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학종
2024-10-11 (금) 06:15생명을 죽이지 말고,
주지 않는 것을 빼앗지 말고
거짓말을 하지 말고,
취기 있는 것을 마시지 말고
순결하지 못한 것을 삼가고
성적 교섭을 금하라.
그리고 밤의 때 아닌 때에
식사하지 말라.
화환과 향수를
사용하는 것을 피하고
낮은 침대, 바닥에 누워야 하리.
괴로움을 종식시킨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
이것이 포살일에
지켜야 하는 계행이다.
해와 달이
모두 밝게 비추고
그 궤도를 따라 멀리 비춘다.
어둠을 몰아내고
허공을 달리며
모든 방향으로 비추며
하늘에서 빛난다.
그 빛나는 지역에
모든 재보
진주와 보석과 황금과 청금석과
쇠뿔모양의 황금과
광산의 황금과 황색의 황금과
황금티끌이 있어도,
여덟 가지 고리를 갖춘
포살을 지키는 것에 비하면
이들은 십육 분의 일의
가치에도 미치지 못하리.
마치 달이 허공에 비추면
별들의 무리가
빛을 잃는 것과 같다.
남자이든지 여자이든지
계행을 지키며
여덟 가지 고리를 갖춘 님은
지복을 가져오는
공덕을 쌓아 비난받지 않고
천상세계에 이른다.
- 전재성 님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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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확)
시쳇말 ‘한 방이 있다’는 어떤 분위기나 추세, 흐름 따위를 단박에 뒤바꿀 수 있는 아주 강력한 한 수를 의미한다. 비컨대 복싱 경기에서 가벼운 잽을 수백 차례 얻어맞던 선수가 강력한 어퍼컷 한 방으로 상대를 KO 시키는 경우라고나 할까. 그런데 부처님처럼 위대한 성현이나, 역대 뛰어난 문호들은 이런 표현을 아주 고상하고 격조 높게 표현했으니, 예컨대 ‘달이 밝으면 별도 희미해진다.’는 방식이다.
북송 때의 시인 소동파(蘇東坡)의 저 유명한 시(詩) <전적벽부(前赤壁賦)>에 월명성희(月明星稀), 즉 달빛이 밝으니 별도 드물다는 뜻을 지닌 구절이 나온다. 이 구절은 ‘어진 사람이 나오면 소인(小人)들은 숨어버린다’는 현상에 대한 비유이다. 그런데 월명성희는 소동파가 처음 쓴 것은 아니고, 중국 삼국시대 위왕조(魏王朝)를 세운 조조(曹操:155∼220)가 지은 서정시 〈단가행(短歌行)〉에 나오는 구절이이다. 208년 조조가 오(吳)나라의 손권(孫權:182∼252)과 촉(蜀)나라 유비(劉備:161∼223)의 연합군과 적벽(赤壁)에서 전투를 벌일 무렵 달빛이 밝은 양쯔강[揚子江]의 밤경치를 바라보는데 새들이 울며 남쪽으로 날아가는 것을 보고 뱃전에 서서 취중에 지어 부른 노래가 〈단가행〉이다. 〈단가행〉 가운데 ‘달이 밝으니 별빛은 희미한데 까마귀와 까치들은 남쪽으로 날아가네[月明星稀 烏鵲南飛]’라는 의미로 전적벽부에 인용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조조는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 제갈량의 기지로 유비에게 대패하였으나 정치가로서뿐 만 아니라 문인으로서도 재능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부처님께서 가장 위대한 재가 여성 시주자로 꼽히는 미가라의 어머니 ‘위사카’ 여인에게 읊어준 이 시는 <앙굿따라니까야> 3:70 ‘포살의 덕목에 대한 경(Uposathaṅgasutta)’에 등장한다.
부처님은 위사카 여인에게 포살에 내용과 포살의 위대한 공덕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면서 결론적으로 이 시를 들려주셨던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포살일에 지켜야 할 여덟 가지 덕목을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을 떠나는 것 △주지 않는 것을 빼앗는 것을 떠나는 것 △청정하지 못한 삶을 버리는 것 △거짓말을 버리는 것 △취기가 있는 것을 취하는 것을 버리는 것 △하루 한 끼 식사를 하고 때 아닌 때 식사하는 것을 삼가는 것 △춤, 노래, 음악, 연극을 관람하는 것과 꽃다발, 향료, 크림으로 치장하고 장식하는 것을 삼가는 것 △높고 큰 침대를 삼가는 것 등을 제시하셨다. 이 여덟 가지 고리를 잘 지키는 공덕은 무한하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이다. 부처님은 이 경에서 여덟 가지 덕목을 실천함으로써 얻어지는 공덕으로 얻어지는 경계, 예컨대 천상세계에 태어나 행복을 누리는 것에 비해 인간의 권력은 저열한 것이라고 반복해서 말씀하고 계신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최고의 권력자나 재벌들이 누리는 부귀영화는 천상세계에서 누리는 행복에 비해 아주 보잘것이 없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아무리 공덕을 많이 지어 천상에 태어나도 성자의 흐름에 들지 못하면 세세생생 쓰라린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복과 수명이 다하면 더 못한 세계로 내려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인간계에 태어난다면 선처에 나는 것이 되지만 대개는 비참한 곳, 즉 지옥이나 축생, 아귀의 세계에 태어날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천상에서 부귀와 영화를 누리다가 보니 공덕을 짓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로지 주어진 공덕에 대한 과보를 향유한다면 공덕이 다했을 때 이전 생에 지은 악행의 과보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인과(因果)처럼 무서운 것이 또 있을까 싶어 등골이 오싹해진다.
아무려나, 부처님의 이 시는 포살이 사라진,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지극히 형식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는 한국불교계에 경종을 울리는 내용이 아닐 수 없다.
- 시구 ‘십육 분의 일의 가치에도 미치지 못하리.’는 ‘조금’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십육 분의 일이라고 표현한 것은 부처님 당시에 인도를 지배하던 16대국, 즉 앙가, 마가다, 까씨, 꼬쌀라, 왓지, 말라, 쩨띠, 왐싸, 꾸루, 빤짤라, 맛차, 쑤라쎄나, 앗싸까, 아완띠, 간다라, 깜보자 등의 이름에서 차용된 것이다. 이것은 원래 베다시대의 제사장에게 딸린 16제관이 있었는데, 그 하나의 제관과 관계가 있다. 그러나 후대에 와서 조금, 하찮은, 미미한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