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9월 19일 원산항에는 소련 화물선 푸가초프호를 타고 온 소련군 복장을 한 50여 명의 조선인들이 내렸다. 김일성이 이들을 이끌었고, 항구에서 그를 마중한 인물은 원산시 경무사령관 꾸추모프 대좌와 일부 국내 공산주의자들이었다. 이때 이후로 김일성은 사실상 북한의 지도자로서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그의 첫 번째 행보는 박헌영의 지휘에서 벗어나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확고히 해 나가는 일이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김일성은 확실하게 북한을 장악하게 되었다. 물론 그가 북한을 그토록 빨리 접수하게 된 가장 결정적인 힘은 소련군이었다. 투쟁 경력에서는 박헌영, 대 사회적인 명망에서는 조만식의 상대가 되지 못했던 젊은 그를 소련 군정에서 발탁하였기 때문이었다. 소련은 그들의 말을 충실하게 들어줄 꼭두각시를 바랐던 것이다. 

 

 

 

 해방 후 간도에서 아이들을 가리키던 옥아는 그곳 학부형과 아이들에 둘려싸여 해방조국의 앞날을 화려하게 그려보기도 하고, 청년들과 나름대로의 난상토론을 벌이기도 하며 감격과 기쁨에 파묻혀 얼마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녀는 평양으로 날아왔다. 조국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는 교원 자격증을 따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해방이 되었다고 좋아하던 날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남쪽은 미군, 북쪽은 소련군이 점령했다.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은 북한의 시, 군청 소재지까지 많은 병력을 주둔시켜 명실공히 점령군의 군정이 강화되어 가고 있었다. 대부분 시베리아에서 내려온 소련군들은 교육 수준이 낮아 약탈과 폭행을 저지르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젊은 여인들은 물론이고, 나이도 분간 못하고 70 고령의 할머니들까지 성폭행하였다. 북한 전역에서 일어난 이런 일들로 하여 주민들의 반감은 극에 달했다.
“로스케 놈들은 짐승이야.”
“하긴 남쪽의 미군도 마찬가지래.”
 주민들은 저마다 혀를 내둘렀다.
 소련군 사령부는 아직 떠나지 않은 일본 부녀자인 줄 알고 사고를 냈다고 궁색한 변명을 하였다.  그리고 조선인 주택에는‘조선 사람의 집’이라는 것을 표시해 놓으라고 포고문을 내렸다. 그리하여 ‘까레이스끼 돔’, 즉‘조선 사람의 집’이라는 노어로 된 표지를 집집마다 대문에 걸어놓는 웃지 못할 일까지 생겼다. 비극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즈음 평양에서 국내 공산주의자의 거두로 불리던 현준혁이 소련군 측의 급진적 공산화 시책에 반대하다가 암살당하는 끔찍한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해방만 되면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옥아는 평양역 부근의 여관에 웅크리고 있었다. 불안했다.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일본군에게 끌려간 첫날, 스승은 곧바로 총살당했다. 아무런 느낌이 있을 수 없었다. 그녀는 정말 서럽게 울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녀는 사방의 벽만 가린 허름한 옥에 갇혔고, 그 사이 일본 천황의 항복이 있었던 것이다.
 8월 16일 새벽, 다급한 일본군은 옥에 갇힌 사람들을 버려둔 채 깨끗이 사라지고 없었다. 갇힌 옥문을 열어준 것은 다른 외국의 부대, 중국군이었다. 옥을 나온 그녀는 사령부 건물로 들어갔다. 스승과 회산의 시체라도 찾기 위해서였다.
“당신, 뭐요?”
 다행히 중국군에 속해 있는 조선인이 물었다.
 옥아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조선인은 고개를 내저었다.
“일본군이 시체를 그냥 놔두었겠소? 모두 태웠지. 지금도 시체를 태운 냄새가 진동을 하지 않소?”
 옥아는 눈을 감았다. 단 몇 달만 참았으면...... 그러나 어차피 그렇게 갈 사람들이었다. 회산은 용구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그냥 살 사람이 아니었다. 제자들을 모두 죽음으로 보낸 스승 또한 편안하게 조선의 해방을 맞을 사람이 아니었다. 갈 사람은 가고, 남을 사람만 남은 것이다.
 옥아는 일본군이 간 자리에서 헤헤거리며 분주하게 날뛰는 중국 병사들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분명히 마당에서 회산은 죽었을 것이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때 조선 병사가 다급하게 말했다.
“일본군이고, 중국군이고 다 똑같아요. 여자만 보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릅니다. 빨리 도망가시오!”
 옥아는 그냥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시 회산의 고향, 간도 송지로 돌아오고 말았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그녀의 임무였던 것이다. 옥아는 10년 보다 길었던 지난 세월을 생각하고 있었다. 너무 변한 것이다. 일본이 그렇게 빨리 망할 줄도 몰랐고, 남북이 그렇게 갈릴 줄도 몰랐던 것이다.
 옥아는 교사가 되기 위해 평양의 중앙 정치학원에 입학하기로 결심했다. 그곳은 독립운동가들이 모여서 만든 학교라는 말을 들었던 것이다. 옆으로 듣긴 했지만 죽은 분이의 말 때문인지도 몰랐다.  조선 공산당 중앙 정치학원은 옛날 일본군 77연대 자리의 정문 앞에 있는 3층 건물이었다. 그녀가 현관에 들어서자 권총을 찬 빨치산 같은 사람이 그녀를 2층으로 안내해 주었다. 계단 복도 중앙에 큰 붓글씨로 다음과 같은 문구가 씌어있었다.
 
