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암스님의 선지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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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혜암은 또다시 선지식을 찾아 나섰다. 범어사에서 하안거를 난 뒤 지체 없이 통도사 극락암으로 갔다. 극락암에는 경봉 조실스님이 주석하고 있었다. 당시 경봉은 산철이 되면 서울 선학원을 오가며 대중들에게 보조국사의 <수심결>이나 <금강경> 등을 법문하며 통도사 제일의 선지식으로 칭송받고 있었다. 

 혜암은 극락암 게시판에 붙여 놓은 경봉의 시를 읽었다. 하안거 해제 날을 맞이하여 안거를 무사히 마친 대중들에게 부치는 시였다. 시를 음미하면서 자신이 공부한 바를 점검해 보라는 이른바 게송이었다. 

 시를 읽는 동안 가랑비가 내렸다. 우산이 없던 혜암에게는 그나마 다행이었다. 통도사 입구인 신평 버스정류장에서 내린 혜암은 영축산에 짙은 비구름이 낀 것을 보고는 잰걸음으로 극락암에 이르렀던 것이다.

 총림문은 비스듬히 열렸는데

 콸콸 물소리 근원 찾아 흐르네

 원컨대 중생과 고락을 같이 하리

 마음이 공하니 모든 법 말할 게 없네

 바람이 화창하니 구름 그림자 뜰에 깃들고

 가을 달빛은 옛집에 가득한데

 우습다, 석 달 동안 무슨 일 으뜸인가

 목마르면 차 마시고 곤하면 잠자며 묵묵한 것일세.

 가랑비가 마른 땅을 적시는 것처럼 경봉의 시는 혜암의 가슴을 젖게 했다. 특히 마지막 행인 ‘목마르면 차 마시고 곤하면 잠자며’라는 구절은 무심하면 도와 계합한다는 무심합도(無心合道)라는 선어를 연상케 했다.

 혜암은 경봉을 친견하기 위해 원주스님을 찾았다. 그러나 해제 뒤끝인 탓에 선방은 텅 비어 있었고, 대중들은 보이지 않았다. 혜암은 할 수 없이 공양간으로 들어가 공양주보살에게 물었다.

 “보살님, 경봉 큰스님을 뵈러 왔습니다.”

 “시님들 모두 감나무 심을라꼬 뒷밭에 갔십니더. 

 보살의 말대로 경봉은 뒷밭에서 스님 두어 명을 데리고 어린 감나무를 옮겨 심고 있었다. 시자인 듯한 젊은 스님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큰스님, 지금 감나무를 심어 언제 감을 따시겠습니까.”

 경봉의 나이를 감안해 볼 때 헛수고가 아니겠느냐는 말이었다. 그러나 경봉은 시자의 말을 흘려들으며 말했다. 

 “너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큰스님께서 이 감나무의 감을 따 잡수시고 싶어 심는 것이 아니란 말씀입니까.”

 “이놈아, 내가 어릴 때부터 따먹은 감나무는 옛날 사람들이 심은 것이다. 내가 심은 감나무가 아니란 말이다. 이치가 이러하니 내가 지금 감나무를 심어놓으면 반드시 뒷사람들이 나처럼 감을 따먹을 것이 아니겠느냐.”

 혜암은 가슴을 뭉클하게 얘기하는 50대 중반의 경봉 앞으로 가 합장을 했다. 그런 다음 혜암도 삽을 들고 이식하지 못한 감나무 한 그루를 심기 위해 구덩이를 팠다. 가랑비에 젖은 흙은 부드러웠다. 흙 속에서 굼벵이가 꼬무락거렸다. 농장에서 가져온 어린 감나무들도 가랑비에 젖어 싱싱했다.

 일은 한 식경쯤 지나서 끝났다. 혜암은 손발을 씻고 경봉이 거처하는 삼소굴로 들어가 삼배를 올렸다. 해제 철이었으므로 스님들이 경봉을 친견하기 위해 끊임없이 삼소굴로 찾아왔다.

 혜암은 아무 말 없이 삼소굴에 앉아 경봉과 객승 사이에 오가는 선문답의 매력에 빠졌다. 선문답은 가끔 전광석화처럼 불꽃이 튀었다. 한 수좌가 경봉에게 삼배를 올리고 안부를 묻더니 다짜고짜 대들었다.

