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이를 위하여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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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확)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말했다.

"세상은 결코 공평한 것만은 아니에요. 오히려 자신을 지키며 살려고 한 사람들이 먼저 희생을 당하니까. 그건 그 무슨 학설로도 설명이 되지 않아요. 전 선한 사람들이 복을 받는다는 말을 믿지 않아요. 그건 거짓말이죠. 대신 종교적인 윤회를 믿고 있죠. 이승의 일이 현세만의 논리로는 설명이 되지 않으니까. 전생이나 그 전생의 업보를, 물론 내가 어떤 특정의 종교를 가지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에요."

"가지고 있잖아?" 

"난 종교 같은 거 안 키워요."

그녀는 잠시 웃다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눈이 엄청나게 많이 온 날이었어요. 이곳에도 그렇게 눈이 많이 내린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어요. 서둘러 노악산 중턱을 오르다가 쓰러지고 말았지요. 내려 쌓이는 눈은 금방 허리춤 이상을 차올랐어요. 움직일 수가 없었지요. 그렇지만 너무 좋았어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미련 없이 눈 위에 누웠어요. 눈이 내 몸 위로 쌓이기 시작했어요. 웃고 있었어요. 조금도 두렵지 않았어요. 그때 언니가 다가왔어요. 날 보고 웃고 있었어요. 처음 나를 만났을 때처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언니는 내 손과 발을 만져 주었어요. 얼얼하던 손과 발에 열이 나기 시작했어요. 그러나 날이 어두워지자 언니는 손을 흔들며 울면서 가버렸어요. 눈을 떠 보니까 아까 그 남장 할머니였어요. 난 두 번 다시는 저 아랫마을로 가지 않기로 결심했어요. 처음엔 내려가라고 종용하던 정안 스님도, 남장 할머니도 그만 포기하고 말았지요. 결국 바라던 머리는 깎지 못했지만.”

“그랬으면 나 같은 사람 만나지도 않았을 테고…….”

“그건 내가 할 소리예요.”

“표석이라도 하나 세우지…….”

“아니오. 그건 언니가 원하는 일이 아니에요. 지금이 가장 좋아요. 내가 죽으면 아무도 이곳을 찾지 않을 거예요. 제멋대로 풀이 자라고, 꽃들이 필 거예요. 바로 그게 언니가 바라는 걸 거예요. 틀림없어요.”

그녀가 울먹였다.

“나 죽은 다음에도 그랬으면…….”

“당신은 죽지 않아요.”

“믿어도 될까?”

“언제나 의심 많은 당신!”

“언제나 거짓말만 하는 당신!”

우리는 함께 웃었다. 아무도 의식하지 않고. 

“아 참, 이 남장사에는 내 돈이 꽤 들어가 있어요.”

“그건 무슨 말?”

“해방되기 얼마 전 일본 경찰들이 절에 불을 질렀어요. 상주 경찰서에 불을 지른 최성민 열사하고 관련이 있다고, 물론 그것 때문에 언니가 서에 끌려갔지만……. 그래서 열 채가 넘는 요사채는 물론이고, 대웅전도 몽땅 타버렸어요. 이미 병색이 완연한 언니가 내 손으로 직접 법당을 완성해 달라고 했어요. 그러나 저 법당은 내가 지은 것이 아니라 언니가 지었어요. 언니는 직접 흙벽돌을 만들었지요. 죽기 일주일 전에도 벽돌을 만들었어요. 난 인부를 샀죠. 그렇지만 서까래며 기둥, 그런 것들은 모두 언니가 마련했어요. 모두 이 뒷산의 잡목으로 만들었죠. 언니는 눈을 감기 전 일주일 동안을 대웅전 흙 계단 하나 만드는데 바쳤어요.”

그녀에게서 이제 더 이상 캐낼 것은 없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잔뜩 구름 낀 하늘은 금방이라도 눈을 뿌릴 것 같았다.

“올겨울은 눈이 많겠지?”

“여름에 비가 많이 온 해는 눈이 많데요.”

“아직 내려갈 생각은 없지?”

그녀가 눈을 흘기며 웃었다.

“왜 싫어요?”

“그대를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믿지 못해.”

내가 주위를 살피며 말했다.

“나는 세상을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믿지 못해요.”

“오래 걸리지, 자신을 믿으려면.”

“도인 같군요.”

드디어 그녀가 일어섰다. 

나도 그녀를 따라 일어났다.

“다시 올 수 있을까요?”

“…….”

나는 미안하게도 그때 줄곧 내 생각만을 하고 있었다. 나 죽은 다음에 내 무덤을 지켜줄 무성한 풀들, 그리고 찬란한 꽃들. 다시 남장사로 내려왔을 때, 정안 스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언니하고 얘기 많이 했나?”

