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이 앓으니 나도 앓는다

                                                            정찬주(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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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중물 생각

 김영랑 생가를 다녀왔다. 생가 뜰에 모란꽃은 물론 씨방 속에 든 꽃씨까지 다 떨어지고 없는 늦여름인데도 모란꽃의 환(幻)은 그림자처럼 어른댔다. 강진군 공무원 김걸 선생이 안내해 주었다. 10년 전에 처음 만났는데, 예나 지금이나 소나무처럼 변함이 없으므로 나는 영랑 생가 마당에서 심송(心松)이란 호를 즉석 작호(作號)해 선물했다. 

 그러자 김걸 선생이 생가의 모란꽃밭을 샅샅이 살펴보더니 모란씨 열 개를 따와서 준다. 땅에 떨어지지 않고 씨방에 마지막까지 붙어 있던 씨란다. 영랑의 혼 같은 씨를 이불재에서 잘 발아시켜 여생을 함께 보내고 싶다. 부처님은 처음도 같고, 중간도 같고, 끝도 같아야 한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여여(如如)하다는 말과 같은 뜻이리라. 

부처님 말씀과 침묵

문수보살은 유마힐을 문병하기 위해 여러 대중과 함께 베살리로 갔다. 그때 유마힐은 문수보살 일행이 오는 것을 알고 가구를 치우고 시중드는 사람들을 내보낸 후 홀로 침상 위에 누워 있었다. 문수보살이 들어서자 유마힐이 말했다.

“어서 오십시오. 문수보살님, 올 것이 없는데 오셨고 볼 것이 없는데 보십니다.”

문수보살이 유마힐에게 말했다.

“그렇습니다, 거사님. 왔다 해도 온 것이 아니며 갔다 해도 가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와도 온 곳이 없고 가도 간 곳이 없으며, 본다는 것도 사실은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건 그렇고, 병환은 좀 어떠십니까? 부처님께서 안부를 전하셨습니다. 병은 어째서 생겼으며, 얼마나 오래됐으며, 어떻게 하면 나을 수 있겠습니까?”

유마힐은 대답했다.

“내 병은 무명(無明)으로부터 애착이 일어 생겼고, 중생이 앓고 있으므로 나도 앓고 있습니다. 중생의 병이 없어지면 내 병도 없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살은 중생을 위해 생사에 들고 생사가 있으면 병이 있게 마련입니다. 중생이 병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보살도 병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살의 병은 대비심(大悲心)에서 생깁니다.”

“거사님의 병명은 무엇입니까?”

“내 병에는 증세가 없으므로 볼 수 없습니다.”

“그 병은 몸의 병입니까, 마음의 병입니까?”

“몸과는 관계없으니 몸의 병은 아니며, 마음은 꼭두각시 같으므로 마음의 병도 아닙니다.”

“지(地)·수(水)·화(火)·풍(風) 네 가지 요소 중 어디에 걸린 병입니까?”

“이 병은 지의 요소에 걸린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지의 요소와 관계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수·화·풍의 요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중생의 병이 네 가지 요소로부터 생겨 앓고 있기 때문에 나도 병든 것입니다.”

“병든 보살은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고 극복해야 합니까?”

“병든 보살은 이와 같이 생각해야 합니다.

‘내 병은 모두가 전생의 망상과 그릇된 생각과 여러 가지 번뇌 때문에 생긴 것이지, 결코 병에 걸려야 할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네 가지 요소가 결합되어 몸이라고 가칭(假稱)하였을 뿐 네 가지 요소에는 실체로서의 주체는 없으며, 몸에도 역시 ‘나’라는 게 없기 때문이다. 또 이 병이 생긴 것은 모두가 ‘나’에게 집착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라는 것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이와 같이 병의 근본을 알면 ‘나’에 대한 생각도, 중생에 대한 생각도 없어지고 존재에 대한 생각이 일어날 것이니 그때는 또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이 몸은 여러 가지 물질이 화합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생길 때는 물질만 생기고 없어져도 물질만 없어진다. 또 이 물질은 서로 알지 못해 생길 때 내가 생긴다고 말하지 않으며 없어질 때 내가 없어진다고 말하지 않는다.’

또 병든 보살이 물질에 대한 생각을 버리기 위해서는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물질에 대한 이 생각도 또한 뒤바뀐 생각이다. 뒤바뀐 생각이란 커다란 병이다. 나는 반드시 이것으로부터 떠나야 한다.’

떠난다고 하는 것은 ‘나’와 ‘내 것’으로부터 떠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상대적인 것으로부터 떠나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것을 떠난다 함은 주관과 객관을 떠나 평등한 행을 하는 것입니다. 이때의 평등은 ‘나’와 열반이 평등하며 ‘나’와 열반이 모두 공(空)하다는 의미입니다. 공이라고 하는 것은 다만 이름에 지나지 않으며 그와 같은 상대적인 개념은 모두가 변하게 마련입니다. 이 평등함을 얻으면 다른 병은 없고 오직 공에 대한 집착만이 남지만 이 집착 또한 공인 것입니다.

병든 보살은 이제 괴로움과 즐거움을 감수(感受)하는 일이 없지만, 중생을 위하는 일이라면 온갖 괴로움과 즐거움을 감수합니다. 또 불법(佛法)이 중생계에서 충분히 성취되기 전에는 그 감수하는 일을 버리고 깨달음의 경지에 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자기의 몸이 괴로우면 악의 과보를 받는 중생을 생각하며 ‘나는 이미 괴로움을 극복하였으므로 모든 중생의 괴로움도 극복하도록 해야 한다.’는 대비심을 일으켜야 합니다. 그리고 병의 근본을 끊기 위해 가르쳐 이끌어야 합니다. 

병의 근본은 속된 인연에 끌리는 반연(攀緣)입니다. 즉, 마음이 대상에 대해 작용하면 병의 근본이 됩니다.

마음이 작용하는 대상은 삼계(三界)입니다. 마음의 작용을 끊기 위해서는 모든 것에 얽매이지 않아야 합니다. 얽매이지 않으면 마음이 대상에 대해 작용하지 않게 되고, 이렇게 되면 상대적인 생각을 떠나게 됩니다. 상대적인 생각은 곧 주관과 객관의 분별이며, 이런 분별을 떠나는 것이 모든 것에 얽매이지 않는 길입니다.

문수보살님, 병든 보살이 그 마음을 극복한다는 것은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보살은 마음을 극복하는 일에 집착하지 않으며, 극복하지 않는 일에도 집착하지 않습니다.”

― 『유마경維摩經 문질품問疾品』

 갈무리 생각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져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나는 영랑의 시 <모란이 피기까지>를 볼 때마다 영랑의 마음으로 들어가곤 한다. 이 시를 쓸 때 영랑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지는 모란꽃을 보고 이렇게 슬퍼했던 시인이 있었을까. 또다시 모란꽃이 피기를 기다리며 그리워한 시인이 있었을까. 시인은 모란꽃을 자신의 한 부분으로 생각하지 않았을까? 자신과 모란을 한 몸으로 생각하고 이 시를 짓지 않았을까. 영랑과 모란꽃은 둘이 아닌 불이(不二)이다. 그렇다면 영랑의 슬픔은 자이(慈)고 기다림은 비(悲)가 아닐까?  이 시는 영랑의 동체대비심(同體大悲心)의 발로라는 생각이 든다. 모란이 앓으니 영랑도 앓는 것이다. 참으로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내 나이 칠십이 넘어서야 영랑의 이 시가 불교시(佛敎詩)라는 것을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