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 봉규
2022-06-17 (금) 07:57차밭에 비가 내린다
따지 못한 노을빛 살구가 툭툭 떨어지는 시절.
때가 왔다. 드디어 때가 왔다. 눈송이보다 아름다운 빗줄기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다. 산이 젖는다. 들이 젖는다. 구름이 구름을 몰아오고, 빗줄기가 빗줄기로 이어져 대지를 덮는다.
"우산 쓰면 벌 받는다."
그래서 우리는 젖지 못한다. 젖을 수가 없다. 이럴 때면 반드시 우산 없이 비를 맞아야 한다는 옛 어른들의 말씀이 귀에 쟁쟁거린다. 그만큼 귀하고 귀한 금비다.
어룰 없이 지는 꽃은 가는 봄인데
어룰 없이 오는 비에 봄은 울어라.
서럽다 이 나의 가슴속에는!
보라, 높은 구름 나무의 푸릇한 가지.
그러나 해 늦으니 어스름인가.
애달피 고운 비는 그어 오지만
내 몸은 꽃자리에 주저앉아 우노라
아마 지금도 봄비만 오면 천상에서 울고 있을 소월(素月)에게는 미안하지만 6월의 초입, 오늘 우리는 웃는다. 마구 웃는다. 온 겨우내, 아니 온 봄 내 땡땡 가물던 땅에 드디어 비 다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단비, 그것도 지나치지 않고 소록소록, 바싹 타들어가던 땅을 적신다. 보이는 것 모두 진초록의 향연, 풀과 나무와 어린 벼포기들이 춤을 추고 있다.
문경을 지나 예천, 그리고 봉화로 접어들었다. 차창으로는 새해가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빗방울이 들이친다. 오래 기다렸다. 이 좋은 날, 이제 진불제자를 만나러 가는 길이 몇 번 째인가?
오늘은 특별히 복겹게도 나와 함께 살고 있는 우리 면의 면장님과 동행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탄광에서 잃은 그는 매년 11월 1일 날 봉암사에서 거행되는 전몰 광부들의 추념식에 참석한다. 그게 벌써 세 반세기. 그래서 그 또한 넓은 산문의 영역에 있다.
"아이구우 좋아라!"
운전대를 잡은 그가 함성을 지른다. 오지 않는 비로 노심초사하던 농민들의 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오전에도 면직원들과 가뭄대책을 마련하느라 분주했단다. 그의 휘파람 소리에 안도의 환(歡)숨이 실려있다.
200km.
결코 짧지 않은 거리다. 그렇지만 신나는 길,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삼강주막과 용궁 순대거리도 지났다. 그리고 봉화, 현지인들의 말을 빌리면 남한에서는 가장 긴 소천의 구마계곡, 그곳에 오로지 열목어가 산다는 청정의 영역. 구름이 구름을 덮고, 산이 산을 덮고, 물소리가 물소리를 덮고, 새소리가 새소리를 덮는다.
어디까지인가?
아득하다.
구마(九馬)계곡은 고선(古善)계곡으로도 불린다.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이 계곡에 아홉 필의 말이 한 기둥에 매여 있는 구마일주의 명당이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마방, 죽통골, 굴레골 등 말과 관련된 지명이 아직도 남아있다. 이 계곡은 태백산(1,567m)에서 발원해서 봉화군으로 약 20km에 걸쳐 흐르는 계곡이다. 봉화읍을 지나 곧장 울진 방향 36번 국도를 따라 노루재 터널을 지나고 소천면 소재지에서 31번 국도를 조금만 더 지나면 바로 그 계곡이 나온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곳 중턱에는 각화사가 있다. 각화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년)에 원효대사가 세웠다. 원래 이름은 남화사였는데, 새로 옮겨 지으면서 각화사라 부르게 되었다. 한때 800여명의 승려가 거주하였으며 국내 3대 사찰의 하나로 손꼽혔다.
그러나 어찌 사찰이 있다고 하여 그곳이 아름다운 산문이 될 수 있는가? 그곳에는 승속 관계없이 아름다운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 아름다운 사람들을 찾아가는 길, 몇 번인가 차를 돌렸다. 꼬불꼬불 도무지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을 것 같은 산중 언덕, 마침내 집 대신, 사람 대신, 차밭이 보였다.
"저기다."
