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찬주
2025-03-05 (수) 08:20나를 깨우친 부처님 말씀5
정찬주(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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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 정윤경 작가)
자유를 얻으려면 집착을 끊어야
진실로 자유를 찾으므로 행복을 경험하리라
행복으로부터 즐거움이 생기며
마음이 즐거우면 몸은 편안해지고
몸이 편안해지면 기쁨을 느낀다
기쁨을 느낌으로 너의 마음은 쉽게 집중할 수 있으며
집중함으로써 너는 사물의 실체를 바라보게 된다
사물의 실체를 바라봄으로써 집착을 끊게 된다
집착을 끊음으로써 너는 자유를 얻으리라.
-장아함경
사족; 나는 이 부처님 말씀을 거꾸로 두런두런 읽곤 한다. 그러면 부처님 말씀이 더 실감 나게 다가온다. 자유를 얻으려면 집착을 끊어야 한다. 집착을 끊으려면 사물의 실체를 바라보아야 한다. 사물의 실체를 보려면 집중해야 한다. 집중하려면 하는 일이 기뻐야 한다. 기쁨을 느끼려면 몸이 편안해야 한다. 몸이 편안해지려면 마음이 즐거워야 한다. 마음이 즐거우려면 행복해야 한다. 행복을 경험하려면 진실로 자유를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은가!
* * *
누가 깨어 있는 사람인가?
현상계라고 하는 것은
별이나, 눈앞의 그림자나, 등불이나, 혹은 환상이나,
이슬이나, 물거품이거나, 꿈이나, 번개나, 구름과 같이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이 좋다.
-금강경
바라문 셀라가 물었다.
“제가 무엇으로 당신이
깨달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
부처님이 대답했다.
“나는 내가 알아야 할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수행해야 할 것을 수행해 왔고,
버려야 할 것을 버려왔다.
바라문이여, 이런 방법으로 나는 깨어 있다.”
-숫따니빠다
사족; 선가에서는 깨닫기 위해 화두를 들고 참선한다. 금생에 깨치지 못하면 내생에서 깨치겠다고 원을 세우고 참선한다. 그러나 얼마나 요원한 일인가! 그러나 부처님이 바라문 셀라에게 알려주시는 비법은 얼마나 단순 명쾌한가! ‘알야 할 것을 알고, 수행해야 할 것을 수행하고, 버려야 할 것을 버리는 것’이 성불의 길이라는 것이다. 이 같은 부처님의 세 마디 말씀을 깊이깊이 새기지 않을 수 없다.
* * *
모든 존재들이 빛나고 있다
스스로 수행을 행해야 한다
부처님은 오직 방법을 가르쳐줄 뿐이다.
-법구경
깨달은 순간 부처님은 소리쳤다.
“놀랍고 놀랍도다!
살아 있는 모든 존재들이
진실로 깨달아 있고
지혜와 덕으로 빛나고 있구나.
그들의 마음이 미혹하고 자아에 얽매여
안으로 향해 있기에
놀라운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화엄경
진리를 본다는 것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진리를 본다는 것은
눈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고
지식이 생기고 자연에 대한
관찰력이 생기고 빛이 생기는 것이다.
-잡아함경
사족; 부처님 말씀을 대할 때마다 나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내가 나를 단속해야 하는 이유이다.
내가 안다는 것을 압축기에 넣고 가동시킨다면 그 분량은 얼마나 될까? 부처님의 팔만사천 법문에 비한다면 부끄러울 정도로 미미할 터. 분명한 사실은 내가 안다고 하는 것에 내가 갇혀 있다는 사실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더 많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세상을 다 아는 것처럼 경거망동하지는 않았는지 지금 이 순간 오싹해진다. 더욱더 침묵하고 겸손해져야 할 것 같다.
김영랑 생가를 다녀왔다. 생가 뜰에 모란꽃은 물론 씨방 속에 든 꽃씨까지 다 사라지고 없는데도 모란꽃의 환(幻)은 그림자처럼 어른댔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둘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나는 영량의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두런두런 읽을 때마다 어느 한순간에 영랑의 마음으로 들어가곤 한다. 모란을 바라보며 시상에 잠긴 영랑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모란과 영랑은 어떤 교감을 나누고 있었을까.
지는 모란꽃을 보고 이처럼 슬퍼했던 시인이 이 세상에 또 있었을까. 기어코 다시 모란꽃이 피기를 기다리며 그리워한 시인이 있었을까. 영랑은 모란꽃을 자신의 가슴으로 생각하지 않았을까. 영랑은 모란꽃을 자신의 심장으로 생각하고 이 시를 짓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영랑과 모란꽃은 불이(不二), 둘이 아니니라. 나도 영감이 솟구친다. 섭섭해 우는 영랑의 슬픔은 자(慈)이고, 그래도 찬란한 봄을 기다리겠다는 마음은 비(悲)가 아닐까? 자(慈)는 측은지심이고, 비(悲)는 ‘아니다[非]라고 하는 마음[心]’이니까.
영랑의 시심을 동체대비심(同體大悲心)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것 같다. 모란이 앓으니 영랑도 앓았던 것이다. 사춘기 학창 시절에 국어 교과서에서 보았던가? 참으로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내 나이 칠십이 넘어서야 영랑의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이 우리 곁에 있었던 금쪽같았던 불교시(佛敎詩)라는 사실을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