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타폰의 달빛8

                                  깊은 대화1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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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정윤경 작가)

 새벽 5시.

 숙소의 창문을 투과한 달빛으로 방안은 환했다. 방안 침대 위까지 달빛이 일렁였다. 흰 침대 커버가 눈이 부실 정도였다. 정 작가는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창가로 다가갔다. 어젯밤에 너무 피곤했으므로 커튼을 치지 않고 그대로 자버렸던 것이다. 정 작가는 박 여사를 위해 커튼을 치려다가 그만두었다. 30분쯤 지나면 날은 곧 밝아올 터였다. 새벽잠이 없는 정 작가와 달리 박 여사는 아직도 큰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달은 창문 밖 왼쪽 허공에 떠 있었다. 노란 망고 같은 달은 해발 2천 미터가 넘는 산봉우리 위에서 곧 굴러 내릴 것처럼 보였다. 캄캄한 몬타폰 계곡의 주인인 듯 오직 홀로 고고하게 빛나는 존재는 달 뿐이었다. 

 정 작가는 문득 몬타폰 계곡의 주인이 있다면 빌리 씨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달빛이 세상을 구석구석 비추듯 몬타폰에서 영감 받아 작곡한 빌리 씨의 음악이 유럽과 미국, 아시아에서 연주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순간 몬타폰의 달을 보고 있는 사람은 정 작가 혼자일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몬타폰의 달이라고 할지라도 지금 보고 느끼는 자의 것일 수도 있었다. 저 달과 마주하고 있지 않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달빛으로 다가온 달의 전언(傳言)은 정 작가처럼 받아들이는 자의 몫일 터였다. 박 여사가 눈이 부신 듯 말했다.

 “여보 몇 신데 벌써 일어났어요?”

 “몬타폰에서 달을 보다니 선물 같아요. 당신도 달을 좀 보구려.”

 박 여사가 긴 가운을 걸친 채 창가로 왔다.

 “산이 높아서 그런지 달이 작게 보이지요?”

 “달을 보다니 신기하지만 나는 더 자겠어요.”

 “여보, 저 달이 빌리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빌리 씨요?”

 “조금 전에 빌리 씨가 몬타폰을 환히 빛낼 달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박 여사는 잠을 더 보충하겠다며 침대 위로 다시 올라가 담요를 어깨까지 올렸다. 어느새 달은 고산 너머로 저버렸다. 대신 고산 너머 쪽에서 먼동이 터오고 있었다. 그러자 몬타폰 계곡의 어두운 산자락과 분지에서 밤새 꺼졌던 마을의 불빛들이 되살아났다. 마치 거대한 숯덩이에 붙어있던 불티가 하나, 둘 되살아나 번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지상의 불빛들은 밀려오는 날빛 때문에 곧 새벽노을과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그래도 노을의 기운은 쉽게 없어지지는 않았다. 광대무변한 몬타폰의 허공과 산자락에는 붉은 기운이 한동안 떠돌았다.  

 정 작가는 빌리 씨를 만나면 무슨 대화를 먼저 나눌지 잠시 궁리했다. 그러자 가장 궁금한 것은 그가 무슨 인연으로 작곡가가 됐는지, 그의 음악이 시작된다는 절대고요가 무엇인지 등등을 알고 싶었다. 두 가지의 질문만으로도 빌리란 음악가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첫 번째 질문은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 없는 빌리의 운명 같은 것이고, 두 번째 질문은 작곡자로서 빌리의 사상이나 정신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을 듯했기 때문이었다. 절에 가면 두 개의 기둥으로 된 일주문을 들어가야만 절의 핵심인 법당을 만날 수 있듯, 두 가지의 질문은 빌리에게는 일주문 같은 것이 아닐까 하고 정 작가는 생각했다. 

 정 작가 부부는 민박집에서 아침식사를 마치고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빌리 씨 집으로 내려갔다. 어제 헤어지면서 오전 9시에 만나기로 했던 것이다. 박 여사가 투덜거렸다.

 “여기서는 한국인 티를 내지 말아요.”

 늘 약속시간 먼저 서두르는 정 작가를 두고 한 말이었다. ‘빨리빨리’를 좋아하는 대다수 한국인의 특성이기도 했다. 정 작가뿐만 아니라 그의 지인들 가운데는 ‘10분 전’이란 별명을 가진 사람이 많았다. 약속시간보다 항상 10분 전에 나타났던 것이다. 약속시간보다 30분 전에 나타나는 사람도 있어 외출복을 서둘러 갈아입어야 할 때도 있지만 정 작가는 그런 사람을 더 신뢰했다.

 권 회장도 한국인임을 증명했다. 약속시간보다 30여 분 빨리 빌리 씨 집 앞에 서 있었다. 권 회장이 말했다.

 “숙소는 편안했습니까?”

