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종칼럼11

서울시 성북구 성북 2동 126-20번지 한갓진 골목에 자리한 ‘최순우 옛집’은 하루에도 수백 명이 넘는 방문객들로 붐빈다. 인근에 소재한 혜원 신윤복, 단원 김홍도 그림 등 국립중앙박물관에 버금가는 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는 간송미술관과 독립운동가 만해 한용운 스님이 머물렀던 심우장을 보러온 사람들이, 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의 ‘시민문화유산 1호’로 보존된 이곳을 찾는 빈도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 집의 사랑방은 최순우 선생의 명저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가 집필된 방이어서 특별히 사람들의 눈길을 머물게 한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는 최순우 선생의 전집에서 주옥같은 글을 추려내 엮은 단행본이다. 회화, 도자, 조각, 건축 등 한국 미술의 전 영역에 걸쳐 작품의 면면을 더듬고, 군더더기 없는 아름다움을 그린 120여 편의 글이 꾸준히 눈 밝은 독자를 찾아갔다. 이 책은 28년 전 초판 출간 이래 50만 부가 나갔고,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았다. 무량수전이 있는 영주 부석사를 찾아온 탐방객 중 상당수는 이 책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은 이들이다. 영주 부석사는 물론이고, 한국불교계가 두고두고 최순우 선생에게 고마움을 잊지 않아야 하는 이유다. 

‘한국미 전도사’로 일컬어지는 혜곡 최순우(兮谷 崔淳雨, 1916~1984) 선생. 그는 한국 미술사학과 미술평론의 토대를 다진 우리 문화사의 거목으로 평가된다. 그는 우리 미술과 문화재에 대한 깊은 사랑에다 빼어난 안목과 유려한 문장을 겸비했고, 이 땅이 순산한 아름다움을 성심으로 보듬어 안은 ‘정 깊은 감식안’이었다. 그는 1916년 개성에서 태어나 1943년 개성 부립박물관에 들어간 뒤 40년 동안 한결같이 ‘박물관 인생’으로 살았다. 1984년 작고할 때까지 10년 동안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역임하며 ‘한국미술 5천년전’ 등의 대형 해외 전시를 통해 우리 미술을 만방에 퍼뜨리기도 했다.

그러나 선생의 명성을 세상에 널리 알린 것은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라는 책 한 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홍준(전 문화재청장), 이태호(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명예교수), 이원복(전 국립전주박물관장) 등 후학들은 혜곡 선생의 기막힌 문장에 반해 미술사의 길을 걷는 행복을 함께 누린 사람들로 알려져 있다.

최순우 선생은 부석사의 ‘무량수전’을 일러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고 썼다. 부석사에 간 관광객들이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 기념사진을 찍는 모습은 지금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광경이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는 우리 것을 아끼는 모두가 여전히 기대서고픈 기둥인 것이다. 이 책에 실린 무량수전 편 전문을 옮겨보면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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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한낮, 스님도 마을 사람도 인기척이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 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이 젖고 있다. 

무량수전, 안양문, 조사당, 응향각들이 마치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 

무량수전은 고려중기의 건축이지만 우리 민족이 보존해온 목조건축 중에서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오래된 건축임이 틀림없다. 

기둥높이와 굵기, 사뿐히 고개를 든 지붕추녀의 곡선과 그 기둥이 주는 조화. 간결하면서도 역학적이며 기능에 충실한 주심포의 아름다움. 이것은 꼭 갖출 것만을 갖춘 필요이며 문창살 하나 문지방 하나에도 나타나 있는 비례의 상쾌함이 이를 때가 없다.  

멀찍이서 바라봐도 가까이서 쓰다듬어 봐도 무량수전은 의젓하고 너그러운 자태이며 근시안적인 신경질이나 거드름이 없다. 

무량수전이 지니고 있는 이러한 지체야말로 석굴암 건축이나 불국사 돌계단의 구조와 함께 우리 건축이 지니는 참멋, 즉 조상들의 안목과 그 미덕이 어떠하다는 실증을 보여주는 본보기라고 할 수밖에 없다. 

무량수전 앞 안양문에 올라앉아 먼산을 바라보면 산 뒤에 또 산, 그 뒤에 또 산마루, 눈길이 가는 데까지 그림보다 더 곱게 겹쳐진 능선들이 모두 이 무량수전을 향해 마련된 듯싶어진다. 