우리 면장님이 소리를 쳤다. 공무원 생활 30여 년, 그도 풀과 나무엔 달인이다. 그가 급하게 차를 몰았다. 좁은 산길 옆으로는 비를 맞아 함초록한 산딸기들의 아우성, 손이 가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그 산딸기 덤불 속, 소위 백두대간의 중간지점에 살고 있었다.
누군가?
검은 우산을 쓰고 손짓을 한다.
오래된 인연, 오늘의 진불제자들을 추천한 후배다. 바쁘고 험난했던 시절, 새끼들과 부모님들 건사하느라 자주 얼굴조차 보지 못했던 그. 이제는 환갑을 바라보고 있는 나이다. 자신도 차를 심고 가꾸기 위해 이곳에서 잠시 상주를 하는 중이란다.
드디어 간판 없는 간판의 이름은 <우리茶 연구소>.
늘 표정 없는 후배의 안내로 연구소 문을 열자 먼저 윤여목 대표가 우리를 맞이한다. 아기 같은 웃음을 달고 있다. 어쩌면 산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천진하다. 빙긋 웃는 모양새가 정말 산비탈 한 켠 키 작은 찻잎을 닮았다. 우리 차 연구에 청춘을 바친 그의 차 우리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필자의 방식대로 바로 치고 들어갔다.
"언제 우리 만났는가요?"
"인사동에서 그리 오랜 세월을 보냈는데..... 만났겠지요."
어눌하지만 정감이 묻어난다.
"이곳에 본격적으로 들어온 지는 5년 남짓 되었습니다. 산지를 구입하고 차 묘목을 심은지는 25여년이 되어갑니다."
그동안의 온갖 풍상을 회상하는 듯 그의 눈이 감긴다.
"먼 길 오셨습니다."
바로 그때 이곳 차밭과 연구소의 대모(大母). 그가 나타난다. 한지스러운, 아니 옛 종갓집 며느리 같은 그가 필자를 향해 빙긋 웃는다. 아슴아슴. 서로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몇 번인가 서로가 서로를 만났을 터, 그게 벌써 30여 년이 넘었다. 월간 <해인(海印)>에서 그의 <호계삼소>를 읽은 기억이 있다. 너무도 오랜 옛날이지만 그가 참여한 <금강>지도 읽은 기억이 있다. 당시에는 이 나라 불교계의 신기원을 이룩한 기념비적인 잡지. 그때는 파릇한 장채향 기자. 그런데 벌써 그윽한 산 할머니가 되어있다. 이곳에서는 우리차 연구소 회장님으로 통한단다.
".... 고생하셨습니다."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느닷없이 찾아와 꼭 무슨 형사처럼 물어대는 필자를 당황스런 눈빛으로 바라보던 그는 이내 평정심을 되찾고 얼굴 가득 웃음을 단다.
"찾아오는 사람도 그리 없지만 이곳에 오면 누구나 고문을 당합니다."
"예?"
"차 고문."
그렇지 않아도 옆에 앉은 우리 면장님은 윤대표가 내놓는 갖가지 차로 이미 녹초가 된 지경, 우리 면장님은 예의 바른 사람, 정성껏 윤대표가 내놓는 차를 마시지 않을 수 없다. 사르르 사르르, 나름대로 예의를 갖춘다고 소리 내지 않고 마시는 품이 우스워 모두 웃었다. 술은 정량을 가리지 않으면서 차에는 너무 약하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웃었다.
"아마도 86년도에서 91년까지 잡지사에 있었을 거예요."
남의 말을 하듯 장회장, 그가 비로소 말문의 자리를 잡는다.
"그 중간, 88년도에 출판사를 차렸지요."
그것이 초롱출판사다. 여러 스님들과 <고요한 소리>도 세상에 알렸다. 그렇게 보면 그는 활성화된 불교 잡지와 출판사의 산증인이다. 한때는 불교계를 대표하는 당찬 여기자였다. 이야기를 나누다 간간 그와 필자의 지난 흑백사진이 겹친다. 이럴 때 한 잔의 곡차가 있었으면 제격이련만, 이곳은 일체 곡차 사절이다.
"그때 지금의 윤대표가 편집실장을 맡았지요."
윤대표는 논산이 고향, 장회장은 이곳 각화사, 춘양이 고향이다.
"어떻게 부처님을 만났습니까?"