 “네, 전혀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아주머니께서 아침식사로 내주신 빵과 커피 맛도 아주 좋았구요.”

 “평생을 몬타폰에서만 산 사람답게 아주 순수하시더군요. 오스트리아에서 몬타폰은 시골 중에서도 시골이거든요.”

 권 회장이 박 여사에게도 말했다.

 “정 작가님이 빌리 선생님과 얘기를 나누는 동안 남편이 몬타폰을 구경시켜 주겠다고 합니다.”

 “고맙습니다. 베르너 박사님께 미안하지 않을까요?”

 “남편이 먼저 제의한 일이니 괜찮습니다.”

 9시가 되자 빌리 씨가 2층 계단에서 내려와 정 작가를 맞이했다. 권 회장은 통역해야 하므로 남고, 박 여사는 베르너 박사의 승용차를 타고 떠났다. 정 작가와 빌리 씨는 2층 거실로 올라갔다. 거실로 가는 복도에는 조그만 피아노가 한 대 놓였고, 맞은편 벽에는 난초 그림이 한 점 걸려 있었다. 화제는 난초 향기가 만 리를 간다는 난향만리(蘭香萬里)였다. 꾸밈이 없는 단순한 액자 형태로 보아 한국에서 가져온 것이 분명했다. 거실에는 대형 모니터와 스피커가 창문 밑에 자리 잡고 있었다. ㄴ자 소파 앞에는 둥근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테이블 가운데의 투명한 유리주전자에는 노란 레몬 조각들이 물에 떠 있었다. 모두가 입가심으로 레몬차를 한 잔씩 마셨다. 이윽고 권 회장이 빌리 씨의 말을 능숙하게 통역했다.

 “힘든 길을 와주셔서 너무 기쁘고 감사합니다. 어느 날 소냐(권 회장의 오스트리아 이름)를 통해서 작가님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 순간부터 저는 작가님께서 몬타폰에 오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여곡절이 있겠지만 빌리 선생을 한 번은 만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기회가 온다면 긴 대화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그런 기대가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세상에는 눈에 보이는 세계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만 생각하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대화가 다소 엉뚱하게 들릴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인정하는 사람들은 우리의 대화가 매우 흥미로울 것입니다. 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와 눈에 보이는 세계의 경계에 있는 것이 음악이라고 생각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음악이기 때문입니다.”

 “빌리 선생께서는 제가 몬타폰에 올 것을 확신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저와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 반드시 만날 수밖에 없는 인연, 즉 필연이라는 말씀이군요.”

 “사람들 가운데는 제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의 얘기를 하면 믿지 않는 분도 있습니다. 심지어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보는 지식인도 있습니다. 나는 그런 지식인과 오래 사귈 수 없습니다. 서로 간에 신뢰가 깨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한국에는 인연의 화살이란 캄캄한 밤에도 과녁을 맞힌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인연이란 필연이라는 말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우연이라고 생각할 뿐이지요. 그런 뜻에서 저는 빌리 선생의 말씀을 이해했습니다.”   

 대화의 내용이 알 듯 모를 듯 깊어지자 권 회장이 통역하다가 난처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한국에서 멀리 여기까지 오셨으니까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솔직하게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오늘은 두 가지만 질문하겠습니다. 하나는 제가 고등학교 시절 카뮈나 사르트르 소설을 즐겨 읽고 또 실존주의 사상에 빠진 것이 작가가 된 계기였습니다. 빌리 선생의 음악인생은 어느 때, 어떤 사건에서 운명적으로 비롯된 것입니까?”

 빌리 씨는 기억을 꺼내기가 고통스러운 듯 눈을 감았다. 정 작가가 공연한 질문을 했나 싶어 미안할 정도였다. 이윽고 빌리 씨가 눈을 뜨고서 잠깐 동안의 침묵을 깼다. 여성처럼 곱상한 턱과 입술이 동시에 움직였다. 그의 큰 눈은 눈물이 어린 듯했다.

 “15살 때부터 저는 불치의 병을 앓았지요. 두 달씩 인스부르크에 있는 병원과 몬타폰의 집을 오가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17살 때는 병실에서 죽음을 기다렸지요. 6인 병실에 함께 있던 환자들이 한 사람씩 밖으로 나가면 돌아오지 않았어요.”

 그 무렵 빌리는 병상에서 일어나 절망적인 심정으로 병원 멀리 흐르는 인강(Inn River) 강둑길을 걷기 시작했다. 앞으로 더 살아야 할지, 어느 순간 강물 속으로 뛰어들지 가늠할 수 없는 심정으로 하루의 반을 걸었다. 이윽고 빌리는 더 걸어가기도, 되돌아가기도 힘든 지점에 이르렀다.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먼 강둑길에 와 있었다. 그때 거대한 먹구름이 하늘을 덮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