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타폰의 달빛4

                                  “천만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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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정윤경)

 비행기가 고도 8천 미터 안팎을 유지하자, 박 여사는 평소 기분을 되찾은 듯 기내식을 다 비우고 커피도 한 잔 했다. 정 작가는 커피 대신 오렌지 주스를 선택해서 마셨다. 박 여사가 창 밖을 응시하며 미소를 지었다. 비행기는 인천공항을 이륙한 지 몇 시간 동안 흰 구름 위를 날고 있었다. 고요한 대류권과 성층권 사이에서 안전하게 날아가고 있는 듯했다. 기류의 급격한 변화가 단 한 번도 없었으므로 비행기에 탑승해 있다는 것을 못 느낄 정도였다. 정 작가가 말했다.

 “당신이 뭘 생각하고 있는지 맞춰 볼까요?”

 “갤러리 암 파크에서 본 젊은 부부를 생각하고 있었어요.”

 정 작가는 그 젊은 부부를 바로 떠올렸다.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사는 한 젊은 부부가 도예전 오픈 시간부터 리셉션 이후까지 발길을 떼지 못한 채 작품 감상에 몰두해 눈길을 끌었는데, 그 부부가 “저희는 가난해서 도자기를 살 여유가 없습니다, 혹시 카탈로그만 판매할 수 없습니까?”라고 말해서 박 여사가 카탈로그를 무료로 사인해 주었던 것이다.

 박 여사는 전기 물레를 사용하지 않고 손의 감각만으로 작품을 만들어 소나무 장작만 태우는 전통가마에서 도자기를 구우며 작품 활동에 매진해 온 도예가였다. 특히 박 여사의 항아리 도자기들은 백자 유약을 작품 속에만 바르고, 겉은 가마의 장작불로 발색한 황토 빛깔을 선보여 주목받아왔으며, 항아리 입을 두 겹의 꽃잎이나 연잎으로 표현하는 등 한국의 백자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창조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러한 박 여사의 도예작품 카탈로그를 권 회장의 소개로 받아본 갤러리 암 파크 루이제 브이스만(Luise Buisman) 관장이 국제 도자기 교류전을 기획하면서 박 여사의 초대전이 성사되었던 것이다. 

 루이제 갤러리 관장은 리셉션 때 정 작가 부부를 놀라게 했다. 큐레이터이자 디자이너 출신인 루이제 브이스만 관장이 30여 년 전 한국방문 기념으로 사 온 한복을 리셉션 파티에 입고 나와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켰기 때문이었다. 저고리 옷고름을 나비넥타이처럼 매고 나와 박 여사가 한국식으로 고쳐주는 촌극도 있었지만, 이국적인 색동저고리는 ‘오스트리아 한국 친선협회’ 회장과 IMK 회장, 오스트리아의 저명한 도예가들과 미술평론가, 신문사 기자 등 관람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그때 제가 관장의 저고리 옷고름을 고쳐주었던 것이 생각나요.”

 “아마도 한국에서 온 저를 환영한다는 뜻으로 저고리를 꺼내 입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고마운 분이죠.”

 “아, 그러고 보니 또 한 분이 생각나요. 당신이 강연했던 추기경문화회관에서 오스트리아 여류도예가 사비네와 2인전을 열 때였어요. 귀족이라는 중년 여성 분 말이에요.”

 “갤러리 암 파크에서 당신 도자기를 샀던 분인데 모를 리가 없지요.”

 정 작가는 그 귀족 여성을 또렷하게 기억했다. 그녀의 말투까지 생각해 냈다. 추기경문화회관에서 오스트리아 여류도예가인 사비네와 2인전을 가졌던 것은 앙코르(Encore) 전시회 성격이었다. 그런데 그 귀족 여성이 그곳까지 찾아와 “도자기가 너무 영적이어서 집안에 놓을 자리를 아직도 찾지 못했다”고 말했던바, 도자기를 아끼는 그녀의 마음이 사춘기 소녀처럼 순수했기 때문이었다. 

 “사비네 작품 중에 둥근 공에 달라이라마 말씀이 새겨진 것도 특이했어요. 가톨릭 국가지만 달라이라마를 존경하는 분위기가 있는 것 같아요.”  

 박 여사의 기계를 사용하지 않은 100% 수제 도예작품들을 귀족 여성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 현지의 미술평론가들이 “작품들이 영적이다, 영혼이 느껴진다”는 말을 반복하며 평가하는 것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가톨릭 국가인 오스트리아에서 그들이 말하는 ‘영적’이라는 표현은 자연의 영성과 신성을 의미하는 뜻으로 정 작가 부부는 이해했다.

