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암 스님의 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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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초순(음력 3월 1일)에 해인사로 온 이후 세 번이나 출가를 거절당했다. 그럴수록 남영은 도 닦을 마음을 더욱 굳혔다. 자신이 정해 놓은 길을 가는데 누구도 막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남영은 걱정은커녕 천연덕스럽게 공양간 행자처럼 생활했다. 주지는 받아주지 않았지만 자신은 이미 해인사 행자라고 여겼다. 다만 주지에게 허락받지 못했으므로 방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공양은 공양간에서 한 끼만 했고, 잠은 나무청이나 공양간 같은 찬 데서 잠깐 잤다.

 3일째 되는 날이었다. 면식이 있는 단아한 스님이 보였다. 일본 교토의 임제종 절에서 뵌 적이 있는 서옹이었다. 남영은 스님에게 달려가 합장했다. 서옹은 양복 차림의 남영을 곧 알아보고는 놀랐다.

 “무슨 일인가. 해인사에 있다니.”

 “스님, 도 닦으려고 왔습니다.”   

 “그런가. 퇴설당에 계시는 인곡(麟谷) 스님을 소개시켜 주겠네.”

 남영은 바로 서옹을 따라 퇴설당으로 올라갔다. 서옹은 자신이 일본에서 남영에게 <금강경>을 주었던 일을 회상하면서 남영을 소개했다. 그러자 인곡이 남영에게 물었다.

 “어디서 왔는가.”

 육신이 태어난 고향을 묻는 말이 아니었다. 부모의 몸을 빌려 태어나기 이전의 고향, 본래자리(面目)를 묻는 말이었다. 남영은 <선관책진>을 보고 느낀 대로 대답했다. 선사들의 방식대로 크게 고함을 쳤다.

 “아악!”

 인곡은 남영이 선사 흉내를 낸다고 여겼는지 다시 미끼를 던졌다.

 “네 고향이 어딘가.”

 이번에도 남영은 속지 않았다. 인곡 스님이 묻는 의도를 알고는 손바닥으로 방바닥을 힘껏 쳤다. 그러자 인곡이 다시 물었다.

 “우리 집 소가 여물을 먹었는데 이웃집 말이 배탈이 났다. 천하의 명의를 불러서 말의 병을 고쳐달라고 했더니 아랫집 돼지의 넓적다리에 뜸을 떴다. 이 이치를 알겠느냐.”

 남영은 주먹을 앞으로 불쑥 내밀었다. 그제야 인곡이 미소를 지으며 남영의 머리를 만졌다. 세상의 유무정물이 연기(緣起)로 얽히어 있는 이치를 아느냐고 묻는 인곡의 질문에 남영은 그것들은 결국 한 몸이라고 주먹을 내밀어 답했던 것이다.  

 이후 남영은 정식으로 행자생활을 시작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장좌불와를 시작했다. 장좌불와란 하루 종일 단 한순간도 눕지 않고 정진하는 두타행 중에서 가장 지켜나가기 어려운 수행을 말했다. 하루 한 끼만 공양하는 오후불식(午後不食)의 수행도 이어갔다.

 훗날 장좌불와를 평생 동안 하여 유명해진 스님은 행자 때부터 장좌불와를 하게 된 동기를 다음과 같이 밝힌 적이 있는데, 출가 전에 이미 결심했던 것이 분명하다.

 -내가 평생을 장좌불와 한다고 말하면 상(相)을 내서 자랑하는 것처럼 되기 때문에 말하기가 거북해요. 허나 평생을 장좌불와 해왔으니 사실인즉 맞습니다. 요새도 자유자재로 하고 있어요. 장좌불와 하게 된 동기는 누가 시켜서 한 것이 아니고 일본에서 <선관책진>이란 책을 읽다가 장좌불와 하는 내용을 보았어요. 그때 나도 장좌불와 해야겠다고 다짐했고, 절에 들어와서 시작했습니다. 거기에 3일 5일 7일이면 견성한다고 기록해 놨기 때문에 여유 있게 일주일이면 깨치지 못할 것이 있겠나 하고 입지를 세웠어요. 화두는 효봉스님한테 탔지요.

 혜암은 공양주 소임을 보면서 조실스님인 효봉에게 ‘무(無)’자(字) 화두를 받았다. 아직은 행자 신분이었므로 혜암은 공양간을 선방 삼아 정진했다. 불구(佛具)를 닦을 때나, 밥을 지을 때나 늘 화두를 들었다. 

