 동안의 한 자, 한 자 재기록하는 인욕과 정진의 과정을 거쳐 나온 책이다.

영축총림 통도사 산내암자인 극락암의 극락호국선원에서 발행한 이 책은 ‘2014 극락호국선원 시리즈’라는 이름아래 총 5권의 책으로 구성돼 있다. 경봉 스님의 일기가 담긴 <삼소굴 일지>, 경봉 스님의 법문을 엮은 <경봉 스님 말씀>, 그리고 삼조 승찬 대사의 신심명을 명정 스님이 풀어 쓴 <신심명>과 경허 스님의 한문 선시를 명정 스님이 우리말로 풀어 쓴 <경허집>, 마지막으로 명정 스님의 수행 일화를 담은 <차이야기 선이야기>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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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 극락호국선원 선원장 명정스님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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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봉스님의 시자로 가까이에서 경봉스님을 모시며 공부했던 명정스님이 펴낸 전5권 '2014 극락호국선원 시리즈'.

“이 일지(日誌)는 세상에서 흔히 쓰는 일기와는 그 바탕이 다르다. 사건의 기록도 없지 않지만, 주고받은 법담(法談)과 감회들이 격외(格外)의 시(詩)로써 장마다 빛을 발하고 있다. 서신(書信)을 보낼 때도 반드시 그 밑글을 남긴 걸 보면,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선사(禪師)의 치밀 주도한 면모에 접할 수 있다.”

1985년 법정 스님이 쓴 책의 서문에서 알 수 있듯이 <삼소굴 일지>는 근현대 굴곡의 한국불교 역사와 그 가운데서도 선사들의 치열했던 수행, 그리고 경봉 선사의 선기(禪機)와 자애심 가득한 삶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글이다. 경봉 스님이 36세 되던 때부터 85세에 이르기까지 쓴 이 일기는 스님의 입적 3년 후 상좌 명정 스님이 경봉 스님의 기록 가운데 6번째로 출간한 책이다. 명정 스님의 후기에 따르면 경봉 스님은 19세가 되던 1910년부터 1976년 4월2일까지 거의 빠짐없이 매일 일기를 쓰셨고 유실된 부분을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 깨끗하게 보관돼 있었다.

몇 년 전 법공양으로 재 간행 돼 화제를 모았던 <경봉 스님 말씀>도 이번 극락호국선원 시리즈에서 다시 선보였다. 1979년 발행된 이 책은 1970년대 중반 경봉 스님의 설법을 기록한 첫 번째 책 <법해>와 더불어 경봉 스님의 재세 시 법문을 엮어 발행한 책이다. 법좌에서 설한 법문, 선에 대한 경봉 스님의 분명한 견해를 직접 법문을 청하는 마음으로 읽어내려 가다보면 어느 새 선승의 가르침 한 가운데 와 있음을 느낄 수 있도록 구성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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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의 선지식으로 추앙받았던 경봉대선사의 모습.


“수도하는 사람들은 항상 눈으로 빛을 보고 귀로 소리를 듣고서는 빛과 소리를 없애고 도를 따로 구하려 하며 번뇌와 망상 때문에 공부가 잘 되지 않는다. 이것을 끊으려고 애를 쓰는데 얼음이 녹으면 그것이 곧 물이 되듯이 번뇌와 망상을 돌이키면 그곳이 곧 깨닫는 당체가 되고 소리와 빛도 그 당체가 곧 도인 것이다.”

‘대승찬(大乘讚)’이라는 경봉 스님의 법문에 실린 이 글에서도 후학들을 위한 경봉 스님의 지극한 가르침이 담겨있다 하겠다.

경봉 스님의 선기 가득한 가르침과 글의 묘미는 명정 스님에게로 고스란히 이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봉 스님 재세 시 명정 스님이 번역해 발행한 <신심명>은 삼조 승찬 대사의 신심명에 중봉 명본 화상이 찬을 단 글이다. 문장마다 간결함과 명백함이 드러나 있어 읽는 이로 하여금 청량한 감로수를 맛보는 기운마저 전달한다. 신심명은 예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수행자들로부터 번역, 해설될 만큼 선 수행의 필독서로 불리지만 쉬우면서도 정확한 한글 번역본을 만나기가 어렵다는 세간의 넋두리에서 볼 때, 신심명은 물론 중봉 화상의 찬까지 풀어쓴 이 책은 단 한 권만으로도 충분한 책의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신심명>을 풀어낼 때 명정 스님은 경봉 스님으로부터 한문으로 된 선시와 선문에 대해 우리말로 풀어내는 데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어찌 노력 없는 결과가 있으랴. 명정 스님이 한창 번역에 몰두할 당시에는 앉아 있는 좌복에 구멍이 날 정도였다고 하니 단순히 우리말을 찾아 맞추는 수준을 추월해 이미 명정 스님에게는 선사들의 글을 대하는 일 자체가 용맹정진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한 밀도 깊은 과정을 거쳐 탄생한 책이 바로 신심명과 더불어 <경허집>이다.