 박 여사는 식곤증 때문인지 눈을 감았다. 정 작가는 “아!” 하고 마음속으로 소리쳤다. 잊을 수 없는 또 한 사람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권 회장의 남편이자 의사인 베르너 의학박사였다. 갤러리 암 파크에서 도예전을 오픈하기 전에 미리 와서 정 작가 부부와 12점의 도예작품들을 ‘환희, 추억, 마음, 축복’이란 이름으로 디스플레이하는데, 뛰어난 미적 안목으로 도와주었던 것이다. 지금은 베르너 박사를 다시 만날 수 없는 것이 아쉽기만 했다. 신장이식 수술 후 몇 년 동안 유쾌하게 살다가 눈을 감았으므로 베르너 박사가 더 그리웠다. 더구나 그는 전문화가 못지않게 잘 그린 그림을 그의 집 거실에 걸어두었는데, 한때 화가 지망생이었던 정 작가에게 동호인 같은 친밀감을 들게 했음이었다. 

 정 작가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정 작가는 나훈아 노래를 좋아한다는 베르너 박사에게 배훈아라고 별명을 지어주고는 ‘배 박사’라고 불렀던 것이 생각나서였다. 그러면 베르너 박사는 아내인 권 회장에게 배운 한국말로 대답했다.

 “천만에요.”

 “너무 환대해 주시니 고마울 뿐입니다.”

 “천만에요.”

 “우리 부부가 다음에 오스트리아 올 때는 전시회를 가져 보세요. 아마도 인상주의 화풍의 그림들이 호평받을 겁니다.”

 “천만에요.”

 “하하하.” 

 정 작가는 외국인이 ‘천만에요’를 베르너 박사처럼 능청맞게 구사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한 번은 베르너 박사가 정 작가 부부의 식성을 알고는 슈퍼마켓에서 쇼핑을 한 일이 있었다. 정 작가는 소, 돼지 등 네발 달린 짐승 고기를 먹지 않고, 박 여사는 닭, 오리 등 두 발의 짐승 고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자 칠면조 고기를 사 와 요리하면서 농담을 했다.

 “네발 달린 짐승 고기가 아닙니다.”

 “칠면조 고기를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지만 맛있을 것 같습니다. 요리까지 손수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그런데 베르너 박사가 정 작가를 감탄케 한 것은 그의 손목에 시계가 없다는 점이었다. 베르너 박사 집에서나 외출했을 때나 한 번도 그의 손목에서 시계를 보지 못했던 것이다. 정 작가는 호기심 때문에 참지 못하고 그에게 물었다.

 “배 박사님, 손목시계를 원래 차지 않으십니까?”

 “습관입니다. 공공의사로 생활하다 보니 시계가 필요 없어졌습니다.”

 “의사이니까 시계가 더 필요할 것 같은데요.”

 정 작가는 40대 중반부터 서울의 H종합병원에서 1년에 두 번씩 정기적으로 건강검진을 받고 있는데, 담당의사에게 5분 이상을 진료받아 본 적이 없었으므로 시계를 차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한국 의사가 저에게 5분쯤 진료하는 것은 많이 배려해 준 것입니다. 제가 소설가인 줄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환자들이 많은 유명 종합병원이기 때문인지 보통 사람은 3분 정도 진료하더군요.”

 “처음에는 저도 시계를 찼습니다. 그러나 환자에게 시간을 정해놓고 진료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시계를 차지 않았는데 공공의사를 퇴직한 이후에도 시계를 차면 손목이 불편합니다.”

 그때 정 작가는 베르너 박사야말로 “보살이시구나!” 하고 탄복했다. 물론 베르너 박사가 불교의 ‘보살’이란 단어를 들어본 적이 없었을 것이고, ‘중생이 아프니 나도 아프다’라는 유마거사의 말을 들어봤을 리 만무했지만 정 작가는 베르너 박사야말로 보살이라고 생각했다. 그러했던 그가 유명을 달리했다니 그의 묘소를 찾아가 늦었지만, 그의 명복을 빌고 싶었다. 

 2015년 9월 15일 갤러리 암 파크에서 박 여사의 초대도예전을 개막한 다음 날이었다. 그는 크렘스 시 도나우강 강변에 있는 그의 자택을 잠시 들른 후 헤르베르트 빌리 씨 작업실이 있는 몬타폰 계곡의 상트 안톤마을까지 장장 8시간 동안 승용차를 운전해 주었는데, 정 작가 부부는 그에게서 받은 고마움을 두고두고 잊지 못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