  철썩 같은 비밀 엄수
  무자비한  혁명 투쟁
  강철 같은 단결 만세
 
 옥아는 그 문구를 보면서 피식 웃었다. 분이 언니는 하늘에서 잘 있을까? 운동하는 사람은 모두 똑같군. 제발 조선 사내들 이런 짓 좀 하지 말았으면. 무엇이든 구호부터 내거는 못난 습성. 그녀는 또 목은 잘라도 머리칼은 자를 수 없다던 그 노인을 생각했다. 그 못난이의 이름이 뭐였더라. 흐흐. 그래서 그녀는 더더욱 결심을 굳혔다. 우리 아이들만은 제대로 가르쳐야지.
 그녀는 2층으로 안내되었다. 그런데 거의 모든 사람들이 만주의 일본군으로부터 노획한 권총을 차고 일본군 장교들이 신는 가죽 장화에다 목에 개털을 달은 일본군 파카를 입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머리에는‘도리우찌’라는 사냥 모자까지 눌러 쓰고 있었다. 모두 일제의 고등계 형사 같은 인상을 하고 있었다.
 제법 근엄한 표정의 중늙은이가 그녀를 앉으라고 했다. 정치학원의 비서였다. 이마의 세로 주름살이 십 리는 파진 인상의 사내였다.
“누구 소개로 왔소?”
“제 은사가 회산 스님입니다.”
 그 중늙은이가 놀라는 눈치를 하였다. 분이의 이름을 대려다가 그만두었다. 사내의 표정으로 보아 회산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분은?”
“돌아가셨습니다.”
 옥아는 짧게 말했다.
“정말 훌륭한 분이셨소. 함경도, 만주에서 독립운동하면서 그분 도움받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오. 참으로 슬픈 일이오.”
 옥아는 스스로 쓴 자기소개서를 내밀었다.
 사내는 대충 훑어보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옥아는 짐작했다. 그가 글자를 알지 못한다는 것을. 옥아가 내민 소개서를 받아 쥔 그의 손끝과 눈동자가 가늘게 떨리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예상은 적중했다. 
“동무의 이름은?”
“강옥아라고 합니다.”
“아, 강옥아 동무.”
“그렇습니다.”
“동무는 무엇을 원하오?”
 옥아는 쓴웃음을 감췄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습니다.”
 당신같이 슬픈 사람이 다시는 나오지 않도록. 옥아는 지그시 그를 쳐다보았다.
“아, 좋지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오. 여기서 열심히 공부하면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증이 수여될 것이오. 앞으로 이곳이 우리 조선의 모든 정치세력을 관장하는 곳이 될 테니까. 열심히 하시오.”
 사내는 옥아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회산 동지의 제자라면 당연히 우리 정치 학원 제1반에 속해야 하오.”
“감사합니다.”
“그런데 내일이 무슨 날인지 아시오?”
“네?”
