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게보기햇살의 미소로

그대 나를

맞이했나 봅니다

봄눈 녹듯 물길 열려,

사원의 문 열고

이 길 들어섰나 봅니다

책의 제목보다 발문이 더 큰 활자로 인쇄된 잔잔한 느낌의 책이 발간됐다. 안개에 덮인 아름다운 강변에 나와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표지의 이 책은 현원 스님이 쓴 <아름다운 향기만 남을 때까지(이하 아향남)>(맑은소리 맑은나라)이다.

시집인가 하고 책 표지를 들추니 시집이 아닌 에세이집이다. 그러나 에세이의 글들이 청아하고 아름다워 행갈이를 하면 시와 진배가 없을 정도다.

이 책은 사실 10년 전에 출간되었던 수행에세이이다. 짧지 않은 세월이 흘러 묻힐 법도 한 이 책이 다시 복간의 기회를 맞은 것은 저자 현원 스님의 도반 스님들의 원력 덕이다. 각현, 각광, 각성 스님 등 도반스님들 누구랄 것도 없이 묵은 책장에 꽂혀 있는 이 책을 꺼내 살펴보노라면 진한 그리움과 잔잔한 추억이 뒤섞인 소박한 옛 문장에 가슴 한켠 묵직하게 따뜻함이 번지는 것을 경험했고, 이런 소중한 경험들을 좀 더 많은 이와 함께 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책을 다시 찍어내기로 뜻을 모은 것이다.

후두둑! 하는 소리에 정신을 차려보니 앞마당에 늘어선 파초가 온 몸으로 장대비를 받아내고 있었습니다.

속가에서는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로 대표되는 사군자에 연꽃, 소나무, 목단, 그리고 파초를 더해 팔군자라고 부릅니다. 파초는 가난하지만 기개 있는 선비를 상징합니다. 옛 선비들은 파초 잎에 떨어지는 빗소리로 배고픔을 잊고 붓글씨 연습할 종이가 없으면 파초 잎으로 대신했습니다. 파초는 이처럼 가난한 선비의 필수품이었기에 팔군자에 속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절에서는 파초를 속이 없는 맹탕에 비유합니다. 양파를 아무리 까도 알맹이가 없듯 파초 역시 알맹이 없는 껍질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 안에 본래 성품을 찾는 데 아주 좋은 스승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 탓에 큰 절에서는 꼭 몇 그루의 파초를 가꿉니다. 알맹이 없는 껍데기로만 위세를 자랑하는 어리석음을 파초를 통해 말없이 지적하며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80쪽

나는 때때로 향나무가 되어 선을 위해 온 몸 바쳐 태워버리고 온 세상을 우리 몸에서 나는 향 내음으로 가득 차게 만들고 싶습니다. 한 번 맡기만 하면 마음이 청정해지고 모든 번뇌를 가라앉히는 감로향이 되고 싶습니다. -103쪽

이렇게 빗장문을 열듯 <아향남>는 우리 곁으로 다시 찾아왔다. 이 책은 ‘내 마음에 내리는 비(法雨)’, ‘용서, 나를 위한 기도’, ‘내 마음의 보약 한 첩’, ‘회향의 삶을 위하여’, ‘내 마음에 씨앗 하나’의 다섯 가지 소제목으로 나눠 구성됐다.

어느 글 할 것 없이 현원 스님이 도심 포교당에서 불자들을 제접하는 가운데, 그 평범한 일상에 시선을 고정하고 평소 놓치기 쉬운 삶의 가치와 철학에 대해 풀어내고 있다. 동진 출가한 12살, 그 시절로 돌아가 방황했던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을 시작으로 선한 목표를 가지는 삶, 타인을 이해하고 배려함으로써 비로소 알게 되는 용서의 참뜻, 매 순간 수행으로써 살아낸 삶의 진정한 회향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때로는 부드럽고, 때로는 완곡하지만 날카로운 경책도 마다 않는다.

이 책을 편집한 맑은소리맑은나라 김윤희 대표는 “불교집안의 정서를 따뜻하게 차근하게 풀어나간 현원 스님의 글들은 누구라도 마음 한 자락 꺼내 놓고 격 없이 정겨운 덕담을 나누듯 향긋했고, 누구라도 어려운 불교가 아니라는 사실을 떨어지는 낙수를 보며, 뽀얗게 내린 눈을 보며 포근하게 그려내고 있었다”며 “무엇보다도 육신의 덧없음을 아름다운 책의 출간으로 대신하고 싶다며 출판을 제안하신 각현스님께 고마움을 전한다”고 말했다. 168쪽, 12,000원

*저자 현원(玄元)스님은?

12세에 표충사로 입산하여 통도사 강원을 마쳤다. 이후 13안거를 성만하고 8년간 토굴수행으로 정진해 온 스님은 2000년부터 2011년까지 분당 연화사 주지를 역임했으며, 현재 대전 봉국사 주지 소임을 맡고 있다.

*일러스트레이터 김은주는?

부산경성대를 수석 입학했고, 중국 항주 미술대학산수화과 진수과를 졸업했다. 중국 천진미술대학 산수화과 대학원을 수료한 후 부산교육청 미술전 한국화부문 특선, 창원대 미술전 한국화부문 우수, 삼성문화재단 주최 미술전 한국화 부문 가작 등 다수의 수상경력을 갖고 있다. 출간저서로 미술임용실기책인 <멘토아트리에>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