蓮이를 위하여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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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도?”

“아니요.”

술이 싫어서가 아니라 어쩐지 그럴 기분이 아니다. 오늘은 마지막 말을 하기 위해 온 것이다. 그녀는 내 말을 듣지 않기 위해 술을 마신다. 그녀의 눈동자는 술을 마시기 전부터 풀려 있었다.

“어서 마시라니까.”

마지못해 내가 술잔을 받아들었다.

“쭈욱 마셔.”

어쩔 수 없이 단숨에 털어 넣었다. 그녀가 내 입에 금방 삶은 버섯 안주를 넣어주었다. 그 그림을 스님이 물끄러미 바라본다. 스님과 그녀는 이미 약속된 술상. 눈앞이 자꾸 침침해진다. 몸에 열이 오른다. 스님이 또 한 잔의 술을 권한다. “그래, 술을 마시고 모든 것을 정리하는 거다. 그리고 취한 정신으로 눈을 감는 것이다. 맨 정신으로는 먼저 가버린 그 어떤 사람과도 만날 수 없다.” 바람 소리가 들창을 때린다. 산그늘이 절 앞마당을 덮었다. 아무도 말이 없다. 스님은 숭늉처럼 술을 마신다. 물보다 맑은 술, 스님은 항상 술을 원하는 내방객이 찾아오면 삽상한 송화주를 내놓는다. 스님과 그녀가 무슨 이야기인가를 한다. 그러나 내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는다. 밤이 깊었다. 바람 소리는 점점 거칠어진다. 동굴 속에서 들었던 밤새 소리가 들린다. 뎅그렁 뎅그렁 풍경이 울고 있다. 그런데 이상한 일, 조금 전까지 아팠던 몸이 너무 개운하다. 아무렇지도 않다. 밤새도록 괴롭혔던 배의 통증이 어디로 날아갔는지 흔적이 없다. 마음은 어느 때보다 더 가라앉았다.  

“조급하게 생각 말게. 저승사자가 아직 자네 데려가려면 멀었어.”

스님이 슬며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비로소 그녀가 나를 똑바로 쳐다본다.

“너무 검어요.”

“바람 탓이겠지.”

“아니에요.”

그녀는 반 울음이다. 마시지 못하는 술을 마셔서 얼굴은 홍시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바람은 대개 산바람이나 강바람이지. 봄바람은 꽃잎을 흩날리게 하는 바람이며, 물결을 만져주는 바람이지. 여름의 더위도 왕성한 녹음을 시들게 하는 더위이며 아이들을 강에서 놀게 하는 더위지. 우리들은 꽃잎을 흩날리게 하는 바람에서 즐거워하거나 슬퍼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과 같이 가뭄에 지친 나무에 작렬하는 햇빛에서 위축되는 우리들 자신을 발견하지.”

“무슨 얘기예요……?”

언젠가 어느 책에서 본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내 스스로 찾아낸 허황된 단어들이다. 지금 내게 있어 가장 절실한 주제는 바람과 구름이다. 아니면 눈에 보이지 않는 먼지들이다. 그것도 아니면 날마다 하염없이 부서지는 햇빛이다. 실체가 있으면서도 실체가 없는 양가적 존재들이다. 그러나 그녀는 아직 통일 열망이 식지 않은 열혈 혁명가다. 그녀에게 있어 모든 것은 현상이다. 눈에 보이는 것이다. 그녀가 넋을 잃고 나를 바라본다.

“나도 몰라.”  

“왜 이래요?”

그녀가 내 얼굴을 감싸 쥔다.

“난 원래 이래.”

“병원으로 가야겠어요.”

“병원으로 가야 될 병이 있고, 산에 눌러 있어야 될 병이 있지.”

앉아 있기가 불편하다. 그러나 내색은 할 수 없다. 다리를 앞으로 뻗었다.

“날 왜 불렀어요?”

“몰라.”

정말이지 나도 그 이유를 확실히 모른다. 단지 오늘은 그녀를 느닷없이 불러다가 동봉 스님 앞에서 끝장을 내고 싶었다. 그 끝장이 무엇인지도 정확하게 모르면서. 그녀가 내 머리를 끌어다가 자신의 가슴에 안는다. 머리를 어지럽게 하는 그녀의 살 냄새,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렇게 숨이 막혀 죽을 수만 있다면…….

“무릎은 괜찮아요?”

내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부탁이에요. 제발!”

“대원 스물다섯 명이 다 죽었는데도 난 살아남았어. 혼자!”

“누우셔요.”

