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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타폰의 달빛15
정 찬주 2025-11-19 (수) 07:17
몬타폰의 달빛15
도나우강 강변의 태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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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정윤경 작가)
몬타폰과 크렘스 중간쯤에 있는 휴게소에서 일행은 점심을 했다. 뷔페식당이었지만 메뉴는 실망스러웠다. 정 작가와 박 여사는 빵과 야채샐러드를 가져와 아침식사에 이어 또 빵을 먹었다. 고기를 좋아하지 않으니 별로 먹을 것이 없었다. 몬타폰에서 먹었던 스파게티 봉골레는 뷔페식당에 없었다. 베르너 박사가 승용차에 휘발유를 넣는 동안 권 회장이 말했다.
“피곤하신가 봐요. 몬타폰을 떠날 때부터 줄곧 눈감고 계시더군요.”
“아닙니다. 추기경문화회관에서 강연할 내용을 머릿속으로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저희들이 대화를 계속하고 왔는데, 그래도 집중이 되었습니까?”
박 여사가 거들며 말했다.
“남편은 어떤 생각에 집중하면 주위 사람들에게는 신경을 쓰지 않지요.”
“아, 그럴 수도 있군요.”
“빌리 씨 예를 들어볼까요? 빌리 씨는 잠자는 시간까지 계속 24시간 여러 가지 소리를 듣는다고 했지요? 그렇지만 그 속에서도 자기 음악을 작업해 온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주변의 상황들이 벌어지고 있지만 자기 생각을 집중하는데 방해하지는 않아요. 어쩌면 그것은 집중이나 몰입과 차원이 다른 것 같습니다. 집중이나 몰입했을 때는 주변의 상황을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니까요.”
권 회장이 웃으며 물었다.
“빌리 선생님이 24시간 소리가 들린다고 할 때는 제 마음이 아픕니다. 얼마나 시달리시겠어요?”
“제 생각으로는 시달리시지는 않을 겁니다. 소리가 들릴 뿐 빌리 씨에게 전혀 자극을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빌리 씨가 작곡하는 데도 방해되지 않을 겁니다.”
“그럴 수 있나요?”
“집중이나 몰입보다 한 차원을 넘어선 경지입니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삼매(三昧)라고 합니다. 삼매에 들면 주변의 상황을 살피면서도 자기 일에 전념할 수 있지요. 그러니까 빌리 씨는 24시간 삼매에 든 경우입니다.”
“정 작가님도 조금 전 삼매에 드신 겁니까?”
“저는 하루 종일 삼매에 든 적은 없습니다. 다만 잠깐잠깐 삼매에 들어 작품을 쓴 적은 많습니다. 조금 전에도 권 회장님과 베르너 박사가 한 얘기를 다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제 한 생각[一念]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강연할 내용을 정리하는 한 생각 말입니다. 권 회장님과 베르너 박사가 무슨 얘기를 하셨는지 말씀드려 볼까요?”
“별로 중요한 얘기를 나눈 것은 아닙니다.”
“크렘스 집에 가기 전에 슈퍼에 들르자, 정 작가는 네 발 달린 짐승의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하니 칠면조 고기를 사자, 박 여사의 작품을 암파크 갤러리에서 정 작가가 강연할 회관으로 옮기기 전에 사비네를 먼저 만나 상의하자 등등이었습니다.”
박 여사가 정 작가의 강연 장소에서 오스트리아 여류도예가 사비네와 2인전을 갖기로 한 것은 권 회장의 아이디어였다. 사비네와 친분이 있으므로 동서양 도예작품 2인전을 기획했던 것이다. 그리고 정 작가가 강연할 장소는 어차피 하루 동안 비어 있으니 전시회를 갖는다고 해도 무리가 없었다.
마침내 승용차는 크렘스 시가지로 들어섰다. 정 작가 부부로서는 처음 본 크렘스 시가지였다. 크렘스의 첫인상은 고풍스럽고 한적했다. 오래된 벽돌 건물들 모두 묵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 한국의 천년 고도(古都) 경주 시가지 같았다. 일행은 승용차 차창으로만 크렘스 시가지를 구경하고는 바로 대형 슈퍼로 갔다. 음식 재료는 주로 섬세하고 꼼꼼한 베르너 박사가 구매했다. 베르너 박사는 정 작가에게 호감을 주려는 듯 말했다.
“작가님, 칠면조는 네 발 달린 짐승이 아닙니다.”
“고맙습니다.”
“천만에요.”
그런데 칠면조를 샀다고 한국에서 온 두 손님 모두를 만족시키는 것은 아니었다. 박 여사는 닭, 오리 등 두 발 달린 짐승의 고기를 잘 먹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 작가는 베르너 박사에게 박 여사의 식습관을 얘기하지는 않았다. 박 여사의 식습관보다 베르너 박사의 호의가 더 고맙기 때문이었다.