이 대자연 속에 이렇게 아늑하고도 눈 맛이 시원한 시야를 터줄 줄 아는 한국인, 높지도 얕지도 않은 이 자리를 점지해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한층 그윽하게 빛내주고 부처님의 믿음을 더욱 숭엄한 아름다움으로 이끌어 줄 수 있었던 뛰어난 안목의 소유자 그 한국인. 지금 우리의 머릿속에 빙빙 도는 그 큰 이름은 부석사의 창건주 의상대사이다. 

이 무량수전 앞에서부터 당간지주가 서 있는 절 밖, 그 넓은 터전을 여러 층 단으로 닦으면서 그 마무리로 쌓아놓은 긴 석축들이 각기 다른 각도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마도 먼 안산이 지니는 겹겹한 능선의 각도와 조화시키기 위해 풍수사상에서 계산된 계획일수도 있을 것이다. 

이 석축들의 짜임새를 바라보고 있으면 신라나 고려 사람들이 지녔던 자연과 건축물의 조화에 대한 생각을 알 수 있을 것 같고, 그것은 “순리의 아름다움”이라고 이름 짓고 싶다.  

아마 한국 성인 중에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라는 책 제목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무량수전이 무엇인지, 배흘림기둥은 어떻게 생겼는지, 사찰에서 바라다보는 경관이 그렇게 아름다운 것인지, 숱한 사람들은 이 책을 통해 자신의 안목과 인문학적 소양을 넓히고 높였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최순우 선생이 배흘림기둥에 기대섰던 인연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하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그런데 앞으로는 배흘림기둥에 맘 편히 기대서지 못하는 황당한 일이 벌어질 지도 모른다. 등산길 옆 폐사지의 주춧돌에 대통령 부부가 잠시 앉아 쉰 것을 두고 한국불교 장자종단인 조계종이 비판성명을 낸 일이 얼마 전에 있었기 때문이다. 방치된 주춧돌에 앉은 것에도 이런 비판을 쏟아냈는데, 국보 건축물을 받치고 있는 주춧돌 위에 선 기둥에 기대섰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와 관련 경향신문 도재기 논설위원이 조계종의 편협함을 꾸짖는 칼럼을 게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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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악산 법흥사지 주춧돌을 둘러싸고 조계종의 편협함을 꼬집는 말들이 나온다. 문재인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가 청와대 뒤 북악산 남측면을 개방하면서 일행과 산행 도중 법흥사지 초석에 앉은 것을 두고 조계종이 비판 성명을 내면서다. 조계종은 “천박한 인식이 드러났다”며 박수현 청와대 국민소통수석과 김현모 문화재청장 사퇴를 요구했다. 그러자 영담 스님은 “주춧돌을 만나시거든 잠시 앉아 쉬셔도 괜찮다. 쉬시면서 먼 산 구름도 보시고 빈 절터 무상한 이치도 깨달으시라”며 “부처님도 좋아하실 것”이라고 했다. 불교계 안팎에서 쓴소리가 잇따르면서, 자승 전 총무원장이 폐사지 발굴 현장의 돌을 밟고 선 사진이 나돌기도 한다.

조계종은 최근 갖가지 일로 구설수의 도마에 올랐다. 대선을 앞두고 연 전국승려대회, 종단개혁을 강조한 스님들의 무더기 징계, 조계종 노조 탄압 의혹 등이 대표적이다. 자승 스님을 둘러싼 ‘실세’ ‘상왕’ 논란도 계속된다. ‘상구보리 하화중생’(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함)을 거론하기도 민망하다. 편협함, 유치함을 넘어선 부처님의 너른 품이 그립다. - 4.10.자 ‘여적’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말이 있다. <논어> ‘선진편’에 나오는 말로,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는 뜻이다. 이 말의 유래는 이렇다. 어느 날, 자공(子貢)이 공자에게 “사(師:子張의 이름)와 상(商:子夏의 이름)은 어느 쪽이 어집니까?”라고 묻자, 공자는 “사는 지나치고 상은 미치지 못한다”고 대답했고, “그럼 사가 낫단 말씀입니까?” 하고 반문하자, 공자는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過猶不及)”고 말했다는 것이다. 

조계종이라는 오래되고, 거대한 종단이 어떤 사안에 대해 입장을 낼 때는 신중해야 한다. 그 대상이 큰 영향력을 가졌을 경우에는 더 더욱 그렇다. 그만큼 역풍이 크기 때문이다. 이미 민망, 편협, 유치 등의 뼈아픈 질책을 받았지만, 또다시 이런 행보를 반복한다면 정말로 어리석은 집단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지금이라도 신중치 못한 입장을 발표했던 것을 공식 철회하는 용기를 보였으면 좋겠다. 사과를 할 수 있다면 더더욱 좋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