윤대표는 그 시절, 라즈니쉬에 매료되어 깨달았다는 사람들을 샅샅이 찾아다녔고, 장회장은 자칭 모태불교인이란다. 모태불교?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낯설다. 까닭인즉, 이곳에서 광산 일을 하시던 부친께서 사업이 쇠락하자 술만 마셨단다. 그리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술 주정. 알만하다. 일제와 6,25, 그리고 뼈저린 가난, 불행한 연대였다. 그 당시 바깥어른들의 대부분은 그렇게 청춘을 보냈다.
"아이고, 안 겪어본 사람은 몰라요. 밖에서는 그리 호인인 분이 집에 들어오시면 난폭해지지요."
그러면서도 그는 빙긋 웃는다.
그래서 모친이 손발을 빌며 간청해서 웃 절 각화사에 주석하던 우리 불교의 전설 금오 스님을 만나게 되었단다. 그리고 그날 기적처럼 순한 양이 되어 곧바로 수계를 받았단다. 그 너무도 믿기지 않은 사실 앞에 그는 모태불자가 되었단다. 그 후부터 부친은 한량거사로 절과 스님들에게 보탬이 되는 일이라면 거리를 마다하지 않았단다. 시간을 마다하지 않았단다. 특히 금전마저 마다하지 않았단다.
"그렇게 금오 스님을 뵌 것이 우리 집을 변하게 하였지요."
그러면 그렇지. 저 단정한 몸씨와 흐트러짐 없이 고운 말씨, 그를 오늘까지 여느 인들과 다르게 한 것은 역시 사람과의 만남이었다. 그것도 누구도 아닌 금오 스님이라면?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가 살아온 외길이 짐작 간다.
각화사 금오 스님과 인연
금오 스님!
1896년 전남 강진에서 태어난 금오 스님은 어려서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했다. 일제시대 척박한 시대적 상황을 헤쳐 나가기 위해 보다 큰길을 찾던 금오 스님은 16세 되던 해인 1916년 금강산 마하연에서 도암 스님을 은사로 불연을 맺었다. 출가 이후 10여 년간 금강산과 안변 석왕사에서 참선 정진을 거듭하던 스님은 26세 되던 해 오대산 월정사와 경허 스님이 있던 통도사 보광전, 혜월 스님의 천성산 미타암, 그리고 이곳 각화사 등지를 찾아다니며 수행의 폭을 넓혀나갔다. 스님은 28세 되던 해 예천 보덕사 보월 스님을 찾아 2년간 보월 스님의 지도하에 수행하다가 보월 스님 입적 후 서른의 나이에 만공 스님의 증명으로 보월 스님의 법계를 이었다. 보월 스님의 법계를 이은 금오 스님은 이후에도 승속의 경계를 넘는 만행을 걸림 없이 감행했다. 법계를 전수받은 것에 안주하기보다는 자신의 수행에 더욱 매진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마흔의 나이에 직지사 조실을 맡아 법회를 펴는 등 스님은 자신의 수행 뿐 아니라 후학을 양성하는 일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스님은 법을 구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참선 정진과 선풍진작을 본분으로 삼았지만 눈앞에 닥친 승단의 문제에 대해 결코 외면하지 않았다. 1950년대 비구와 대처 간의 분쟁이 일어나자 스님은 전국 비구승 대회 준비위원회 추진위원장을 맡아 승단 재건에 대한 단호한 의지를 표출했다.
그렇게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정화불사에 참여한 금오 스님의 노력으로 비구·대처승 간의 분쟁이 끝나자 스님은 다시 수행자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특히 스님은 전국의 선방을 돌며 많은 후학들을 일깨웠다. 월산, 범행, 탄성, 이두, 혜정, 월성, 월주 등 기라성 같은 제자들이 그의 문하에서 정진을 한 후학들이다. 조계종의 선풍 진작을 위해 앞장섰던 선승이면서 종단의 문제에도 좌시하지 않았던 금오 스님은 1968년 10월 8일 법주사에서 입적했다.
성불이라는 위대한 소원은 결코 평탄한 것이거나 쉬운 일은 더욱 아니다. 그 길은 넓고도 좁은 길이며 쉽고도 어려운 길이다. 어쩌면 한순간에도 이룰 수 있는 일이기도 하지만, 또 어쩌면 여러 생에 걸친 만행 고행으로 이루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로 금오 스님은 평소 보임공부(保任工夫)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수행의 완성을 이루는 근본요체가 되는 하심(下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다.