그녀의 목소리는 몇 갈래로 갈라지고 있다. 내가 그녀의 가슴에서 얼굴을 든 것은 나도 모르게 내뱉은 스물다섯 명의 대원 때문이었다. 그들 하나하나의 얼굴, 처참했던 그들의 마지막 모습, 나는 비로소 숨을 골랐다. 그녀의 가슴속으로 온몸을 내던지고 싶은 뜨거운 욕망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녀가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본다.  

“여긴 내 자리가 아니야. 내가 보경이를 부른 것은…….”

처음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가 울고 있다.

“왜 그래요?”

그러나 난 할 말이 없다. 다만 그녀에게 미안할 뿐이다. 내가 그녀와 만나는 것과 다르게, 그녀가 나를 만나는 것은 언제나 죽음을 담보로 한 일이다.   

“서울 가면 저 보따리를 풀어 봐. 내가 몇 번 읽었던 책 들이지. 미처 읽지 못한 부분은 나대신 보경이가 읽어주면 더 좋구.”

“동수 씨?”

역시 그녀도 내 이름을 불렀다. 내가 희미하게 웃자 그녀가 다시 나를 끌어안았다. 따스함. 그녀는 발버둥을 치고 있다.

“난 안 가요.”

“소란 피우라고 부른 게 아니야.”

“못 가요.”

“몸이 나아지면 내 서울로 올라가지.”

“거짓말.”

“난 거짓말한 적 없어. 이건 내 부탁이 아니고, 같은 동지로써 명령이야. 말을 듣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줄 알지. 그대로 처형이야.”

“날 처형하세요.”

어쩔 수 없이 나도 그녀를 안았다.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쏟아지는 눈물. 그러나 그걸 그녀에게 보일 수는 없다. 옛날과 다르게 새털처럼 가벼운 사람, 그녀가 서울에서 얼마나 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두 개의 먼지가 모이면 무엇이 될까? 그런데 그 두 개의 먼지가 세상을 바꾸겠다고 깃발을 흔들었다. 

“마을에 내 아들이 살아 있어. 나중에 그 아이에게…….”

나는 절망감에 사로잡혀 하지 않아야 할 말을 그녀에게 하고 말았다. 역시 술은 후회를 남긴다. 더구나 술을 마신 다음의 절망은 지울 수 없는 흉터를 남긴다. 나는 그녀에게 나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빛살 같은 흉터를 남겼다. 그런데 그녀는 고개를 흔든다. 

“정말이에요?”

“경묵이가 키우고 있어.”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다시 똑바로 나를 쳐다본다. 

“그런데 그걸 왜 나한테?”

“그 친구, 내 아들이 있다는 말도 안 해.”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나를 쓸어안는다. 그녀의 몸은 펄펄 끓었다. 나는 감정이 차오르면 그녀의 몸이 얼마나 뜨거운지 알고 있다. 그녀와 함께라면 시베리아 벌판이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아들을 만나세요.”

“아니.”

단호하게 말했다.

“이럴 수는 없어요.”

그녀는 울고 있다. 내가 불쌍해서가 아니라 엄마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는 내 아들이 불쌍해서일 것이다. 엄마 아버지 없이 자란 그녀는 가족에 대한 애착이 유별나다. 그녀는 역시 여자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내 아들을 염려할 정도로. 그러나 그녀의 감정에 동조할 수가 없다. 내가 이곳에서 내리는 모든 판단은 순전히 동봉 스님 몫이고, 전적으로 경묵이의 차지다. 

“만날 때마다 이러면 내가 힘들어. 지난번 서울 갔을 때도 그랬잖아. 그런데 아직 멀쩡하잖아.”

“그럼, 여기 백천사에 꼼짝 말고 있어야 돼요. 꼼짝 말고.”

“그렇지 않아도 동봉 스님이 이 방을 내주셨지. 자네 올 때까지 꼼짝도 않음세.”

그녀는 황황히 옷을 주워 입었다. 

“지금?”

“나오시지 마세요. 약을 구해올 때까지는.”

그녀 역시 사람들이 다니는 길은 마음대로 다닐 수 없다. 청리역을 향한 산길 이십 리, 그녀는 하루에 한 번 있는 경북선을 탈 모양이다. 청리산이 아니라 백두산이라도 그녀는 맨몸으로 오를 여자다. 동봉 스님도 그걸 아는지 그녀를 붙잡지 않는다.

“삼 일이면 돼요.”

그녀가 손을 흔들었다. 이미 땅거미가 내린 청리산, 동봉 스님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그제야 눈물이 쏟아졌다. 희미한 어둠 속으로 그녀의 모습이 잠겨갔다. 그러다가 뿌옇게 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