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학종
2025-01-24 (금) 05:36무릇 최상의 봄,
위없는 들음을 얻고
위없는 얻음을 성취한 자들은
위없는 배움을 즐기고
최상의 섬김으로 섬기고
멀리 여읨과 관계되고
불사로 이끌고 안온한
위없는 새김을 닦는다.
방일하지 않음을 기뻐하고
현명하고 계행을 수호하는
그들은 올바른 때에
괴로움이 소멸되는 곳을 알리.
- 전재성 님 옮김
크게보기
(ⓒ장명확)
“위아래 위아래 위 위 아래 위 위아래~”
몇 해 전, 귀가 따가울 정도로 자주 들었던 노래의 가사 일부이다. 단지 몇 번 들었을 뿐인데도 자꾸 흥얼거리게 만드는 중독성이 컸던 노래였다. 그래서인지 꽤 시간이 흘렀는데도 나도 모르게 ‘위 아래 위 아래’를 흥얼거리곤 한다. 단순한 노랫말과 흥겨운 춤이 중독성을 더 부추겼을 것이다.
그런데, 위아래가 평상시 자주 사용되는 말이라는 점도 중독성 강화에 한몫을 했을 것이다. “너는 위아래도 모르냐?”, “위아래가 없다.”, “찬물도 위아래가 있다.”는 말은 일상에서 자주 접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위아래는 유명 걸그룹 이엑스아이디(EXID)의 노래 ‘Up & Down’의 가사 한 부분이다. 업앤다운은 위아래를 영어로 옮긴 표현.
위와 아래는 윗사람과 아랫사람에는 순서가 있다거나,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지켜야 할 예의가 있다는 뜻으로 자주 쓰인다. 이 말에 윗사람에 대한 예의와 태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우리 문화가 반영되어 있다. 따라서 위아래에서 핵심어는 아무래도 아래보다는 위라고 할 수 있다. 아무려나, 위아래는 외국어로 옮기기가 까다로운 말 가운데 하나였던 것 같다. 고작 업앤다운이라는 말로 영역되었으니 말이다.
위가 없다는 것은 가장 높고 귀하고 값지고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고 깨달음의 경지를 의미하는 정등정각(正等正覺) 앞에 자리한 무상(無上)은 ‘위없는’으로 번역된다. 불가에서 자주 접하는 무상대도(無上大道)라든지, 무상락(無上樂) 등은 비교할 수 없는 것이 없는 최고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처럼 절집에서 자주 듣는 말이 ‘위없는’이라는 말이다. ‘위없는’은 어떤 명사의 앞에 자리해 ‘그 위를 넘는 것이 없을 만큼 가장 높고 좋은’이라는 의미이다. 동아시아불교 권 불자들에게 가장 친숙한 경전인 반야심경에서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즉 지혜의 주문, 최고의 주문, 비교될 것이 없는 주문이라는 구절은 사실상 동의어들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동의어를 반복하는 것은 반야바라밀다의 의미와 가치를 강조하기 위해서다. 따라서 이런 주문 앞의 형용어들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다름 아닌 ‘위없는’이라고 할 수 있다.
‘위없는’이라는 용어의 중요성은 <앙굿따라니까야>에 ‘위없는 것의 경(Anuttariyasutta)’이라는 별도의 경이 있을 정도로 크다. 이번에 소개하는 시(詩)는 바로 이 ‘위없는 것의 경’에 등장한다.
부처님은 이 시에서 ‘위없는 것’으로 모두 여섯 가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신다. 위없는 봄, 위없는 들음, 위없는 얻음, 위없는 배움, 위없는 새김이 그것이다. 부처님께서는 그냥 ‘위없는 것’라고 했을 때 범부중생이 느끼게 될 막연함을 대자비심으로 해소시켜 주신 것이다.
그렇다면 ‘위없는 봄·들음·얻음·배움·섬김·새김’은 어떠한 것인가? ‘위없는 것의 경’에 따르면, 세상에 어떤 자든지 가서 코끼리의 보물도 보고, 가서 말의 보물도 보고, 가서 보석의 보물도 보고, 가서 여러 가지의 대상도 보고, 잘못된 견해를 지니거나 잘못된 실천을 하는 수행자나 성직자를 보고 듣고 얻고, 배우고 섬기고 새기는 것, 즉 저열하고 저속하고 세속적이고 고귀하지 못하고 무익한 것으로 싫어하여 떠남을 위한 것이 아니고, 사라짐을 위한 것이 아니고, 소멸을 위한 것이 아니고, 적멸을 위한 것도 아니고, 곧바로 알기 위한 것도 아니고, 올바로 깨닫기 위한 것도 아니고, 열반으로 이끄는 것도 아닌, 봄·들음·얻음·배움·섬김·새김이 아닌 봄·들음·얻음·배움·섬김·새김이다. 그러므로 위없는 봄·들음·얻음·배움·섬김·새김은 믿음이 확립되고 사랑이 확립되고, 궁극적으로 헌신하고, 청정한 기쁨을 누리는 여래나 여래의 제자를 가서 보는 것, 즉 중생을 청정하게 하고 슬픔과 비탄을 뛰어넘어 고통과 불만을 사라지게 하고 바른 길을 얻게 하고 열반을 실현시키는 봄·들음·얻음·배움·섬김·새김을 말한다.
- 시구 ‘방일하지 않음을 기뻐하고’는 찰나 찰나에 사띠를 놓치지 않는 것을 기뻐한다는 뜻으로 늘 성성하게 깨어있는 삶을 의미한다.
- 시구 ‘현명하고’는 통찰의 지혜를 말한다.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 반야의 지혜, 즉 통찰의 지혜를 증득하는 경지를 말한다.
- 시구 ‘계행을 수호하는’은 일체의 오염원을 벗어나 바르고 건전한 몸과 마음을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 시구 ‘괴로움이 소멸되는 곳’은 일체의 번뇌가 소멸된 경지, 즉 열반의 경지를 의미한다.
- 시어 ‘알리’는 열반의 경지를 알았다는 것, 즉 열반을 성취하여 쓰라리고 기나긴 윤회의 굴레에서 완전하게 해탈한 궁극의 목적지에 도달했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