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스물 넷 나이만큼의 세월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더 살아온 시인의 글을 읽고, 첫마디를 무어라 써야할지 갈피조차 잡히지 않는다. 하여 일단, 가장 먼저 떠오른 몇 개의 단어들을 나열해본다.

눈물… 그리움… 연민… 그리고 관조.

시인은 월아천에서, 실크로드에서, 알바이신, 인레 호수, 사쿠라지마, 앙코르와트까지. 숱한 장소를 떠돌며 운다. 나는 당황한다. 세월이, 뭇 지나간 시간이 통탄스러워서 시인은 이토록 울음 짓는 것일까. 시집의 제목 ‘달항아리’에 담긴 것은 과연 시인이 흘린 눈물일까.

한 장(章)을 넘어가니 이제 시인은 그리워하나 가까워지지 않는 것들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다. 말하자면 바다가 그리워 꽃망울을 터뜨린다는 동백꽃은 차라리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다. 붉디붉은 그리움을 토해내는 것이다. 꽃과 바다와, 바람, 낙조(落照)같은 대상들…. 움직이되 변함없고 변함없되 일었다가 스러지는 것들을 노래하는 시인의 어조에서 나는 갈증마저 느낀다. 어조는 담백한데, 담담하고 정갈한 그 말투에서 오히려 ‘놓음’을 목격한 것이다. 갈증 하는 것들을 놓아버리는 역설에 마음 한 켠이 싸르르, 아려온다.

시인은 당신 눈에 비치는 모든 대상에 당신의 모습을 투영하고, 나는 당신이 투영된 시(詩)에 나를 투영시킨다. 시인은 대상을 타자화시키는 듯 하면서도 어느 샌가 혼연해버린다. 신기하다. 시인을 따라가며 밤새가 되었다가 꽃잔디도 되었다가, 달항아리가 되어버린 것이다. 조곤조곤한 시어들은 어느새, 숨 가쁘게 살아가는 우리네를 연민한다. 하얀 달‘빛’ 말고는 어느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은 항아리에 마음을 대신 채운다는 시인은, 얼굴도 모르는 불특정 다수의 승객들에게 그 따스한 한 줌 빛을 선사한다.

크게보기
시인 김성부

마지막 장에 이르러 비로소 나는 무릎을 탁, 친다. 눈물, 그리움, 연민, 관조. 두서없이 나열했던 그 단어들이 한 군데로 귀결한다. 공(空). 비어있으면서 온전히 들어찬. 당신의 세계관은 자비와 연민에 뿌리내린 것이었다. 달항아리의 마음이 그렇듯 시인은 지나온 자신의 삶을, 또 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네를 불보살의 미소로 위로하는 것이다.

파란 하늘가에 흐르는 구름 조용히 모셔
하얀 마음 곱게 들려 불전에 공양 올린다
대웅전 처마 끝 아련한 풍경 소리
풍진 모두 안고 찔레꽃잎으로 진다
-풍경소리 꽃잎되어 中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가, 글을 쓰는 모습을 상상한다. 마디마디가 굵고 단단한 손가락으로 때로는 콧잔등에 미끄러진 안경을 추켜올릴 것이다. 할아버지는, 삶의 한가운데서 슬며시 물러나 늘그막의 세상을 찬찬히 바라본다. 부딪치고 깨지고 또 깨뜨리던 젊은 날보다 이제는 훨씬 더 세상을 아름답게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름다운 것이 더 많아지는 나이 듦이라니, 그것이 미학이 아니고 무엇일까. 아름다운 사람만이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 세상을 이토록 아름답게 그려낼 수 있는 아름다운 시인이 같은 하늘아래에 있다는 것은 또 얼마나 큰 축복인가.

시인은 세상살이 분주함에 달이 뜨는 것도 모르고 지내온 젊은이의 손등을 가만히 움켜쥔다. 울컥, 울고 싶은 기분이 된다. 고목 같은 할아버지 품에 안겨 엉엉, 눈물을 쏟아내고 싶은 기분이 된다. 그러면 할아버지, 산사(山寺)의 바람결 같은 호젓함으로, 고즈넉한 청량함으로 ‘울지 마라, 아가’할 것 같다.

크게보기

나는 더 이상 시인의 시집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것을 포기한다. 시인이 세상을 보듬고, 또 보듬어지면서 자연이나 감정, 순리 따위와 합일되는 절절한 그림을, 그저 막연하게 그려볼 뿐이다.

*시인 김성부는?

1942년 경남 거제에서 태어나 동아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1965년 해병대 소위로 임관되어 월남전에 파병됐다. 생사를 넘나드는 이국 전장에서 심신이 피폐되어가는 소대원들의 정신적 안정을 위해 시와 수필을 쓰기 시작했다. 2005년 계간 <불교문예>와 <한국문인>에 시로 등단했다. 35여 년의 금융계 생활 후 지금은 안국선원 흥법운영담당 부회장으로 선 수행과 홍포에 진력하면서도 열심히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시집으로 <이별연습 그리고 기다림>이 있으며 제 12회 탐미문학상과 2007년도 소월문학상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