하심은 성불의 길을 넓히고 자꾸만 나태해지는 육신을 다스리는데 첩경의 덕목인 것이다. 그러므로 스님은 하심을 쌓기에 가장 적절한 거지 생활을 택하기로 하였다. 스님은 많은 사람들의 천대를 받는 거지 생활을 할 양으로 거지소굴을 찾아가 거지가 되기를 자청하였다.
1. 밥은 어떤 밥이든 트집을 잡지 않는다.
2. 옷은 해어져 살갖이 나와도 탓하지 않는다.
3. 잠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어디서든지 잔다.
스님은 일단 거지들이 준수하는 이런 3개항을 지킬 것을 약속하고 거지패들과 어울려 보임 아닌 보임을 사셨다. 서울에서뿐만 아니라 전라북도 전주에서도 이런 스님의 생활은 계속되었다.
보잘것없는 움막 속에서 신분을 감추고 약 2년간의 거지 행세를 하며 고행과 걸식으로 수도에 진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신분이 드러나 [움중],또는 [움막중]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어디 그뿐인가? 그가 남긴 일화는 차고 넘친다. 어떤 사람이 어떤 길을 가는 데는 항상 사람이 있다. 책이 사람을 만들고 사람이 책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을 만든다.
진불제자 <윤여목과 장채향>
우리 차(茶)를 부처님께
"그래서 이 산골에 오셨나요?"
매번 후회를 하면서도 또 같은 잘못을 저지른다. 스님들에게도 고향을 묻는 필자, 얼마나 어리석고 못났는가? 그러나 묻지 않을 수 없다. 인간에게 태어난 공간은 그냥 공간이 아니다. 더구나 나고 자란 곳은 이미 공간이 아니다. 어쩌면 그것은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 준 부모보다 더 지울 수 없는 지고의 본향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또 물었다.
"부처님 외에, 금오 스님 외에 또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물어보면서도 우스운 물음.
두 사람이 웃는다.
"그전엔 부처님 때문에 만났고, 지금은 차로 엮어갑니다."
이렇게 장회장은 말만 떨어지면 윤대표 얘기다. 그도 그럴 것이 윤대표는 20여 년 이상 올곧이 차 묘목 연구에 인생을 바쳐 지금은 새롭게 개발한 차종만 2-30여 개 종이 넘는단다. 우리나라에는 하동과 보성 지역에서만 자란다고 알려진 차는 기실 그전엔 엄연 지금보다 훨씬 북방에도 살고 있었단다. 그 명맥이 끊어진 것은 일제시대. 그나마 몇 개 내려오던 차 관련 서적들도 몽땅 사라져버린 것. 일제는 그렇게 악독했다. 우리와 관련된 작은 하나의 불씨마저 지워버렸다.
"남녘의 묘목을 구해 이곳 산지에 심으면 몇 백은 죽고, 겨우 한두 개 겨울을 이기고 삽니다. 이 차밭은 그걸 키우고 되살린 것입니다. 그래서 오랜 세월이 걸렸습니다. 이제 제가 있음으로 가평까지도 차밭을 가꿀 수 있습니다."
멋지다. 저런 자신감이 우리 차를 되찾았다.
"세계의 차 종주국. 우리의 위상을 반드시 찾고자 합니다. 사실 중국이나 일본은 차 종주국이 아닙니다."
아름답다.
그래서 몇 살 어린 윤대표를 바라보는 장회장의 눈빛은 그윽하다. 안쓰러움, 그리고 대견함. 분명 장회장은 적지 않게 드는 차밭의 생성 비용을 넉넉하게 지원하지 못하는 미안함을 갖고 있다. 여태의 그 신산노고(辛酸勞苦)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나누는 그 중간중간. 차를 덖기 위해 들락거리는 윤대표의 얼굴이 이번엔 얼핏 비에 젖은 산딸기처럼 곱다. 결국 무서운 것은 우악함이 아니다. 결국 무서운 것은 저 천진한 웃음이다. 억셈이 아니라 기다림이다. 윤대표와 장회장은 기다릴 줄 아는 소천차밭, 진불제자다. 서두르지 않음, 그러나 우리 차를 새롭게 창성하고야 말겠다는 의지는 각화산 바위만큼 굳고 올곧다. 하여 장회장은 덧붙인다.