“우리의 민족 영웅 김일성 장군의 환영대회가 열리는 날이오. 동무도 기꺼이 참석해 주시오.”
 옥아는 다음날 처음 만난 중앙 정치학원 동지?들과 함께 기림리 운동장에 나가 맨 앞에 자리 잡았다. 이윽고 안내방송이 나왔다.
“친애하는 지도자이신 조만식 선생이 나오셨습니다.” 
 두루마기를 입고 머리에는 두건을 두른 조만식이 두 손을 흔들면서 등단하였다. 군중들은 일제히 일어나서 만세를 외치면서 박수를 쳤다. 조만식의 얼굴은 발갛게 달아있었다. 옥아는 혼자 중얼거렸다. 키가 조금만 더 컸으면... 그 때 조만식의 우렁찬 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위대한 조선 독립 투쟁의 영웅이신 김일성 장군이 이 자리에 서셨습니다.”
 그 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군중들이 김일성 장군을 보기 위해 환호하면서 연단 앞으로 밀고 나왔다. 그런데 소련군 사령관의 소개를 받고 일어선 사람은 너무나 젊은 청년이었다. 옥아는 고개를 흔들었다.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만주지방에서 독립군 부대를 지휘하여 일본군을 도처에서 쳐부셨다는 전설적인 노장군, 그런데 지금의 김일성 장군은 갈색 양복에 소련 국기훈장을 하나 달고 있었다. 너무 젊은 얼굴.
 그는 연설문을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우리 조선은 당파나 개인의 노력으로는 위대한 조국 건설을 할 수 없으니 돈 있는 사람은 돈으로,
지식인은 지식으로, 노력 있는 사람은 노력으로 민주국가 건설에 대동단결하여 매진합시다!”
 그러나 박수를 치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군중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아마 김일성 장군이 연로하셔서 비서에게 대신 귀국 인사 말씀을 읽게 하셨겠지?”
“아니야. 저 젊은 사람이 진짜 김일성 장군이래.”
 모든 정보에 무지했던 조선 사람들은 그저 누군가에게 들은 김일성 장군에 대한 전설만 옹골차게 믿고 있었다. 사람들은 흰 수염을 흩날리면서 앉아있을 노장군의 모습을 보기 위하여 연단 귀빈석에 다가가서 자세히 살펴보았지만 자신들이 상상했던 김일성 장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실망한 군중들의 한숨 소리가 운동장에 감돌았다. 그래서였는지 주최 측은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경기를 하나 준비해두고 있었다. 평양팀과 북한 주둔 소련군 팀과의 축구 경기가 이어졌던 것이다. 해방 전이나 해방 후나 쓸데없는 명분 싸움에 목숨을 거는 순진한 조선 사람들은 금방 축구 경기에 빠져 들어갔다. 옥아는 숙소까지 천천히 걸었다. 못난 조선 사내들이 이끌어 갈 남북의 조선을 걱정하면서.
 길거리에 삐라가 나뒹굴고 있었다. 

 

