蓮이를 위하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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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하여라!

 오늘 저녁 잠자리에서 

 내일 아침을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 

 현실과는 아주 다른 책을 들고 

 고민하는 사람들, 

 먼저 가버린 사람들을 위해 

 큰소리로 진혼곡을 부를 수 있는 사람들, 

 그들의 무덤에 형식적으로라도 

 꽃을 바칠 수 있는 사람들, 

 부모형제가 있는 사람들, 

 부모형제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 

 그대들 모두는 행복하여라! 

 청리산내(靑里山內).

 바보 같은 사내가 있다.

 나, 하늘을 서성거린다. 밤은 한껏 깊었다. 별이 드문 밤. 아주 오래된 두 그루 산벚나무 옆을 지나 앙상한 참나무 가지가 늘어선 허공을 걷고 있다. 몇 개 되지 않는 별빛이 바람결에 흔들리고 있다. 이미 멈춰버린 시계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오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런데도 자신이 자정이 넘은 시간, 자꾸만 젖은 하늘을 서성이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 자꾸 시계를 쳐다본다. 그리고 길게 한숨을 쉰다. 가슴속에 남아 있는 말 한마디를 끝끝내 마저 하지 못했다. 그러나 정작 그 말이 도대체 무슨 말이었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냥 할 말이 있었는데...... 그 말을 찾기 위해 아랫마을 동구 밖을 흐린 눈으로 마냥 걸었다. 그리고 Hosanna 교회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호산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군중들은 나뭇잎으로 엮은 화환과 아름다운 나뭇가지와 종려나무 가지를 손에 들고 성전의 정화를 성취케 해주신 그분께 절규하였지요. 부디 우리를 구원해 주시옵소서! 

 그녀는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구원? 노랑 바위 앞. 세 개의 산을 넘어 다니던 국민학교 길. 그 너머로 흐르는 낙동강. 나는 눈을 감고 그 길을 벌써 몇 번째 걷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무작정 걷다가 눈을 뜨면. 현실의 소굴. 멀리 내가 걷고 있던 아랫마을 길이 보인다.

 보이는 것 모두가 설움.

 겨울 잎 흩날리는 머리끈은 누구인가?

 어둔 산녘이여, 물처럼 누운 신작로

 오게 되면 12월에 올게요.

 꼭 누구 소설의 한 장면처럼 그녀와 주고받은 마지막 말들을 기억했다. 쓸쓸한 그녀의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의 미소만 떠오른 것은 아니다. 그녀의 검은 머리칼, 그 독특한 냄새, 강물처럼 맑았지만 따뜻했던 그녀의 입술...... 지금의 차가운 소굴에서 그녀와 함께 했던 순간들을 떠올렸다.   

 그러나 바람결에도 듣지 못했다. 한 번 흘러간 물처럼 그녀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손을 한 번 흔들고 떠나던 뒷모습, 그때 웃고 있었다. 그것이 마지막이 될 줄 몰랐다. 만나서 익숙해질 때쯤 헤어진 것이다. 하기야 이 땅에 발을 딛고 사는 모든 것들은 만나서 익숙해질 때쯤 이별한다. 정말 보고 싶다. 그런데 왜 그녀가 보고 싶을까? 

 괜스레 목이 말랐다.

 안경 너머로 늦은 귀가를 재촉하는 별들이 마구 지껄이며 지나간다. 웃는다. 스스로가 우습기 때문이다. 끝끝내 그녀를 붙잡지 않은 것은 자신이었다. 하기야 그때는 자신의 마음을 알지 못했다. 누가 자신의 마음을 알 것인가. 이 세상 그 누가? 

 멍청하게 주변을 둘러본다. 나만 남기고 마지막 인민군을 따라 속절없이 떠난 동무들처럼 북으로 북으로 질주하는 산들, 늘어선 아카시아들, 검은 하늘 위로 떠가는 구름, 여기는 어디인가! 가끔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모를 때가 있었다. 잠깐씩 아주 잠깐씩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할 때가 있었다. 정말 여기는 어디인가? 여기가 정말 내 고장 청리산내란 말인가? 

 햇볕 맑은 지난 가을날, 몰래 낙동강의 달빛을 바라보고 있다가, 지금 무엇 때문에 그곳에 앉아 있는가를...... 그리고 그 검은 물속으로 들어가 영원히 사라졌으면 하고 바랄 때가 있었다. 붙잡히면 죽는 위험을 무릅쓰고 무엇 하러 그곳에 갔을까?

