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암스님의 정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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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혜암은 보문이 시킨 대로 조실채로 가 한암에게 절만하고 나왔다. 과연 한암은 혜암이 절을 하자, 몸을 반쯤 구부려 인사를 받을 뿐 은사가 누구인지 어느 절에서 왔는지 묻지 않았다. 혜암이 “방부 들이러 왔습니다.” 하고 말하자 “그러시게.” 하고 대답만 짧게 하면서 입을 다물어버렸다.

 혜암은 소임을 짜는 날 아침저녁으로 범종을 타종하는 종두(鐘頭)를 맡았다. 다른 대중들과 달리 혜암은 잠을 자지 않았으므로 한암의 눈에 금세 띄었다. 그렇다고 한암은 드러내놓고 혜암을 칭찬하지는 않았다.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미소만 지었다.

 ‘조실스님의 가풍은 참 독특하구나.’

 혜암은 한암의 고지식한 가풍이 마음에 와닿았다. 해인사의 어떤 스님보다 더 고풍스러웠다. 한암은 아침에 일어나 행건을 치면 잘 때만 풀었다. 다른 절에서 온 수좌들이 행건을 치지 말라고 해도 소용없었다.

 “노장님, 행건을 치면 각기병이 생길 수 있으니 푸시는 게 좋습니다.”

 “옛날 스님들이 행건을 친 데는 덮어놓고 한 것이 아니라 분명한 이유가 있어. 이것도 선왕지법(先王之法)이네.”

 한암은 고풍을 절대로 버리는 법이 없었다. 예불도 아침저녁으로 각단 예불을 다 했다. 수좌들 모두가 선방에서 죽비로 3배 하며 예불을 대신하지만 한암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정성껏 예불에 참여했다. 그러니 대중들은 예불할 때가 되면 한암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했다. 어느 날인가는 한암이 정랑을 갔다가 늦게 오는 바람에 대중이 먼저 예불을 올렸다가 스님의 지시로 다시 한 적도 있었다. 그때 한암은 대중들에게 중국의 대혜선사의 예를 들었다. 대혜는 조실스님으로서 1700여 명의 대중과 함께 살았는데, 예불과 울력 두 가지만은 한 번도 빠뜨리지 않고 살았다는 것이었다.

 한암도 울력에 빠지지 않았다. 채소 기르기, 감자 심고 캐기, 꿀밤 손질 등등 무슨 울력이든 손을 보탰다. 공양간에서 콩나물 다듬을 때도 반드시 나와 살폈다. 대가리 한 개 함부로 버리지 못하게 했고, 채공이 썩은 콩나물이라 하여 소홀하게 다루면 질색을 했다.    

 공양은 아주 적게 아침에는 죽, 낮에는 밥으로 두 끼만 했다. 공양할 때는 감사하게 받을 뿐 일체 말이 없었다. 질다 되다, 짜다 싱겁다, 맛있다 맛없다 등등 조실스님이라 하여 나서서 말하지 않고 묵묵히 공양할 뿐이었다.

 한암은 잠을 잘 때만 조실채로 가고 새벽 3시부터 밤 9시까지 선방을 지켰다. 참선하는 수좌들과 함께 꼿꼿하게 앉아서 보냈다. 그러니 아무도 발을 뻗거나 허리를 벽에 기대지 못했다. 지대방도 아예 없기 때문에 고참이건 신참이건 수좌들은 선방에서 오로지 참선만 해야 했다. 힘들면 밖으로 나가 포행하면서 긴장을 푸는 것이 고작이었다.

 한암의 신조는 ‘군자는 꿋꿋하여 쉬지 않는다(君子健健不息)’였다. 한 철을 상원사 선방에서 어떻게 날까 하고 지레 겁을 먹는 대중에게 한암은 곧잘 중국의 노조(魯祖)선사를 예로 들었다. 노조선사는 납자들이 찾아오면 ‘한 길을 말하는 것은 한 자를 가는 것만 못하다(說得一丈不如行得一尺)’며 벽을 보고 돌아앉았는데, 말해서 무엇을 얻기보다는 묵묵히 좌선하라는 노조선사의 가풍이 그랬던 것이다. 

