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스님의 옛날이야기

싸락눈이 내렸습니다.
올해는 참 눈이 많습니다. 바닷바람에 휩쓸린 눈이 하늘에서 춤을 추고 있습니다. 늦은 저녁 공양을 한 정안 스님은 노스님의 고향 은학리를 생각하였습니다. 툇마루에서 물끄러미 내리는 눈을 바라보던 정안 스님은 방으로 들어와 책을 펼쳐들었습니다. 그러나 글자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노스님은 꼼짝도 않고 누워 있었습니다. 창백한 노스님의 얼굴, 검버섯은 노스님 얼굴 전체를 덮고 있습니다. 정안 스님은 한쪽 눈을 깜박거렸습니다. 난처한 일이 생기면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버릇입니다. 눈을 감은 노스님은 호흡을 조절하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노스님의 배가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정안 스님은 연필을 꺼내 하얀 백지 위에 깨알 같은 글씨를 썼습니다.
산양면 은학리.
 문경은 어디쯤일까?
그곳을 가려면 안산 버스터미널에서 타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불암사에서 이곳으로 올 때도 그곳에서 내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노스님께서 왜 문경을 함께 가시려고 하였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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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이승민 

정안 스님은 조용히 책을 덮었습니다. 그리고 불을 끄고 살며시 노스님 곁에 누웠습니다. 노스님은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거칠게 몰아쉬는 노스님의 숨소리는 정안 스님의 마음을 조금은 아프게 하였습니다. 내일은 약국에 다녀와야겠다고 다짐을 하였습니다. 정안 스님은 이런저런 생각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잠이 안 오냐?”
어느새 잠에서 깨셨는지 노스님께서 물었습니다. 노스님은 뒤에도 눈이 계신 분입니다.  노스님은 신기하게도 정안 스님의 마음이나 행동을 보지 않아도 훤하게 아시는 분입니다. 정안 스님은 노스님도 부처님처럼 신통력을 부린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고통을 받고 있는 숨병은 고치질 못합니다. 그게 이상하였습니다. 정안 스님은 그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
“......”
“인석아, 세상에서 가장 큰 병이 무슨 병인 줄 아느냐?”
 그래도 정안 스님은 말이 없습니다.
노스님은 혼자 묻고, 혼자 대답하였습니다.
“그건 바로 근심이라는 병이다. 아직 어린 네가 웬 한숨이야, 한숨이!”
방 밖에서는 바다를 건너온 바람들이 북쪽으로 북쪽으로 말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쇄에엥.
 쇄에엥.
 정안 스님은 바람소리를 들으면 입속을 맴도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러나 노스님은 정안 스님이 노래를 부르면 호되게 꾸짖었습니다. 지난번에도 절 마당을 쓸며 노래를 부르다가 혼난 적이 있었습니다. 정안 스님은 까닭을 알지 못했습니다. 다만 절에서는 절대로 노래를 부르면 안 된다는 것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노스님, 빨리 병을 고치세요.”
“무슨 소리냐?”
“숨병 말이에요?”
“왜 내가 숨을 잘못 쉬니까 싫으냐?”
“빨리 나으실 수 있잖아요.”
“흐흐흐, 사람이 고칠 수 있는 병이 있고, 고칠 수 없는 병이 있다. 지금 내가 앓고 있는 숨병은 고칠 수가 없어. 이 세상 어떤 의사가 와도 말이다. 부처님도 사람이 태어나서 늙고, 죽는 것은 고칠 수 없으셨지. 부처님도 돌아가시지 않았느냐?”
“그럼 스님도?”
“부처님도 돌아가셨는데 나라고 별수 있냐? 이제 갈 데가 된 거야.”
“노스님?”
정안 스님은 울먹거렸습니다.
“스님 고향이 은학리에요?”
“그렇지.”
“어떤 곳이에요?”
아픈 노스님에게 말벗이라도 해주고 싶습니다.
“학이 많은 동네였어. 가을철이면 들판이 하얄 정도로.”
노스님의 음성은 안으로 잠겼습니다.
“우와, 그럼 여기보다 멋진 마을이겠네요?”
 정안 스님은 일부러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글쎄.”
“언제 떠나셨어요?”
“60년도 더 됐지.”
“예?”
“흐흐! 왜 너무 옛날인 것 같으냐?”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내게는 바로 엊그제 같다. 마을을 덮었던 빨간 감들, 바람에 일렁이던 작은 대나무숲. 우리 집은 아주 외딴 집이었지. 여우가 아주 많았어.”
“정말요?”
“밤이 되면 항상 울었지. 요즘 같은 겨울에는 더 심하게 울었지. 캥캥하고 말이야.”
정안 스님은 이불을 뒤집어썼습니다.
“그렇지만 여우는 나쁜 동물이 아니지. 혹간 닭을 채가기는 하지만... 사람을 보면 아주 무서워한단다.”
 밤은 자꾸 깊어만 갔습니다.
그런데도 노스님은 이야기를 그치지 않습니다. 마치 지금의 이야기를 하듯이 옛날, 아주 오래된 옛날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런 일은 처음이었습니다. 정안 스님도 잠이 오지 않습니다. 눈이 말똥말똥 점점 더 맑아졌습니다.
“어때 한번 가보고 싶지?”
“지금도 여우 많아요?”
“허허, 지금은 아마 없을 게다. 사람들이 다 죽였어. 마을 원래 이름이 여우골이었는데......”
 노스님의 목소리엔 힘이 없습니다.
“정안아, 1 더하기 1은 2만 되는 게 아니다.”
정안 스님은 몰래 인상을 찡그렸습니다. 또 노스님의 잔소리가 시작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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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이승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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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는 사이 새벽이 오고 있었습니다.
 그 사이 싸락눈은 함박눈으로 변했고, 온 세상을 하얗게 덮고 있었습니다. 포리암도 하얀 이불을 덮고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정안 스님은 새벽녘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바깥에서의 온갖 소리들이 다 들렸습니다. 바람소리와 새소리, 그리고 낙엽이 굴러가는 소리들이 정안 스님을 괴롭혔습니다. 정안 스님은 엄마의 얼굴을 떠올렸습니다. 그러나 엄마의 얼굴은 알지 못했습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습니다. 대신 텔레비전에서 본 예쁜 아줌마의 얼굴을 그렸습니다.
그러자 또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정안 스님은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뒤척거렸습니다. 문설주가 흔들렸습니다. 노스님은 이제 아무 소리도 내지 않습니다. 정안 스님은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할 일을 생각하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