 “조실스님, 어떤 것이 적멸이며 그 열쇠는 어디 있습니까.”    

 “수좌가 있는 곳에 문은 몇 개이며 그 열쇠는 어디에 두었는가. 자기가 있는 집이니 모를 리가 없을 테지. 적멸은 바로 그대이며 열쇠는 바로 그대가 가지고 있지 않는가.”

 얼굴에 솜털이 보송보송한 어린 스님이 묻기도 했다.   

 “큰스님, 무엇이 진리입니꺼.”

 “너는 어디서 왔느냐.”

 “부산에서 왔십니더.”

 “멀리서 왔구나. 여기까지 몇 걸음에 왔는가.”

 어린 스님은 말문이 막혀 얼굴이 붉어졌다. 그렇다고 삼소굴의 분위기가 딱딱하고 엄숙한 것만은 아니었다. 웃음보가 터지기도 했다. 한 수좌가 짓궂은 질문을 했다.

 “큰스님, 여자를 가져 보신 적이 있습니까.”

 “하하하. 아직도 수좌는 남녀 구별이 있구나. 욕망과 애정이 마음속에 가득할 때 여자를 소유하고 싶어지는 것이야. 그래서 날마다 간음하고 살지. 나는 날마다 여자와 잠을 잔대도 애욕을 일으키지 않을 자신이 있다.”

 경봉이 먼저 질문할 때도 많았다.

 “여기 극락에는 길이 없는데 어찌 왔는가.”

 “큰스님께서는 극락에 길이 있다고 보십니까.”

 “길이 없는데 어찌 극락으로 가겠는가.”

 “부처가 누구입니까.”

 “묻는 수좌야말로 신여래(新如來)가 아닌가.”

 수좌가 고개를 떨어뜨리며 합장했다.

 “큰스님, 빈손으로 와서 미안합니다. 참으로 죄송합니다.”

 “그래, 미안한 마음이 있거든 내려놓아도 좋을 것이야.”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았는데 무엇을 내려놓으란 말씀이십니까.”

 “하하하. 그럼 계속 들고 있게나.”

 경봉이 파안대소를 하자 삼소굴에 모인 좌중의 스님들도 모두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혜암은 삼소굴을 나오려 할 때쯤 소름이 오싹 돋았다. 경봉이 한 구참 수좌에게 묻고 있었다.

 “요즘 어떻게 지냈는가.”

 “한 소식을 얻었습니다. 노장님께서는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좌중의 스님들이 긴장했다. 수좌가 자신도 한 소식 했으니 인정해달라는 투로 도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디 손바닥을 내놓아 보거라.”

 수좌가 손바닥을 내놓자 경봉이 자신의 손바닥을 치며 말했다.

 “방금 소리 난 그놈을 잡아오라.”

 수좌가 대답을 못하자 경봉이 소리쳤다.

 “밥도둑 놈아!”

 “부처가 무엇입니까.”

 경봉은 대답 대신에 옆에 있던 주장자를 들고는 수좌의 머리통을 쳤다. 그러자 수좌가 혼비백산하여 삼소굴 밖으로 도망쳤다. 혜암은 공연히 부끄럽고 죄송한 마음이 들어 슬그머니 일어섰다.

 “큰스님, 가겠습니다.”

 “어디로.”

 “해인사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러지 말고 한나절이면 걸어갈 수 있으니 천성산 내원암으로 가봐. 거기 가면 빈 암자가 있으니 비구니 주지스님에게 내 말을 하고 산철 동안 공부하게나.”

 “내원암은 어디로 갑니까.”

 “스스로 물어서 가봐.”

 혜암은 삼배를 하고 물러났다. 후에 안 일이지만 경봉은 내원암 선방의 조실까지 맡고 있었다. 극락암에서 주로 살되 결제나 해제 무렵이 되면 내원암으로 가 법문을 해주었으므로 그곳의 사정을 환히 알고 있었다.