 점심공양 후에는 대중들이 선방에 빙 둘러앉아 마가목차를 마셨다. 오대산에 자생하는 마가목으로 만든 마가목차의 맛은 텁텁했다. 한암은 차 마시는 시간을 이용해 법문을 했고, 대중들은 막사발에 담긴 마가목차를 들면서 귀를 기울였다. 한암이 굳이 차 마시는 시간을 이용하여 <사집(四集)>이나 <법화경>, <금강경>, <기신론>, <원각경> 등을 인용하여 법문했던 것은 당시만 해도 수좌들이 한문에 능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경전이나 선문어록을 능숙하게 볼 수 있는 수좌들이 드물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한암이 수좌들에게 경을 보라고 권하지는 않았다. 다만 수좌들에게 두 가지를 당부할 뿐이었다.

 “한 가지는 수좌라도 불공을 익혀서 마지 올리고 내리는 법은 알아야 한다. 또 한 가지는 비록 참선이란 스스로 지어가는 것이지만 불조의 어록을 혼자 뜯어볼 정도의 글 힘은 있어야 한다.” 

 그래도 선을 우선하는 입장에는 변함이 없었다. 한암은 교를 버리고 선에 드는 사교입선(捨敎入禪)보다는 입선입교(入禪入敎)를 강조했다. “선을 해서 이치를 통하고 나면 경 보기는 어렵지 않다. 서두르지 말고 선에만 힘을 써라. 뜻을 얻으면 글은 저절로 알게 된다.”고 당부했던 것이다.

 혜암은 상원사 선방에 입실한 뒤 처음 얼마간은 한암과 단 한 마디도 나누지 못했다. 한암은 누구라도 먼저 묻지 않으면 침묵으로 일관했다. 참선 중에 보기에 딱할 정도로 꾸벅꾸벅 조는 수좌가 있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차 마시는 시간이 되어서야 참선 중 졸면 안 된다고 조용히 타이를 뿐이었다.

 “참선의 병은 혼침과 도거(掉擧)다. 혼침은 혼혼한 졸음에 빠지는 것이고 도거는 망상이다.”

 처음으로 찾아오는 신도에게도 무심하게 대했다. 신도가 절을 하면 스님도 맞절을 하면서 인사를 받을 뿐, 담소를 나누는 일이 없었다. 종단 일이나 저잣거리의 일이나 묻지 않았다. 서울에서 온 신도가 귀한 선물을 내놓아도 고맙다는 말조차 하지 않고 오직 마음속의 도(道)만 바라보았다.

 간혹 신도들이 적멸보궁에 기도하러 와서 한암에게 돈이 든 봉투를 놓고 가는데, 스님은 아무 데나 두었다가 수좌들이 떠날 때 노자로 나누어 주어버렸다. 시자가 몰래 월정거리로 나가 그 돈으로 떡을 사 먹어도 눈치를 채지 못했다.

 혜암은 비록 한암과 차 마시는 시간 이외에는 단 한 마디도 나누지 못했지만 스님의 모습이 더없이 좋았다. 중노릇을 하면서 두고두고 닮고 싶은 분이 한암이었다. 본분종사의 품격이란 바로 저런 모습이구나, 하고 마음에 새겼다.

 ‘이번 철에 공부를 마쳐버리자!’

 혜암은 신심을 내어 화두를 들었다. 장좌불와도 혼자서 계속 밀고 나갔다. 그러자 어느 날 한암이 나직이 불러 말했다.

 “잠 좀 자고 공부하지 그런가.”

 “조실스님, 잠자는 시간이 아깝습니다.”

 “그럴 테지. 금생에 마음 밝히지 못하면 한 방울의 물도 소화하기 어렵다고 했어.”

 “조실스님 회상에서 반드시 마치고 말겠습니다.”

 “한밤중에는 공기가 차니 마가목차를 자주 마시게.”