 평양역.

 한창 삐라를 뿌리고 다닐 때였다. 빗줄기 때리는 봄밤의 <대동강> 여인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옆방의 숨 쉬는 소리마저 들리는 좁은 방 안에서 함께 벌거벗고 누워 자던 제3 야체이카 동지를 바라보다가, 내가 먼저 말없이 옷을 입고 나올 때가 있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열기 때문이었다. 어느 먼 별에서 맡았던 것 같은 그 벚꽃의 냄새. 사내들에게는 이상하게도 그 냄새가 났던 것이다. 

 냄새란 무엇일까?

 그러했던 한때처럼 초입의 겨울 길을 걸으면서 내가 지금 어디를 헤매고 있는가를 가늠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은 눈으로. 언제쯤 진짜 걸음을 할 수 있을까? 알 수가 없다. 십중팔구는 영원히 그렇게 걷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여기는 도대체 어디인가? 습관처럼 그녀가 마지막 걸어갔던 그 길목을 향하고 있다. 청리역으로 가는 다른 지름길이 있지만, 그녀를 배웅해 준 길이 바로 이 길이었다. 에둘러 경찰서와 면사무소를 돌아가는 길, 그는 벌써 1년째 이 길만으로 역을 다녔다. 실제는 3번, 눈으로는 밤이면 밤마다.

 이슬비는 점점 진짜 비로 향한다. 신작로는 거의 말랐지만 포장이 되지 않은 흙길은 자꾸만 진탕으로 변하고 여기저기에 작은 물웅덩이가 패어 있다. 몇 남은 갑장산 빨치산을 토벌한다고 군용트럭이 다닐 수 있게 도로를 지난여름부터 파헤쳐 놓은 산길 또한 푸욱 젖어있다.

 다시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손끝을 타고 올라오는 전율, 항상 또록또록 눈을 뜨고 있는 작고 동그만 그녀의 시계였다. 나는 그녀에게 준 시계를 생각했다. 왜 바꿔 차자고 했을까? 왜였을까? 

 이번 겨울은 일찍 찾아왔다. 그리고 그 몹쓸 비바람까지.  

 그녀가 이 소굴을 찾아왔던 그 여름, 비 내리는 청리역 산벚나무 밑에서 그녀와 소주를 나눠 마셨다. 경찰에게 걸리면, 아니 여기 살고 있는 그 누구에게라도 걸리면 곧 재판 없는 총살. 그 죽음을 무릅쓰고 작은 역 광장에서 술을 마시며 그녀가 들려주었던 빗방울 전설. 그리고 기적소리를 울리며 떠나던 열차, 그 영혼 없는 철마가 부러웠다. 저 열차는 비록 평양역은 못 가지만 서울역은 갈 수 있는데...... 나는? 

  지금의 청리역은 인민재판 때 얼룩진 피로 흉물 터가 되어 비에 젖고 있다. 늘어선 삼나무 가지 사이로 서늘하게 불어오는 바람, 그제야 나는 정신을 차리고 다시 나의 소굴로 돌아왔다. 

 내가 이곳에 살게 된 것은 벌써 오래전이었다. 그동안 내가 전국을 돌아다니며 옮긴 행선지는 나 자신도 모두 기억해 낼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러나 이곳에서, 이제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한다. 항상 이렇게 오늘처럼 상상으로만 나들이를 할 뿐이다. 유일하게 내 넋두리를 들은 하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저기 보이는 아랫마을. 

 검문소 앞

 꽃 팔던 아가씨

 구름처럼 강물 

 겨울비.

 아직도 제 갈 길을 찾지 못한 산 감나무 잎사귀 위로 빗방울이 떨어진다.

 날은 이미 밝았다. 안에서는 하늘이 보이지 않는 동굴 속. 나는 검은 안경을 쓰고 앉아 있다. 잠이 오지 않아서다. 아무리 잠을 청해도 눈이 감기지 않는다. 밤새도록 벌써 몇 번이나 청리역을 다녀왔는데...

  그 후유증으로 낡은 공책 위에는 제대로 정렬되지 못한 문자들이 빼곡히 박혀 있다. 나는 끙끙대고 있다. 빗줄기는 자꾸 굵어진다. 아마도 저 비가 그치면 본격적인 겨울이 올 것이다. 다시 잎담배 하나를 입에 물었다. 몽롱하다. 담배 연기가 알코올보다 효과가 있다. 그래서 땅바닥에 몸을 눕힌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