 가야산의 독한 모기들이 달려드는 여름철을 한결같이 밤새워 장좌불와를 하고 혼자서 참선하니 해인사 대중들 사이에 소문이 돌았다.

 ‘문수 관세음보살 화신이 나타나 가야총림을 도우러 왔다.’

 주지도 공양주 혜암을 신뢰하여 이제는 쌀 곳간의 열쇠를 간수하는 미감(米監)의 일까지 맡겼다.

 “밥도 잘 짓고 양도 잘 맞추니 앞으로는 쌀 창고 열쇠를 그대가 가지고 있게.”

 그러나 공양주 혜암은 주지의 칭찬을 한 귀로 흘렸다. 오직 화두를 타파하여 득도(得道) 할 생각뿐이었다. 가마솥에서 큰 주걱으로 밥을 풀 때도 ‘나는 도 닦으러 왔는데 딴 스님들 공양 준비만 해주다 시간을 다 흘려보내는구나.’ 하고 아쉬워했다. 

 마침내 혜암은 아침 공양을 준비하고 있던 중에 효봉의 상좌가 되기로 한 행자에게 부탁했다.

 “행자님, 내 배가 아프니 오늘 아침만 내 일을 좀 해주시오.”

 “걱정 마시오. 어서 가 쉬어요.”

 공양주 혜암은 행자에게 밥주걱을 넘겨주고는 백련암 뒤 환적대로 향했다. 백련암 뒷산에 환적선사가 깨쳤던 환적굴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던 것이다. 혜암은 유서 비슷한 글을 써 품에 넣었다.

 ‘일주일 안에 도를 깨치지 못하면 죽어도 좋다.’

 해인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암자가 백련암이었다. 혜암은 한 걸음에 백련암까지는 갔으나 암자 뒤에 있다는 환적굴은 찾지 못했다. 할 수 없이 그 부근에서 굴을 하나 발견하여 그곳으로 동면하는 짐승처럼 들어갔다.

 혜암은 산속에서 돌멩이 일곱 개를 구한 뒤 가부좌를 틀었다. 하루가 지나면 돌멩이 하나를 옆으로 옮겨 수행한 날짜를 헤아리기 위해서였다. 공양거리는 아무것도 없었다. 계곡으로 흐르는 물도 단 한 방울 마시지 않았다. 칠일 단식정진이었다. 

 한편, 해인사에서는 소동이 벌어졌다. 공양주 혜암이 배가 아프다며 한 행자에게 밥주걱을 넘겨준 뒤 사라져버렸기 때문이었다. 대중들이 혜암을 찾으러 해인사 뒷산인 가야산을 헤맸다. 그러나 혜암은 첫째 날도 둘째 날도 굴에서 나오지 않았다. 화두가 성성하게 잘 들려 일주일이면 오매불망 그리던 도인이 될 것 같았던 것이다.

 실제로 닷새째 되는 날까지도 혜암은 화두와 하나가 됐다. 그런데 엿새째 되는 날이 문제였다. 귀속이 갑자기 바글바글 울리고, 손발의 마디마디가 뻣뻣해졌다. 손가락이 굳은 것 같아 돌멩이를 들어 옮기기조차 힘들었다. 얼굴은 산모기가 물어뜯어 옻이 오른 사람처럼 불긋불긋했다. 화두를 의심하는 망상도 나타나 방해를 놓았다.

 ‘화두 선택이 잘못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큰일이다.’

 결국 혜암은 엿새를 넘기지 못하고는 굴을 나왔다. 해인사로 맥없이 내려오자 효봉은 혜암을 불러놓고 야단을 쳤다.

 “공부를 그렇게 하면 되느냐!”

 “죄송합니다.” 

 그러나 효봉은 마음속으로 흐뭇해했다. 출가를 허락한 인곡도 마찬가지였다. 대중의 밥을 푸다가 대분심(大墳心)이 일어나 칠일 단식정진에 들어간 공양주 혜암이 대견하기만 했던 것이다. 

 마침내 공양주 혜암은 가을에 인곡을 은사로, 효봉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았다. 법명은 성관(性觀)이었다. 가야산에 단풍이 불붙기 시작한 10월 15일(음력)의 일이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