  오늘 군중대회에 나타난 자는 가짜 김일성이다
  
 옥아의 중앙 정치학원 수업은 생각보다 순조로웠다. 노어를 배우는 시간을 빼고는 손쉬운 수업이었던 것이다. 한글을 모르는 다른 동지들은 애를 먹었지만 옥아는 단연 뛰어난 성적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상한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옥아가 특별반으로 승급한 것이었다. 중앙 정치학원의 특별반은 남녀 통틀어 10명 밖에 되지 않았다. 모두 조선공산당 간부의, 더 자세하게 말하면 혁명당원의 자식들이었다. 옥아는 그 이유를 몰랐지만 출신 성분을 조사할 때 고향이 회령이라고 써놓았기 때문이었다. 김일성 처의 고향이 회령이었던 것이다. 회령의 사람들, 특히 아낙들은 모두 김정숙의 후예라는 자긍심을 심어주기 위한 공작이 벌써 그때부터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회령 출신인 옥아는 일본말과 조선어, 그리고 중국말까지 유창했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동서양의 고전까지 두루 섭렵하였던 것이다. 중앙 정치학원의 비서는 느닷없이 찾아온 복덩어리를 마구마구 밀어주고 싶었다. 비서는 옥아를 만날 때마다 흐뭇하게 손을 잡아주었다. 그렇지만 옥아는 그런 것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특별반은 느닷없이 김일성 장군 어록을 외우는 과목이 추가되었지만 그것도 별 부담 없이 열심히 외웠던 것이다.
 어차피 그녀는 조선 사내들의 정치놀음은 관심이 없었다. 남이고, 북이고, 내로라하는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여운형과 김구 선생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박헌영이 북으로 올라왔다는 소식도 들렸다. 이승만의 남쪽과 김일성의 북쪽이 완전히 갈라졌다는 소식도 들렸다. 옥아는 날마다 벌어지는 혼탁한 신문을 보면서 가끔씩 회산과 이구를 떠올렸다. 그들이 살아있다면... 그러나 교사 자격증만 주어지면, 어디서든 아이들을 가르치면 그만이었다.
 옥아는 틈틈이  얼마간 남은 돈으로 소련 군인들이 좋아하는 칼라와 드롭스 류 등 물건을 도매로 사다가 시장에 나가서 소련 군인들에게 팔고 남는 돈으로 생활비를 충당했다. 학원비는 일체 들지 않았다. 그때부터 옥아는 조선 공산당 여성동맹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녀의 강연을 듣기 위해 사람들이 몰렸다. 아니 당에서 사람을 모았다. 그의 독특한‘자본가 조선 양반’비판 때문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연군 동굴 속에서의 투쟁?이 알려져 그녀는 일약 항일연군의 상징적 여전사가 되어 있었다.
 우스운 일. 예나 지금이나 조선이라는 나라는 실체 없는 명분에 따라 움직이는 나라였다. 해방 후 행적이 불분명한 독립운동가에게 맹목적으로 몰리는 인파를 보아도 민중들의 식견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정치 이야기만 나오면 입에 거품을 물었다. 민족 이야기만 나오면 눈물을 흘렸다. 천년 이상을 소위 정치라는 것이, 민족이라는 것이 그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었던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디든 줄을 서야 했다. 그렇게 살아온 세월이었다.

 

 

 외세는 물론이고 나라 안의 소수에게 끊임없이 수탈만 당하고 살아온 사람들은 누구든 살기 위해 또 다른 왕을 만들어야 했다. 종교를 만들고 있었다. 그를 중심으로 뭉치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편제하기 쉬운 민족, 왕에게 사약을 받고 죽어가면서도 왕이 있는 곳을 향해 절을 하는 세월을 500년 이상 지속한 세계 유일의 나라였다. 그것이 조선이었다.
 민중을 움직이는 것은 실제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적당한 실리와 약간의 지위만 보장하면 목숨을 걸고 충성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항상 조선 역사의 고비마다 불가사리 뺨치는 괴물들이 나타났다. 그 괴물이 바로 만주를 떠돌던 건달 김일성이었고, 독립운동을 빌미로 미국 한인 동포의 돈을 뜯어 먹던 기회주의자 이승만이었다. 그런데도 이승만은 건국의 아버지로, 김일성은 항일 투쟁의 위대한 장군으로 남과 북에서 절대적 추앙을 받고 있었다.
 북에서는 벌써 몇몇 무리들과 작당하여 일본군 몇 명을 죽인 젊은 김일성에 대한 우상화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아울러 백성들의 고혈을 짜던 조선 사대부가 다시 형성되고 있었다. 열성의 공산 혁명당원이라는 이름으로.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씨조선이 물러간 자리에, 일본이, 그 일본이 물러간 자리에 김씨 조선이 자리 잡은 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