 다행히 가랑비는 그쳐 있었다. 영축산 너머의 하늘이 파랗게 조금 뚫려 있었다. 혜암은 서둘러 걸었다. 경봉이 빈 암자를 소개해 주니 다소 흥분도 되었다. 동안거 방부를 들이는 가을까지는 암자에서 혼자 정진하리라고 결심했다. 

 혜암은 신평을 거쳐 양산 쪽으로 난 신작로를 따라 내려갔다. 멀리 비구름에 잠겨 있는 천성산 봉우리가 보였다. 방금 비가 내렸다고는 하지만 한여름이라 금세 땀이 났다. 혜암은 땀을 닦으며 천성산을 향해 쉬지 않고 걸었다.

 오후 늦게 내원암에 도착했지만 절에서 자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내원암은 비구니 스님들이 수행하는 도량이었다. 혜암은 절에서 지체하지 않고 바로 경봉이 천거한 암자로 가고 싶었다. 극락암에서 경봉 조실스님을 뵙고 왔다고 말하자, 주지가 흔쾌하게 허락했다.

 “스님, 공양은 절로 내려와 하셔도 됩니다.”

 암자는 내원암 맞은편 산등성이 너머에 있었다. 계곡물은 상쾌하게 소리치며 흘렀다. 계곡물을 보자, 극락암에서 보았던 경봉의 선시 한 구절이 떠올랐다.

 콸콸 물소리 근원을 찾아 흐르네.

 수행자가 자기 자신을 찾아 정진하듯 계곡물도 근원을 얻으려고 소리치며 흐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불가에서 진리를 말하는 법(法)이란 글자는 ‘물(水)이 흘러가는(去)’ 것이었다. 암자 부엌에는 양식과 반찬거리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암자가 비어 있다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혜암은 당장 일과표를 짰다. 퇴설당에서 정진한 것과 똑같이 하루를 보내려고 했다. 비록 내원암 산내 암자지만 혜암은 퇴설당이라 여기고 정진을 시작했다. 하루 한 끼만 먹으니 부엌의 양식이면 적어도 산철은 보낼 수 있었다.

 밤이 되자 거센 바람이 불며 굵은 빗방울이 떨어졌다. 나무들이 뽑힐 듯 휘청거렸다. 태풍이 곧 다가올 징조였다. 이틀 후에는 내원암을 건너갈 수 없을 정도로 계곡물이 불어 넘쳐흘렀다. 그러나 혜암은 내원암을 내려갈 생각이 없었으므로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결코 암자 울타리 밖으로 나가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 

 태풍이 지나가자, 약초꾼이나 나무꾼마저 얼씬거리지 않았다. 암자 앞으로 난 산길은 천성산 화엄벌을 넘어 척판암으로 가는 지름길이었던 것이다. 비는 태풍이 지나간 뒤에도 계속 내렸다. 또 다른 태풍이 지나갈 조짐으로 드문 일이었다. 혜암은 암자에 섬처럼 고립됐다. 이따금 산짐승들이 나타날 때면 신경이 곤두섰다. 

 그러던 어느 날 암자 밖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인은 비를 맞아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다. 여인은 내원암에 기도하러 온 여인 같기도 했다.

 “스님, 비가 와 더 못 가겠습니다. 하룻밤 머물게 해주십시오.”

 혜암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곳은 비구 홀로 수행하는 처소이니 여인네가 머물 곳이 못 되오.”

 그러나 여인은 혜암을 은근히 유혹하는 모습을 보였다. 비에 젖은 옷이 흘러내리자 맨살이 드러났다. 혜암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네가 지금 옷을 홀라당 벗고서 내 자지를 만진다고 하더라도 나는 조금도 끄덕하지 않을 것이다. 어서 썩 물러가라.”

 혜암의 시퍼런 기상에 놀란 여인이 뒷걸음질 쳤다. 그러더니 산자락 아래로 도망쳐버렸다. 그날 이후 혜암은 색마에서 벗어나는 데 힘을 얻었고, 여름 산철 동안 무사히 정진한 뒤 가을에 해인사로 돌아갔다. 

 훗날 혜암은 재가신도들에게 내원암 암자에서 겪은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자신은 수마와 색마를 완전하게 물리친 사람이라고 말하곤 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