 마가목차는 찬 공기에 약해지는 기관지를 보호하는 데 특효가 있었다. 마가목의 열매와 잎을 달인 물을 장복하면 가래나 천식을 예방할 수 있었다. 오대산 화전민들 사이에 전해오던 민간요법을 이제는 상원사 선방 수좌들이 잇고 있는 셈이었다.

 한암이 던진 한 마디는 혜암에게 천근의 무게로 받아들여졌다. 신심을 솟구치게 했다. 무자화두가 더없이 잘 들렸다. 졸음이 만 리 밖으로 달아났다. 새벽마다 범종을 칠 때도 화두가 성성했다. 

 하루는 혜암이 새벽범종을 치는데 타종 소리가 일정치 않았다. 그러자 대중들이 마당으로 나와 모였다. 일정한 간격으로 타종해야 하는데 불규칙했다. 대중들이 어둑한 마당에서 수군거렸다.

 “혜암 수좌가 졸고 있군.”

 “서 있는 자세가 바른 것을 보니 졸고 있지는 않은 것 같소.”

 “고르게 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면 조는 게 틀림없어요.”

 “간격은 일정치 않지만 범종소리가 힘차지 않소. 졸고 있는 사람이 어찌 저렇게 큰 소리를 낸단 말이오.”

 이윽고 한암도 마당으로 나와 묵묵히 타종 소리를 들었다. 한암은 무어라 말하지 않고 미소만 지었다. 그러더니 대중들을 선방으로 불러들였다. 대중들은 공사를 벌이는가 싶어 좌선하는 자기 자리에 앉았다.

 범종소리는 여전히 불규칙하고 아주 느린 속도로 들리고 있었다. 정상적으로 친다면 이미 28번의 타종 소리가 끝나고 웅- 하는 여운만 남아 있어야 했다. 한암이 옆에 앉은 한 수좌에게 물었다.

 “종두가 종을 잘 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닙니다.”

 “왜 그런가.”

 “소리가 일정치 않으니 여법하지 못합니다.”

 한암이 앉은 채 몸을 좌우로 흔들며 다른 수좌에게도 물었다.

 “종두는 공부를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닙니다.”

 “왜 그런가.”

 “대중의 마음을 편하게 하지 못하고 놀라게 했습니다.”

 범종 하나 치지 못하는 수좌이니 공부도 잘하지 못할 것이라는 대답이었다. 그러나 한암은 수좌들의 의표를 찌르듯 말했다.

 “종두는 종을 제일 잘 치는 수좌이다. 소리가 일정치 않은 것이야말로 참으로 공부하는 납자의 솜씨다.”

 한 수좌가 볼멘소리로 물었다.

 “조실스님, 대중의 마음을 편하게 하지 못하고 놀라게 했는데 어찌 공부 잘하는 납자라 하십니까.”

 “혜암 수좌는 지금 화두일념에 들었느니라. 공부하는 수좌의 모습이 저러해야 하거늘 내가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한암이 크게 소리 내어 웃고 난 뒤에야 대중들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타종 사건이 있은 후, 혜암은 신참인데도 단박에 선방의 화제 인물이 됐다. 그러나 수행 방법이 특별히 달라진 것은 없었다. 종두 소임은 여전히 안거가 해제될 때까지 맡았고, 장좌불와는 몸살이 나 오한이 든 날도 거르지 않고 지속했던 것이다.

 다만 점심 공양 후 차 마시는 시간이 따분할 때면 중대 암자를 거쳐 적멸보궁을 참배하곤 했다. 좌선으로 약해진 다리에 근력도 기를 겸 적멸보궁까지 오르내리는 일은 마가목차를 한 잔 하는 것보다 더 상쾌했다. 적멸보궁까지 화두를 들고 혼자 행선하면서 중국의 노조선사가 말한 ‘한 길 말하는 것이 한 자를 가느니만 못하다’는 뜻을 절감하곤 했다. 한 마디 법문을 듣기보다는 한 걸음을 걷는 것이 더 자신에게 유익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