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게보기그이를 처음 만난 것은 대학 2학년 때였다. 불교 동아리 선배로 만난 그는 엄한 성정의 소유자였다. 동아리방에 모셔진 불단에 먼지라도 쌓여있으면 금방이라도 불호령을 터뜨릴 것 같은 무서운 표정을 짓곤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는 후배들을 몹시 사랑했던 역시 같은 동아리 선배와 결혼을 했고, 참으로 행복한 가정을 이루며 살았다. 늘 부처님을 의지해 살아가는 두 선배와는 대학을 졸업한 후 함께 서울 조그만 절의 청년법회 활동을 함께 하면서 더 친밀해졌다.

학연과 불연이 겹친 두 선배의 알콩달콩 사는 모습은 후배들에겐 일종의 롤 모델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서울에 살던 선배가족은 어느 날 훌쩍, 제주도로 거처를 옮겼다. 서귀포에 있는 널따란 농장에 삶의 보금자리를 마련한 것이었다. 그리고 몇 해가 흘렀을까. 목숨보다 더 의지했던 남편이 병고로 사경을 헤맨다는 소식을 전화를 통해 들었다. 남편의 마지막 가는 길이 불보살님의 가피로 편안했으면 좋겠다고, 그 길을 배웅해줄 좋은 스님을 소개해달라는 젖은 목소리였다.

제주 법화사에 있던 한북 스님의 각별한 보살핌 아래 그의 남편은 고통 없이 편안하게 이생의 인연을 접었다. 스님이 건네준 염주를 굴리며 고인이 문수보살을 보았다는 말을 남겼다는 말을 전해들은 건 장례를 마친 후 한참이 지나서였다. 그는 남편과 함께했던 제주 농장에서 남은 삶을 살아가겠다는 말도 남겼다. ‘청재설헌’이란 이름의 힐링 가든(Healing Garden)은 이렇게 시작됐다. 청재설헌이란 이름은 그당시, 현재는 조계종 교육부장 소임을 맡은 법인 스님이 붙여준 이름이다.

아무려나, 평생 흙을 접해보지 않았을법한 그가 영락없는 촌부(村婦)의 형색을 하고 있는 것을 제주도를 방문해 확인했을 때, 가슴 깊은 곳에서 울컥 뜨거운 기운이 느껴졌다. 제주 아낙이 되어가는 그. 그러나 뭐 하나를 해도 확실하게 하던 분이었기에 믿음 같은 것이 있었다. 호미와 낫, 괭이를 든 모습이 어느덧 자연스러워질 무렵, 나는 그의 힐링 가든이 입소문을 타고 조금씩 육지에도 알려지고 있음을 감지했다.

그의 가든은 단순한 가든이 아니라 문인과 예술가, 풍류와 철학을 아는 이들의 쉼터로 자리매김했다. 드물게 갤러리를 마련해 전시회도 열고, 각종 문화행사를 작지만 짬지게 벌이기도 했다. 영문학을 전공한 그였기에 외국인들에게도 힐링 가든은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이는 시나브로 더 큰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남편의 뼈를 뿌린 그곳에 그는 애타는 사부곡처럼 꽃과 나무, 풀과 정성을 틈틈이 심었던 것이다.

“남편이 영면의 길로 떠난 이 땅에 몸을 부리는 일은 위로였고 통증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말마따나 넘치는 호강을 마치 권리인 듯 부리던 소비형 인간이 노동하는 생산형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이 보통 일이겠는가.

크게보기작년, 그가 책을 냈다는 소식을 바람결에 들었다. 제법 팔린다는 전언과 함께. 이따금씩 이메일 소식이나 주고받는, 아니면 청재설헌 홈피를 방문해 안부를 묻는 정도의 영양가 없는 후배에겐 증정본 책 한 권이 배달되지 않았다. 다 무심했던 내 탓이려니 했지만, 서운함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었다.

지난 10월 어느 날, 바쁜 일상을 모두 다 접어두고, 힐링 가든도 식구처럼 사는 개들에게 잠시 부탁한 채 육지여행을 하던 그를 괘불재가 봉행되던 미황사에서 만났다. 뜻밖의 조우였다. 좋아하는 이를 예기치 않게 만나는 기쁨은 꽤나 즐거운 일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많은 대화를 나눴다. 선배님의 사는 이야기, 그의 지금은 훌륭하게 성장한 두 아이 이야기, 앞으로 살아갈 이야기 등. 어느덧 제주도 말투가 자연스러운 그에게서 풍겨 나오는 내음은 미당의 시 ‘국화 옆에서’에 나오는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님의 향기 같은 것이었다.

