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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택동 주석의 사진과 영은사 이야기

미디어붓다 | mediabuddha@hanmail.net | 2025-03-21 (금)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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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혁명의 광풍으로 홍위병들은 소총과 곡괭이를 들고 법당을 불사르고 불상을 닥치는 대로 파괴했다. 그들은 항주 영은사 법당에 들어와서 주춤하였다. 모택동 주석의 사진이 불상마다 붙어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주은래 총리가 중요한 국가유적 목록을 만들어 홍위병의 파괴를 예방하였던 것이다. 항주 영은사에 홍위병들이 몰려간다는 소식을 들은 주은래는 영은사 주지에게 모택동주석의 사진을 한 다발 보냈다. 경내의 모든 불상과 전각에 모주석의 사진을 붙여 주요 문화유산을 보호할 것을 지시하였다.

불자들은 개인의 안전과 가내평안을 빌면서 호신불을 모신다. 항주 영은사의 전각과 불상들은 모택동 주석의 가피로 파괴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절은 인도에서 온 혜리 스님이 신선의 영이 깃든 성소라는 뜻으로 영은사라 하였다. 중국불교 최초사찰 백마사 다음으로 창건되었다.

영은사 입구 석벽에는 "지척서천"이란 문구가 세겨져있다. 부처님 계신 서천이 가까이 있다는 뜻인데 이곳이 바로 불국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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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은 남송의 2대 황제이며 성군으로 칭송받는 분이다.

그가 재위 8년에 영은사를 찾았다. 영은사에는 방장으로 혜원 스님이 계셨다. 효종은 경내를 참배하고 방장실에서 차대접을 받으며 물었다.


효종.‥비래봉이 이곳으로 날아온 지 오래인데 왜 다시 날아가지 않는 것입니까?

혜원.‥움직이는 것은 모두 안정을 찾기 위함인데 이미 안정을 얻은 비래봉은 이제 떠나지 않습니다.

효종.‥사람들은 염주를 돌리며 관세음보살에게 보살펴 줄 것을 기원하고 있습니다.

관세음보살도 염주를 들고 있는데 그는 누구에게 기원하고 있는 것입니까?

혜원.‥다른 이에게서 찾으려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서 찾으려는 것만 못합니다.

효종.‥석가모니는 입산해서 6년 만에 성불했다고 하는데 무슨 비결이라도 있는 것입니까?

혜원.‥폐하, 자신이 황제라는 것을 잊어야만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효종은. 즉각적인 혜원의 답변에 감동하였다. 그리고 시 한 편을 읊었다.


매화의 향기는 멀리까지 이르며

가지마다 봄기운을 지니는구나.


그때 효종의 나이 45세였다.


혜원 스님과 나눈 선담을 통해서 효종의 불교 이해와 통찰력을 엿볼 수 있다. 혜원 스님의 지혜로운 답변을 통해 송나라 스님들의 수행자로서의 자질과 품격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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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은사는 1년에 3백만 명이 참배하는 유명사찰이다. 영은사는 동진시대에 창건되고 오월시대에 가장 번창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의 가람 규모는 9개의 누각, 18개의 각. 72개의 전에 모두 1200여 개의 방이 있었고 3000명 이상 승려들이 살았다. 청나라 가경제 때 큰 화재로 잿더미로 변했다가 도광제 때 재건을 시작하여 지금과 같은 가람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사진은 대가람 영은사 전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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