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사로 인연 맺은 스승과 제자1
 -수불스님의 바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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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정윤경

봄이 슬금슬금 다가오는 겨울 끝이었습니다. 계곡에 얼음이 녹고 다시 물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계곡물도 겨울잠에서 깨어나고 있었습니다. 계곡물뿐만 아니라 땅속으로 들어간 다람쥐나 오소리, 개구리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똬리를 틀고 겨울잠을 자던 뱀들도 꾸물꾸물 기지개를 켜고 있었습니다.

연둣빛으로 부풀어 오은 매화 꽃망울도 막 문을 열기 전이었습니다. 햇볕이 며칠 더 만져주면 꽃이 피어날 듯 꽃망울은 팽팽해졌습니다. 매화 꽃망울이 일제히 문을 열게 되면 개구리들이 겨울잠에서 깨어 나와 청아한 목소리로 개골개골 노래하겠지요. 암자가 있는 골짜기도 슬그머니 열리고요.

그러나 아직 땅으로 나온 산짐승이나 벌레들은 없었습니다. 바람 끝은 차가웠습니다. 겨울이 물러가면서 시샘을 부렸습니다. 땅속에서 겨울잠을 자는 산짐승이나 벌레들에게 며칠 더 있다가 나오라고 하는 듯했습니다. 수불 스님은 노스님을 시봉하기 위해 큰절 범어사에서 내원암으로 올라와 있었습니다. 강원을 마친 스님에게 은사 지명 스님이 노스님을 시봉하라고 당부를 했던 것입니다. 노스님은 일본에서 유명한 대학을 나온 능가 스님이었습니다. 능가 스님은 모르는 것이 없을 만큼 온갖 학문을 많이 접한 학식이 깊은 분이었습니다. 날마다 수불 스님은 한 시간 이상씩 노스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대학교에서 강의를 듣듯 법문을 들었습니다. 은사 지명 스님이 노스님에게 보낸 이유는 간접적이나마 세상의 학문을 접하고 생각을 넓히라는 뜻이 있었습니다. 수불 스님이 하는 일은 노스님을 시봉하고 노스님의 법문을 듣고 암자 안팎을 정갈하게 쓸고 닦는 일이었습니다.

겨울이 물러가고 봄이 느릿느릿 산자락을 넘어오는 어느 날이었습니다. 서너 명의 여성이 암자를 찾아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수불 스님은 노스님을 찾아오는 신도들이겠거니 하고 무심코 보았습니다. 그런데 여신도 중에 큰언니인 듯한 신도가 노스님을 뵙기 전에 시봉하는 수불에게 먼저 큰절을 했습니다. 수불 스님은 큰절을 받으면서 머쓱해했습니다. 노스님이 받아야 할 큰절을 자신이 받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큰언니 신도는 아주 자연스럽게 큰절을 했습니다. 공손하면서도 당당했습니다. 절에 오래 다닌 것이 분명했습니다. 데면데면하지 않고 수불 스님을 바로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방 안의 분위기가 이상해졌습니다. 큰언니 신도가 일어서지 않고 무릎을 꿇은 채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수불 스님도 눈치를 챘습니다. 큰언니 신도를 따라온 동생 같은 신도들이 술렁거렸습니다. 큰언니 신도는 수불스님 앞에서 꼼짝을 못 했습니다. 수불 스님에게서 흰 빛이 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큰언니 신도는 혼잣말로 중얼거렸습니다.

‘스승님이 되어 주십시오. 그동안 스승을 못 찾고 방황했습니다. 스승님 가르침을 받고 싶은 마음이 목울대까지 차올라 있습니다. 목울대에 가시가 걸린 듯 가슴이 답답합니다.’

그러나 수불 스님은 자신이 누구의 스승이 된다는 생각은 아예 없었습니다. 자신은 더욱더 정진해야 할 수행승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윽고 큰언니 신도가 말했습니다.

“스님, 저의 스승님이 되어 주십시오.”

“그런 생각 해 본 적이 없으니 노스님께 가보세요.”

옆에 있는 여신도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지금까지 보았던 큰언니 신도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수불 스님 앞에서 매달리고 있는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날마다 큰언니처럼 의지하고 따라다녔는데 무슨 사건인가 싶었습니다.

사실, 여신도들이 큰언니 신도를 의지하고 따를 만한 이유는 많았습니다. 큰언니 신도는 누구보다도 기도를 잘했습니다. 파도 소리가 가깝게 들리는 홍련암에 갔을 때였습니다. 어둠이 내리어 바다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따금 어선들의 불빛이 깜박거리며 나타났다가 사라질 뿐 땅과 바다는 어둠과 한 덩어리가 되어 있었습니다. 조그만 법당은 무인도처럼 적막할 뿐이었습니다.

큰언니 신도는 관세음보살상 앞에서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것도 발뒤꿈치를 들고 했습니다. 여신도들이 따라 할 수 없는 고통스런 관음기도였습니다. 보통 신도들은 시늉도 낼 수 없는 고행기도였습니다. 그러나 큰언니신도는 보란 듯이 초저녁에 시작하여 자정을 넘겼습니다. 여전히 발뒤꿈치는 들려 있었고 몸은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느새 법당 문이 파랗게 물들고 있었습니다. 관세음보살님이 몰고 오는 새벽빛이었습니다. 바다도 파랗게 드러났습니다. 어선들이 잠에서 깨어나 통통 소리를 내며 푸른 바다를 가로질러 갔습니다. 바다는 부지런한 어선의 기계소리로 소란스러워졌습니다. 그제야 큰언니 신도는 발뒤꿈치를 내리고 기도를 끝냈습니다. 그러나 전혀 피곤하거나 고통스럽지 않았습니다. 홍련암 스님이 여신도들에게 말했습니다.

“저 보살님은 기도삼매에 들었습니다. 관세음보살님과 함께 밤을 새운 것입니다. 앞으로도 뒤로도 이런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큰언니 신도는 홍련암 기도 이후 가까운 여신도들 사이에서 입에서 입으로 퍼졌습니다. 여신도들이 큰언니 신도를 찾아와 함께 절에 다니기를 원했습니다. 저절로 무리가 생겼습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