빳빳하게만 보였던 아버지의 옷소매에서 허름하게 헤진 구멍을 발견했을 때의 연민을 경험해본 적이 있는가. 크게만 보였던 아버지가 하나의 인간으로 다가오는 순간이 있다. 늘 단단하고 두껍게만 보았던 모습 이면에 깊이 자리 잡은 옹이를 만질 때의 먹먹함. 많은 것을 이루고 쌓아온 꼭 그만큼 희생해야했던 날들. 차마 내색하지 못하고 가슴에 삭혀야했던 것들. 살아오면서, 살아가면서 떠나보낼 수밖에 없던, 그런….

내 아버지가 본인의 이름 세 글자를 지우고 ‘아버지’란 대명사로 살아갔듯, 역사 속의 다산 역시 ‘다산 정약용’이라는 고유명사 아래 인간적인 면모가 묻혀버린 면이 없지 않다. 우리 아버지의 모습과 다르지 않음이다.

올해는 한 시대를 풍미하기도 하고 철저히 외면당하기도 한 조선 후기 실학자, 다산 정약용이 탄생한지 250년이 되는 해다. 그동안 다산을 말하고 기리는 책들은 숱하게 많았다.

하지만 여기, 다산 탄생 250주년만큼이나 특별한 의미를 가진 책이 나왔다. 정형화되고 우상화됐던 다산을 ‘인간적인’ 프리즘으로 바라본, 소설가 정찬주의 신작소설 <다산의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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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의 사랑>은 그간 다산에 대해 알려져 있던 모습을 달리 해석한다. 내가 알던 다산 정약용과 소설에 등장하는 정약용의 모습을 비교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혜장 스님과 초의 선사는 다산이 유배 시절 받아들인 제자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 그들은 다산과 상호 소통하고 존중해마지않는 벗으로 그려진다. 신분과 나이를 초월하여 탁마하고 서로의 외로움과 고독을 함께 나누는, 요즘 말로 ‘소울 메이트’인 것이다.

“정약용은 자신보다 열 살 어린 혜장을 학문과 덕망이 높은 숙유로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강진 땅에 속유(俗儒)가 미치지 못할 혜장 같은 천재가 있다니 경이로웠다. 정약용은 한 번에 수백 마디를 거침없이 토해 내는 혜장의 말을 막지 않고 들었다. 어느새 고성암 승려들도 방문 밖에서 꼼짝 않고 선 채 혜장의 얘기를 귀여겨듣고 있었다.(47p)”

“정약용과 초의의 찻자리는 저녁을 한 뒤에도 계속 이어졌다. 두 사람은 말띠로 스물네 살이나 차이가 나는 아버지와 아들 같았지만 차를 마실 때만큼은 나이와 신분과 학식을 뛰어넘었다. 찻자리에서는 누구나 차의 맑고 향기로움을 평등하게 나눠 가졌다. 차는 두 사람에게 진리의 즐거움(法喜)과 선의 기쁨(禪悅)을 주는 약이었다. 두 사람은 무욕과 무아의 경지에 풍덩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차를 마셨다.(201p)”

또 한 가지 <다산의 사랑>의 도드라지는 특징은 짙은 황토색과 생명친화적인 태도에 있다. 정찬주 작가는 변해가는 계절과 풍경을 감각적으로 묘사한다. 옛 마재에서 강진에 이르기까지의 배경을 하나도 허투루 놓치지 않고 그려내는 것에서는 노련함과 치밀함마저 엿보인다.

꽃이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게 노래하는 것이야 당연한 이치이니 차치하고라도 “소가 힘들어 코를 벌름거리며 침을 흘리면 농사꾼은 쟁기질을 멈추고 소를 쉬게 했다. 말 못 하는 짐승이라고 함부로 다루지 않았다. 농사꾼은 소가 쉬는 동안에 미안하다는 듯 멍에가 얹힌 소의 목을 쓰다듬어주곤 했다.(38p)”는 부분에서는 뭇 생명을 자비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따스함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정찬주 작가는 <다산의 사랑>에 남도의 사투리를 극히 사실적이고 생생하게 풀어놓았다. “다산의 소설을 쓰되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해보라”고 권유했던 법정 스님의 영향이 크다고 작가는 밝히는데, 그 찰떡같은 사투리를 보고 있자면 어디선가 구수한 메주 냄새가 풍겨오는 듯하다.

<다산의 사랑>이 조명하는 것은 인간 정약용뿐만이 아니다.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해를 품은 달처럼 그의 곁을 지킨 한 여인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다. 다산은 유배 중 본인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여인을 만나 ‘홍임’이라는 결실까지 맺는다. 독야청청하게만 보이는 다산의 그늘에서 그를 보필한 한 여인의 연정. 그를 위해 차를 끓이고 음식을 하고 빨래를 하는 헌신. 하지만 은애하는 남자의 부인이 보내온 치마폭을 보는 것이 끝내 편할 수 없는 그녀의 애끓는 마음이 지면을 통해 절절하게 묻어난다.

이는 다산 부부의 사랑의 상징으로 연구되어 온 ‘하피첩’에 대해서도 다른 견해를 내보인 것이다. 하피첩이 다산 부부의 의리와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다산이 멀리에서 한눈을 팔까 경계하는 부인이 보낸 메시지라고 보는 작가의 시각이 흥미롭다.

18년간의 유배가 끝나고 마재로 돌아간 다산은 끝내 다시 관직에 오르지도 못했고 집안을 일으키지도 못했다. 제자들은 오히려 스승을 욕보이고 다녔으며 친애하는 벗은 늙고 병들어 죽었다. 다산이 얼마나 위대한 실학자였든 그 삶은 모든 인간이 겪는 희로애락 안에서 펼쳐진 것이다. 위대한 실학자라고 해서 그 인생마저 오점 없이 완벽해야 함은 아닐 것이다. 그의 굴곡진 삶에서 우리는 우리네와 닮은 인간 정약용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다산의 사랑>은 작가 정찬주가 몇 년에 걸쳐 취재하고 공부한 끝에 내놓은 신간이다. 철저한 고증 위에 입체적인 이야기를 덧씌운 이 소설은 역사서인 동시에 한 개인의 삶을 곰곰이 들여다보는 관찰기이기도 하다.

다산은 고독한 사내였다. 다산에게 왔던 것들은 모두 다 흘러갔다. 권세가 사라졌고 제자들이 떠났다. 늘그막에 찾아온 연모의 정도 차츰 스러졌다. 일어나면 멸하는 것이 이치임을 다산도 알고 나도 알지만, 마지막 장을 넘기는 손길이 못내 아쉬운 것은, 그래, 다 늙어버린 아버지의 손을 잡는 것과 다르지 않아서이다.

기러기 끊기고 잉어 잠긴 천리 밖
해마다 오는 소식 한 봉지 차로구나.
雁斷魚沈千里外
每年消息一封茶

*소설가 정찬주는?

크게보기오랜 기간 불교적 사유가 배어 있는 명상적 산문과 소설을 발표해왔다.

동국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고, 많은 글을 발표해오다가 수십 년 산중에 집을 지어 낙향했다. 법정스님은 재가제자로 받아들여 무염(無染)이란 법명을 내렸고, 수불스님은 벽록(檗綠)이란 호를 주었다.

저서로는 장편소설 <소설 무소유> <산은 산 물은 물> <가야산 정진불><인연> 등 다수와 어른을 위한 동화 <눈부처> 등이 있다.
1996년 행원문학상, 2010년 동국문학상, 2011년 화쟁문화대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