“언니는 언제나 말이 없어요.”

“내가 눈이 빠지게 김 선생을 기다렸는데.”

“저를요?”

“하기야 나보다 더 눈이 빠지게 기다리는 사람이 있지. 따라오시게.”

정안 스님은 반쯤은 파손된 후미진 요사채로 우리를 데리고 갔다. 그리고 다 찌그러진 장지문을 열었다. 아마도 절이 성했을 때는 부엌인 듯, 움푹 땅으로 들어간 조그만 공간이었다. 바닥에 짚이 깔려 있었다.

놀라운 일! 그곳에 정운이가 누워 있었다. 죽은 듯 누워 있는 녀석을 아무 말도 못 하고 바라보았다. 사람의 형상은 아니지만 분명 정운이였다. 바깥의 기척이 불안했는지 아니면 나와 정운이와의 만남을 위해서인지 정안 스님과 그녀가 문을 밀고 밖으로 나갔다. 

“정운아!”

내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불렀을 때, 정운이가 반쯤은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그러고는 벌떡 일어났다.

“동수야!”

“정운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부둥켜안았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의 몸을 맞댄 것은 어린 시절, 산소 위에서 고상 받기를 할 때 이후 처음이었다. 

어디에 그 많은 눈물이 마련되어 있었는지, 나는 울고 또 울었다. 그것은 녀석도 마찬가지였다. 그렇지 않아도 퉁퉁 부은 녀석의 얼굴은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로 범벅이 되었다. 그것은 썩은 허수아비의 모습, 짚단 같은 녀석은 겨울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다. 

“죽었다던데?”

내가 먼저 녀석의 팔을 풀며 물었다. 

“응, 죽었었지. 분명히 죽었었지.”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냐?”

“그때가 경찰에 한창 쫓기고 있을 때였어. 한쪽 다리가 망가진 영국이를 데리고는 도저히 도망갈 수 없었어. 그래서 나 혼자, 낙동 쪽의 산길을 탔지. 총을 세 방이나 맞았어. 그런데도 죽지 않았어. 경묵이가 왔었지, 니가 보냈다고. 갈 곳이 어디 있겠냐? 온 세상 사람들이 빨갱이 잡으려고 눈에 쌍심지를 키고 있는데……, 그래도 우리가 갈 곳은 절 집밖에 더 있냐? 흐흐! 시주도 못했는데 부처님 덕 좀 보고 있다. 흐흐!”

경묵이는 정운이와 영국이를 만나고 와서도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동봉 스님과 한 저울에 달아도 조금도 모자라지 않을 지독한 놈. 내가 잠시 인상을 찡그리며 경묵이의 행적을 더듬고 있는 사이, 정운이 녀석이 실성한 사람처럼 웃었다. 다리에 광목이 감겨 있었다.

“다리?”

그가 고개를 저었다.

“다리뿐만 아니야. 다리에 두 방, 등허리에 한 방.”

“치료는”

“정안 스님이 너무 고생이 많아. 빨리 죽고 싶은데 그게 잘 되질 않아. 그 양반 때문에 이적지 버텨왔지. 매일매일 씻는데도.”

앉아 있기 고통스러워하는 녀석을 조심스럽게 눕혔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눈물, 정운이의 온몸은 고름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때 비로소 알았다. 정안 스님이 문을 열자마자 훅 끼쳐오던 이상한 냄새, 귀앓이 냄새였다. 무슨 말인가 하려는데 말이 되어 나오지 못했다. 눈물만 쏟아졌다. 먹을 것이 없어 남의 집 밀기울을 가져다 먹던 놈, 실성한 녀석의 어머니는 늘 냇가의 모래를 쌀이라고 집으로 가져왔었다. 그 뼈저린 가난, 아이들이 놀려도 그냥 히죽 웃어버리던 놈, 내가 완장을 찼다고, 저까지…….

“울지 마!”

녀석의 목소리가 다시 내 목구멍을 틀어막고 말았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다리를 달라면 다리를 떼어서 주고, 눈알을 빼서 달라면 눈알을 빼서 주고, 내 모든 것을 다 줄 수 있다. 내 심장을 줄 수도 있고…….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도무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다람쥐 새끼처럼, 혹은 노루 새끼처럼 다시 뛰어놀고 싶다. 고물고물 소를 몰고 늑대 못으로 올라가서, 첨벙첨벙 늑대 못으로 뛰어들고 싶다. 

“울지 말라니까.”

눈을 감은 채 녀석이 도리어 나를 달랬다.

“영국이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