베르너 박사 부부의 집은 크렘스 시 변두리에 있었다. 과수원과 농장, 작은 마을을 두어 군데 지나서야 그들 부부의 단독주택이 나타났다. 맞은편은 도나우강 강둑이었다. 마을에서 떨어진 집의 위치로 보아 한적하고 조용한 기도원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정 작가 부부는 베르너 박사가 먼저 들어간 뒤 잠시 밖에서 평화로운 주변 풍광을 감상했다. 권 회장이 말했다.
“이 집은 원래 수도원 부속 건물이었어요. 베르너 박사가 친한 수도원 신부님에게 부탁하여 분양받은 집이지요.”
“첫눈에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수도원에서도 관리가 힘드니까 분양한 거지요. 저기 보이는 산 위 건물이 수도원인데 거리가 좀 있지요.”
베르너 박사가 집 안을 대충 정리했다고 권 회장에게 말했다. 그런데 정 작가 부부는 집안 정원을 바라보며 깜짝 놀랐다. 깃발 게양대에 태극기가 올라가 있었다. 아마도 태극기를 게양하려고 베르너 박사가 먼저 들어갔음이 분명했다. 정 작가는 자신이 마치 국빈 대접을 받는 것 같아 가슴이 벅차올랐다. 태극기가 강바람에 하늘하늘 펄럭거렸다.
베르너 박사 부부의 집 거실로 들어와서야 정 작가는 베르너 박사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박사님, 고맙습니다.”
“천만에요.”
“박사님께서 한국에 오신다면 저희 집에도 게양대를 만들어 오스트리아 국기를 올리겠습니다.”
정 작가의 말에 권 회장이 대답했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만약 빌리 선생님도 정 작가님 댁을 방문하실 때 오스트리아 국기를 게양해 주시면 매우 좋아하실 것 같습니다.”
“물론입니다. 외국에서 손님이 오면 그 나라의 국기를 게양할 생각입니다.”
칠면조 요리는 베르너 박사가 싱크대 앞에서 했다. 그 사이에 정 작가는 복도와 거실에 걸려 있는 베르너 박사가 그린 풍경화를 감상했다. 유화인데 인상주의 화풍이었다. 아마추어 그림이라고 보기에는 색깔의 배합과 붓의 터치가 능숙했다. 정 작가는 저녁 식사 때 칠면조 요리를 먹으면서 베르너 박사에게 말했다.
“다음에 저희 부부가 올 때는 박사님 작품을 갤러리에서 전시했으면 좋겠습니다. 꼭 개인전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취미로 그리는 그림인데 전시할 만한 수준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실은 저도 고등학교 때까지는 미술부 활동을 할 만큼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습니다. 고흐 그림을 많이 흉내 냈지요.”
“정 작가님과 또 그런 동질감이 있군요. 그러나 개인전은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식사 후 베르너 박사는 정 작가 부부를 도나우강 강둑으로 안내했다. 바로 마당과 텃밭 끝이 강둑이었다. 강둑에 올라서 보니 크렘스 변두리를 흘러가는 도나우강 폭은 그리 넓지는 않았다. 강변에 갈대밭이 형성되어 강폭이 더 좁아 보였다. 선득한 강바람이 불어와 벤치에 오래 앉아 있지는 못했다. 박 여사가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이었다.
권 회장은 정 작가 부부를 위해 2층 방을 내어주었다. 2층에도 작은 거실과 소파가 놓여 있었다. 박 여사는 욕실로 들어가 욕조에 따뜻한 온수를 받았고, 정 작가는 크렘스를 오면서 구상했던 강연 내용을 더 이어갔다. 이번에는 한국인이 평화를 사랑한다는 점과 한국인의 독자적인 정체성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한국은 역사적으로 중국과 일본의 침략을 수없이 많이 받았습니다. 중국과 일본은 지리적으로 한국을 점령해야만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중국과 일본을 단 한 번도 침략한 적이 없었습니다. 한국인들은 다른 나라를 공격하지 않고 억울하더라도 곰처럼 인내하면서 평화를 사랑할 뿐이었습니다.
제가 한국인으로서 자부심을 갖는 이유는 또 있습니다. 한국은 잦은 침략에도 어느 강대국 문화에 흡수당하거나 동화되지 않았습니다. 한국만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독자적인 문화를 만들어 왔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한국에는 한국인만 사용하는 말이 있고 아주 과학적이고 독창적인 문자인 한글이 있습니다. 중국이 한국에 외교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때는 중국 문자를 사용했고, 일본이 한국을 강제로 점령하여 지배할 때는 일본 문자를 사용했지만 오늘날의 모든 한국인들은 5백 년 전에 조선시대의 세종대왕과 신미스님이 만든 한글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모국어인 한글로 소설을 쓰는 작가로서 누구보다도 한글에 대한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런 동기로 한글창제의 비밀을 밝힌 장편소설 <천강에 비친 달>을 발간하기도 했습니다.>
정 작가는 대충 손발을 씻은 뒤 침대에 누워서도 강연 내용을 이어갔다. 박 여사는 몹시 피곤했던지 곧장 잠에 떨어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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