“선배님, 책이 나왔다던데…”

“아니, 내가 안 보내줬던가요?”

“아마, 제가 어느덧 선배님 측근명단에서 제외된 것 같아요.”

“그럴 리가, 3쇄 나오면 제일 먼저 보내줄께.”

엊그제 사무실에 책이 배달되어 왔다. 미황사에서 스치듯 나눈 대화를 그이는 잊지 않았던 것이다. 한 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책이다. 사설이 길어진 것은 책을 펼쳐보며 많은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기 때문이다.

이 책의 이름은 ‘힐링 가든’(다빈치 펴냄)이다. 정직한 땀과 꽃, 나무, 흙의 기운으로 나를 풍요롭게 가꾸는 제주 아낙의 정성이 켜켜이 깃든 좋은 책이다. 이곳에 실린 온갖 꽃과 식물과 농작물들은 모두 청재설헌 농장 울타리 안에 사는 가족들 사진이며, 이야기들이다. 청재설헌의 4계가 어느새 전문가의 반열에 오른 그이의 사진과 영문학을 전공한 문학소녀 출신의 내공 있는 글과 캡션들로 묘사돼 좀처럼 책을 내려놓지 못하게 한다.

“서울에 돌아와 다시 시간이 흐른 뒤 그 아침에 찍은 사진들을 다시 보았을 때에야 알게 되었다. 청재설헌에서의 그 아침이 내게 치유의 시간이었다는 것을. 서울에서의 내 동물성 삶이 까맣게 잊혀지고 그 자리에 식물성 영혼이 잠시 돌아온 시간이었다는 것을. 그 놀라운 치유의 힘을 지닌 정원이 ‘책’의 형상으로 내 앞에 돌아왔다.” 이 책을 읽은 시인 조병준의 상찬이다.

“꽃이 피고 지고 계절이 오고 가고, 왜가리와 노루를 기다리며 구실잣밤나무에 깃든 참새들의 재재거림을 들으며 보내는 세월이 이제는 평화롭다. 하루의 오고 감을 시계에 의존하지 않는 일상을 산다”는 그. 그의 삶에서 한 경계를 경험한 수행자의 포스가 불현듯 느껴졌다면, 지나친 오버일까.

마흔넷, 아직은 너무 젊은 나이에 평생을 가자던 남편을 사별하고 심사숙고라는 절차도 없이 운명처럼 한라산 남사면 자락에 집을 짓고, 집을 찾는 인연들을 친구 삼고 너른 농토와 열매에 빠져 농사를 짓고 나무와 꽃을 심으며 힘든 시절을 이겨낸 그. 손마디가 굵어지고 어깨가 탄탄해진 이제야 삶에 대해 철이 조금 드는가 싶은, 그러나 마음은 여전히 낭랑 18세인 즐거운 중년의 여인, 김주덕의 삶과 철학이 담긴 책 ‘힐링 가든’의 일독을 권한다. 이 책을 통해 독자의 삶 또한 힐링의 지혜를 얻을 수도 있으리니.

저자와 오랜 교분을 쌓고 있는 시인 박남준과 목사출신 수필가 임의진, 사진가 김홍희의 추천사 일부를 덧붙인다.

“거기 은밀한 이의 정원같은 청재설헌에 가면 제주, 맑은 바다처럼 푸른 호미질을 하다 일어서서 맞이하며 환희 웃는 사람이 있다. 그녀의 손끝에서 밀감꽃이 피어나고 치자꽃이 피어나고 풋풋한 녹차의 싱싱한 연두 빛이 피어나고는 한다.”(박남준)

“새처럼 일어나 그녀의 정원에서 쑤알거리고 싶은데…, 내게는 신(神)의 정원이면서 여행자의 막역한 정거장인 그녀의 청재설헌이 시방도 눈에 아슴아슴하구나.”(임의진)

“한 여성에게는 깊은 상처의 땅이었던 돌밭이 옥토로 바뀌고 상처들이 오히려 꽃으로 피는 것을 나는 보았다. 그리고 그것들은 다시 한 장의 사진으로 정제되면서 자신은 물론 그 곳을 찾는 모든 이들을 치유하는 것을 나는 보았다. 바로 내가 거기서 치유 받은 영혼이기 때문이다.”(김홍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