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이 기사를 쓰는 기자와 비슷한 시기에 불교언론에 투신했다. 푸릇푸릇하던 시절 기자와 그는 동료로서, 도반으로서 술집이나 찻집에서 대화를 나누곤 했다. 우람한 덩치에 온화한 카리스마를 가졌던 그에게서 당시 기자는 문재(文才)를 읽었다. 어쩌면 그는 작가와 기자의 경계를 넘나드는 팔자를 타고난 것인지도 모른다.

글 잘 쓰는 친구! 이것이 그에게 가졌던 기자의 인상이었다. 그러나 그와 나는 절집안의 불합리한 조건들로 인해 한 때는 불편한 동거를 한 적이 있었다. 점령군처럼 들어온 신문사의 새 경영진들이 무지막지하게 기자들을 내쳤을 때, 그리하여 본의 아니게 수개월을 신문사 밖을 헤맬 때 그는 점령군의 ‘군사(?)’가 되어 나타났던 것이다. 도저히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는 ‘만행(?)’에 다름 아니었다.

어렵게 복직을 하고 그와 기자는 한 신문사의 기자로 1년여 간 불편한 동거를 했다. 의례적인 대화를 나눴을 뿐, 마음을 담은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다. 그는 그 당시 통음하는 일이 잦았다. 본래 곡차를 즐기는 체질이기에 그러려니 했다. 그가 신문사를 떠나고 난 후에도 기자와 그는 의례적인 관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재작년 말쯤, 그가 어렵게 자리를 마련하고 당시의 일을 특유의 어눌한 말투로 진심으로 사과했다. 마음속으로는 이미 지난 일이었지만, 그의 그런 모습이 그렇게 고맙고 아름다울 수 없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크게보기세월이 흘러 그는 불교저널이라는 언론사에서, 기자는 미디어붓다라는 언론사에서 일을 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겸연쩍은 미소와 함께 작은 책 한 권을 건네 왔다.

“소개 좀 잘 해줘. 내가 이 대표에게 미안한 시간을 지낼 적에 썼던 글인데, 이번에 책으로 묶었어.”

<마음의 밭에 달빛을 채우다>(글앤북)이라는 책이었다. 책의 표지에는 ‘선시읽기’라는 부제와 함께 ‘김 종 만’이라는 그의 이름이 세로로 새겨져 있었다.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의 호를 ‘퇴월(退月)’이라고 밝혔다. 퇴월이라, 일을 마치고 물러나는 사람(無事人)이라는 뜻인 듯한 데, 그는 어느 사이에 일을 다 해 마쳤을까?

“이 사람 참…, 언제 이런 일을 했어. 노상 곡차에만 젖어 사는 줄 알았더니…”

책은 작았으나, 그 무게는 묵직했다. 그 책을 받고 그의 서문을 읽는 순간, 이 책을 제대로 소개해야겠다는 어떤 의무감 같은 것이 밀려왔다. 그런 부담이 책을 받은 지 석 달이 지나도록 소개를 하지 못하고 기자의 책상머리에 그의 책을 놓아둔 이유다.

오늘 그의 책을 다시 집어 들었다. 퇴월의 내공이 장난이 아닌 줄 알지만, 그래도 오늘은 숙제를 해 마쳐야겠다는 마음이 홀연히 일어났기 때문이다.

빈손에 호미 들고
물소 등에 올라앉아
다리 위를 지나는데
다리는 흘러가고 물은 흐르지 않네

선시 ‘교류수불류(橋流水不流)’의 내용이다. 이 글의 주인공은 부대사이다. 고정관념을 한 방에 날려 보내는 통쾌함이 잘 드러나 있는 게송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그의 설명을 들어보자.

“기상천외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선리를 터득한 이들의 눈엔 하등 이상할 일이 없다. 이미 분별심을 넘어선 경지, 경계를 뛰어넘은 자유인의 눈으로선 다리와 물이 둘이 아니다. 바로 체용일여(體用一如)의 경지이며, 불이(不二)의 원리를 체득한 단계다. 체용일여의 논리를 터득하고 나면 물아일여의 경지가 다가선다. 백운(白雲)이 산을 지키고 청산(靑山)이 활보한다거나…”

고인의 말에, 화두 하나를 해결하면 7백공안이 한꺼번에 해결된다더니, 과연 그에게도 물리가 튼 모양이다. 회한의 시절을 선시에 매달려 극복한 내공이 절절하다. 임종게 한 편을 더 보기로 하자.

인생살이 70년은
예부터 드문 나이라
일흔일곱 해 전에 왔다가
일흔일곱 해 후에 가네

人生七十歲

古來亦稀有

七十七年來

七十七年去

이 임종게는 한국선시의 무한한 가능성을 제시한 인물로 일컬어지는 백운경한(白雲景閑)의 작품이다. 그의 해설을 들어보자.

“주옥같은 선시를 수없이 남긴 경한의 임종게는 어찌 보면 매우 단순하기 이를 데 없다. 그렇지만 여기에 그다운 선지가 듬뿍 배어 있음을 간과해선 안 된다. 일흔일곱을 말하지만 그것은 무흔(無痕)이다. 그는 무흔의 경지를 이미 체득했다. 때문에 그는 임종 직전 제자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다. ‘내 부도를 세우지도 말고 비석도 세우지 말라. 내 죽거든 반드시 화장해 그 재를 강물에 띄워 보내며 더 이상 어떤 흔적도 남기지 말라’. 무심과 무흔을 일갈하고 있는 백운경한의 경지가 임종게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는 것이다.”

달은 차면 기운다. 달이 차면 기우는 이치를 알면 현인이고, 모르면 우인이다. 그가 퇴월이라는 호를 사용하는 것은 아마도 달이 차면 기운다는 철리를 잘 깨닫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마음의 밭에 달빛을 채운’ 그가 달빛을 비우며 이루어갈 또 다른 세계는 어떤 것일까. 오늘도 인사동 한 실비집 탁자에 앉아 탁주 한 사발 기울이는 그의 어깨로 하현달빛 어른거린다. 224쪽, 9,800원

*저자 김종만은?

대전대학교 국문과를 나와 1988년 불교신문 기자로 입사했다. 이후 주간불교신문 등의 편집부장을 거쳐 제주불교신문 편집국장을 역임했다. 월간 붓다 편집인을 지냈으며, 조계종 호계원, 국무총리소속 10·27법난피해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에서 명예회복추진반장으로 있었다. 현재 불교저널과 월간 선원 편집장으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