일제강점기 한국 선불교의 기틀을 세웠던 경허 스님의 선시들은 “비바람 눈보라 치는 텅 빈 산에서 붓을 잡아도 세간을 벗어난 것만도 아니어서, 종횡으로 힘차고 생소하거나 숙달되었거나 걸림 없이 문장마다 선(禪)이요, 구절마다 법(法)”(만해 스님 찬)이라는 표현 그대로 시대를 초월한 감동을 전하는 선구(禪句)임이 분명하다. 특히 시대의 선사들을 손에서 손을 거쳐 발행되고 다시 명정 스님을 통해 이 시대까지 전해졌으니 스님의 기록은 실로 명정 스님이 아니었다면 잊혀졌거나 왜곡된 상태로 흘러가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무엇보다 <경허집>은 영문판으로도 발행돼 한국 불교를 세계에 알리는 책이 되기도 했으니 책의 가치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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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5권 1질의 '2014극락호국선원 시리즈'. 정갈한 편집이 돋보인다.


이렇게 경봉 스님의 일기와 법문, 신심명, 경허집과 함께 명정 스님의 수필 <차이야기 선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는 점도 이번 시리즈가 주는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 가운데 하나다. 간결하고 쉬운 문장으로 선의 깊이를 끌어낸 스님의 글에는 진한 차향이 배어 있어 읽는 감동을 더한다. 이렇게 <차이야기 선이야기>까지 총 5권의 책은 모두 책만 있을 뿐 판본이 존재하지 않아 한 자 한 자 원본과 대조하며 일일이 기록한 결과물이라는 사실은 이 책의 가치를 웅변해준다.

원본을 그대로 살리되 현대인들이 읽어 내려가기 편하도록 한글에 한문을 달았고, 불서전문출판사인 도서출판 맑은소리맑은나라가 담당한 편집 또한 전체적으로 통일되면서도 정갈한 맛을 느끼게 하는 구성이 돋보인다.

극락암에 한 번이라도 가 본 이라면, 아니 극락암에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이라 하더라도 이 책을 통해 극락호국선원의 선풍에 젖어 번다한 이 시대의 오만가지 걱정거리들을 놓아 버리고, 이번 전집에 붙인 명정 스님의 글을 새기며 선사들이 이끄는 가르침의 길을 따라 선의 자리를 탐구해 볼 일이다.

“스님 생전, 두 눈 부릅뜨고 글을 쓰고 책을 만들어내던 기억만은 지금도 또렷하며 그 양분으로 찾아오는 선객들에게 한 소식이라도 들려줄 수 있지 않나 싶다. … 먼저 가신 스님의 가르침을 후대에까지 잇게 하고픈 마음에서였으며 영축산의 위용과 승풍, 극락의 가풍을 간접적으로나마 짚어주고 싶은 마음에서이다. … 5권의 책들은 내 부족한 수행의 내면이기도 하며 내생에까지 이어갈 ‘공부’이기도 함을 밝혀두는 바이다.”

극락호국선원 명정 스님이 간행한 이 책은 전5권 한 질 10만원으로 시판된다. 그러나 경봉 대선사의 법향(法香)을 널리 전하고자 하는 명정 스님의 특별한 발원에 의해 경봉 대선사의 법향이 드리워져 있는 통도사 극락암을 방문하거나 직접 연락을 하는 분들에게는 특별히 할인혜택이 제공된다.

*통도사 극락암 극락호국선원의 주소 및 연락처는 ‘경남 양산시 하북면 통도사로 108’이며 전화는 055)382-7083이다.


*편저자 명정스님은?
근대 선지식 경봉스님의 시자로 엄격한 선 수행 지도를 받았다.
걸망을 지고 운수 생활을 하다가 지금은 통도사 극락호국선원 선원장으로 선방에서 후학들과 일상삼매에 깊숙이 빠져 지내고 있다.
틈틈이 경봉스님 수묵집과 일지, 편지글 등을 엮어 왔고, 승가와 재가를 통틀어 가장 지명도가 높은 <경허집>, <한암집>, <신심명> 등의 번역서를 냈으며, 선가의 이야기를 풀어낸 <차이야기 선이야기>, <법해> 등 선방 이야기를 다양하고 밀도 있게 그려낸 선방의 수좌이다.
경봉스님의 열반 30주기를 맞아 스님의 생전 수행이력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사진집 <향성>을 2012년에 내 놓았다.
2014년 봄, 그간의 저서들을 전집으로 엮어 다시 세상에 내놓는 일을 내생까지 이어갈 '공부'라는 의미에서라고 선객은 밝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