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십니까?

 

정찬주(소설가)

   

 

산중에서는 늦가을부터 화목난로를 피운다.
꼭두새벽에 눈을 뜨자마자 화목난로를 살피는 일부터 한다.
집게로 재를 뒤집어보면 불티가 살아 있다.
그 위에 종이를 넣고 땔감을 올린다. 땔감에 불이 붙을 때까지
쪼그리고 앉아서 오늘은 무슨 글을 써야할지 궁구한다.
선심초심(禪心初心)이란 말이 있다. 무슨 일이든
첫 마음으로 돌아가 보면 실타래처럼 풀릴 때가 많다.

 

대학시절 불교학생회 모임에서 지도법사 스님에게
<반야심경>을 공부한 적이 있다.
일본 교토의 어느 불교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한
법사 스님은 <반야심경>은 첫 문장이
반야철학의 핵심이자 주제요 골수라고 말했다.
<반야심경>의 첫 문장만 온전하게 이해하면 나머지는
실타래가 풀리듯 저절로 알게 된다고 단언했다.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법사 스님은 ‘관자재보살이 깊은 지혜를 완성하고 행할 때
현실존재의 요소(오온)들이 다 공함을 비추어보고서야
모든 괴로움과 불행을 벗어났다’고 우리말로 풀이했다.
그래도 왕초보 불자인 우리들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앉아 있자,
젊은 법사 스님은 <반야심경>의 첫 문장만 가지고
두 시간 동안 길게 법문했다. 법사 스님의 알듯 모를 듯한
긴 설명이 끝나고 질문시간이 이어졌다.
한 여학생이 부끄러운 듯 모기만한 소리로 물었다.
“현실존재가 뭐예요?”
“줄여서 실존(實存)이라고 합니다. 밥 먹고 말하고 생각하는
지금 살아 있는 나를 말합니다.
살아 있는 나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가 오온입니다.”

 

고등학생 때부터 절에 다녔다는 부산 출신의 한 남학생도 질문했다.
“공(空)하다는 것이 무엇인가요?”
“수학의 제로와 비슷합니다. 한자로는 ‘비어 있다’는 뜻인데,
불가에서는 ‘실체가 없다’는 뜻과 같이도 씁니다.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학생이 앉아 있는 의자는 언젠가 망가져 쓰레기장으로 갑니다.
언젠가 의자가 아닌 무엇이 되고 맙니다.
결과적으로 의자라는 고정된 실체는 없다는 것이죠.
그런데 사람들은 의자라는 실체가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살죠.
실체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집착과 욕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도 마찬가집니다. 나라는 실체가 없다고 깨달으면
집착과 욕심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또 한 여학생이 질문했다.
“스님, 나의 실체가 없다고 깨달으면 집착과 욕심에서
벗어난다는 말씀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공은 지식으로 얻어지지 않습니다.
수행하거나 어떤 체험을 하여 깨달아야 합니다.
공한 경계에서는 내가 없으니 집착과 욕심도 사라져버립니다.
절대로 논리의 비약이 아닙니다.”
   
앉아 있는 순서대로 질문이 이어져
나도 할 수 없이 입을 다물고 있는 수만은 없었다.
“도일체고액, 모든 괴로움과 불행을 벗어났다고 하는 것은
진정한 행복을 얻었다는 의미인데,
그렇다면 행복의 열쇠는 공함을 비추어보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나는 또 손을 들고 나서 법사 스님에게 얄궂은 질문을 했다.
“<반야심경>의 첫 문장을 훌륭하게 이해하고 계시는
법사 스님은 행복하십니까? 괴로움과 불행에서 벗어났습니까?”
법사 스님은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
그러나 스님의 더듬거리는 답변은 그날 길게 설한
어떤 말씀보다도 내게 감동을 주었다.
내 삶의 한 길을 제시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행복하지 않습니다. 영원한 행복을 추구하고 있을 뿐입니다.
<반야심경>의 진리는 지식과 설명으로 쉽게 얻어지지 않습니다.
수행을 해서 스스로 체험해야 참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때가 되면 선방에 가고,
산중암자에 가서 기도하고, 법당에서 염불합니다.
재가불자도 마찬가집니다. 아무리 뛰어난 법사를 만나도
자기 수행이 없으면 그것은 지식일 뿐 지혜가 되지 못합니다.
김치 맛을 알려면 자기가 직접 김치를 담가 먹어봐야 합니다.
김치에 대해서 평생 설명을 듣는다 해도
자기가 담가보지 않고서는 진짜 김치 맛을 모를 겁니다.”

 

오늘 새벽에는 장작 땔감에 불이 잘 붙지 않고 있다.
참나무장작에 비해 살아난 화력이 아직 약하기 때문이다.
주는 것과 받는 것도 서로 조건이 맞아야 한다.
참나무장작을 빼고 소나무장작을 넣어주니 비로소 불이 붙는다.
가르침을 주고받는 것도 같은 이치가 아닌가 싶다.
난로는 내게 온기뿐만 아니라 삶의 지혜까지 주고 있다.
이른 새벽인데도 산새가 까치밥으로 남긴 감을 쪼아 먹고 있다.
산새도 부지런한 녀석이 있고 게으른 녀석이 있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