"몸이 아파 다 죽어가는 윤대표가 부처님을 만나 다시 살아났듯이, 다 죽어가는 우리 차가 윤대표를 만나 다시 살아나고 있습니다."
다산.
설매.
조양.
벽안.
습득.
한산.
환하다.
밝다.
명확하다.
한 땀 한 땀, 차에 붙인 이름들이 아름답다. 모두 그 의미가 깊다.
문득 금오 스님의 게송이 떠오른다.
透出十方界
無無無亦無
個個只此爾
覓本亦無無
시방세계를 투철하고 나니,
없고 없어서 없는 것 또한 없다.
하나하나 모두 그러하기에
뿌리를 찾아봐도 또한 없고 없을 뿐이다.
하여 진불제자 <윤여목과 장채향>의 웃음은 웃음이 아니다. 그들은 차를 매개로 하여 지금 용맹정진 중이다. 가열찬 수행을 하고 있다. 지난 시간처럼, 앞으로의 시간도 길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믿는다. 그들이, 그들이 만든 차나무로, 그들이 만든 차를 달여 부처님께 공양할 수 있는 특별한? 날이 반드시 오리라는 것을.
불자 모두가 알고 있듯, 마음은 마치 여의주 같아서 모든 것이 마음먹은 대로 된다. 마음만 깨끗하게 한다면 근심 걱정과 일체의 고통을 여윌 수 있다. 천상천하를 찾아보아도 마음은 자취가 없으나 홀연히 깨달으면 보지 못한 한 물건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마음을 깨달으면 마음이 도가 된다. 그들에게 도는 당분간 차가 될 것 같다.
"바라기는 윤대표와 제가 그전 함께 책을 만들었듯이 이제는 차를 만들어가려 합니다. 천천히!"
어느새 비 그친 차밭을 안개가 안개를 덮었다. 그 안개 위로 다시 구름이 둥둥 떠간다. 또다시 물음이 물음을 덮는다.
도대체 여기는 어디인가?
직접 구운 빵을 시식하고 가라는 미덕을 뿌리쳤다. 조용한 그들의 일상을 너무 뺏었기 때문이다.
"한번 다시 오겠습니다."
"그렇게 쉽지 않을 겁니다."
허언일침(虛言一針).
마지막 인사까지 어리석은 필자.
그래서 되뇌인다.
마음의 주인공아, 내가 너를 알면 성인이 되지만 너를 알지 못하면 범부가 되어 생사의 바다에 빠져 모든 고통을 겪을 것이다. 나를 모르고 산다는 것은 혼이 흩어지지 않았으되 죽은 사람이요, 눈은 떴으되 눈 뜬 장님인 것이다. 모든 죄는 내가 나를 모르는 대서 생기는 것이다. 나를 찾았을 때 이러한 죄와 속박이 풀려진다.
손을 흔드는 그들의 앞 모습.
눈물이 많지도 않은 데, 안경에 안개가 낀다. 그 안개 위로 조용한 슬픔이 돈다. 우리 모두는 거리에서 만났다가, 거리에서 헤어진다. 별과 별과의 거리처럼 아득하지만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언제나 떠나는 뒷모습은 아름다워야 한다.
"오늘 꼭 신선들을 만나고 온 것 같아요. 그런데......."
역시 우리 강인대 면장님은 면장님이다. 말끝을 흐리는 그의 표정엔 두 사람의 걱정이 스며있다. 파악 제일! 그 짧은 시간에 차밭농원의 현실을 직시한 것이다. 하기야 공무원이라는 바퀴에 매달려 쉼 없이 달려온 인생, 아무도 말하지 않아도 그의 눈앞엔 호랑이보다 무서운 현실이 보였을 것이다.
하여 온갖 상념의 뒷꼭지에 두고 온 소천차밭,
산에 있으나 아랫마을에 있으나 현실이 두려운 것은 마찬가지. 정말로 그들이 아랫마을을 잊고 차에만, 그리고 부처님 말씀만을 의지하고 살 수 있다면, 안개비 차창 내내 그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바야흐로 우리 집 마당에 활짝 피어 있는 송엽국(松葉菊) 꽃잎 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