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봉규 연재소설 백산(白山)의 연인

우봉규 연재소설 “백산(白山)의 연인”9

우 봉규 | | 2020-08-11 (화) 07:57

 정신 나간 사람이 아니고는 여기까지 올 사람이 없었다. 제아무리 산을 날고 기는 사람이라고 해도 이 눈보라 저녁을 헤치고 올라올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런데도 틀림없이 사람이었다. 더운 열기가 있었다. 귀신은 아닌 것이다. 가끔씩 사람이 아닌 것이 사람을 홀린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왔다. 특히 눈 오는 날은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천천히 사내를 관찰했다. 사내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 있었다. 그는 혹 사내가 양귀비를 캐기 위해 온 사람이 아닌가 하고 사내의 행색을 살폈다. 그런데 아니었다. 물질을 구하는 사람의 얼굴은 대개 정해져 있었다. 그래서 더욱 경계심이 들었다. 무엇 하러 왔을까?
“혼자 있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불쑥 들어와서 미안하네.”
 놀랍게도 그는 회산이었다. 
“아니, 스님!”
 이구는 엎어졌다.
 회산도 그처럼 이미 옛날의 모습을 찾을 길 없이 망가져 있었다. 봉두난발, 움푹 들어간 눈, 그는 회산이 아니었다.   
“어떻게 여기를?”
“글쎄.”
 그는 고개를 돌렸다. 그가 이곳에 살고 있다는 것은 이 세상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냥 우연이 아닌 것이다. 분명히 자신을 찾아온 것이다. 회산이 말없이 화덕을 쑤셨다. 도대체 할 말이 없었다. 회산이 먼저 이구를 보고 싱긋 웃었다. 이구도 회산을 보며 싱긋 웃었다.
“멀리서 보면 산짐승인 줄 알겠습니다.”
“자네도 그렇구먼.”
 그는 옥아를 걱정하고 있었다. 회산이 저 지경이라면 분명 옥아에게 문제가 생긴 것이다. 그 마음을 아는지 회산이 빙긋 웃었다.
“궁금하지 않나?”
“여기 오신 이유가 있으시겠지요?”
 회산은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이구를 바라보며 또 빙긋 웃었다. 역시 맑은 웃음이었다. 아무리 외양이 변해도 저 웃음은 변하지 않은 것이다. 이구는 이유 없이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데 제가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알고 오셨습니까?”
 그가 꺼져가는 화덕에 나무를 집어넣으려고 하는 순간, 회산이 고개를 흔들었다.
“난 이제 불이 있는 데는 잠깐도 있지 못해.”
 그제야 회산의 얼굴이 술 마신 사람처럼 붉은 이유를 알았다. 산을 날려버릴 것 같은 바람 소리. 화덕의 불이 사그라지자 금방 한기가 몰려왔다. 그런데도 회산의 얼굴은 여전히 붉었다. 
“오늘은 아마도 여기 귀신들이 우릴 잡아먹으려고 하는 모양이다. 흐흐!”
“이곳을 알고 계셨던가요?”
“글쎄.”
 이구는 웃었다. 자신이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있었던 사람의 흔적, 썩은 설피 한 켤레, 부서진 조롱박 하나. 개울가에 무너진 돌탑들, 그리고 삭아버린 묘표......
“이곳에 누구를 묻었습니까?”
“함께 있던 사람이 죽으면서 이곳에 묻어달라고 해서 여기에 묻었지.”
“특별한 까닭이 있습니까?”
“모르지. 그 사람들이 이곳에 묻히기를 원했어. 그 사람들 말로는 이곳이 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이라고 하던데.”
“그래요?”
 그는 무심하게 말했다. 죽은 다음 묻히는 곳이 금계포란형이면 어떻고, 은계방탕형이면 어떠랴, 이구는 그런 것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저 우스울 뿐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곳을 찾아오셨습니까?”
 이구는 다시 물었다.   
“어젯밤에 내 스승님이 다녀갔어.”
“예?”
“그분이 여길 올라가 보라고 하셨지.”
“도무지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빙긋 웃었다.
“스승님이라면?”
“지금은 향림사에 계시지.”
 말로만 듣던 회산과 옥아의 스승. 명장사에 머물지만 사람들에게 한 번도 얼굴을 보인 적이 없다는 전설적인 수행자, 이구는 명장사를 들락거리던 사람들에게 그 얘기를 들었던 것이다. 물론 이구는 한 번도 그 스승이라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정말 그 분이 오셨습니까?”
“꿈속에서.”
“흐흐흐!”
 이구는 회산을 보고 웃음을 던졌다. 회산이 괜스레 귀신 씻나락 까먹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아주 유쾌하게 웃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고개를 들어 넌지시 그를 쳐다보는 회산의 눈매에 빛이 있었다. 강렬한 눈빛이었다. 덧없이 웃는 그를 바라보는 회산의 얼굴엔 형용하지 못할 진정이 담겨 있었다.
“그분이 가끔씩 밤에 나를 찾아올 때가 있어.”
 그는 정말이냐고 물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고개를 돌렸다. 회산이 비로소 굳었던 표정을 풀고 다시 웃었다. 그러나 이구는 웃지 못했다. 까닭과 연유를 떠나서 말을 붙일 공간이 없었다. 엄연히 회산이 하는 말은 사실과 맞지 않는데도, 이구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구는 새삼스럽게 회산을 살폈다. 한동안의 침묵이 흘렀다.
 

삽화 염정우

 
 도대체 이 사람은 무엇을 바라고 사는 사람일까?
 이구는 처음 회산을 만날 때 가졌던 의문을 다시 떠올렸다. 그리고 여전히 오두막을 날려버릴 듯이 몰아치는 바람 소리를 들으면서 회산이 말한 스승이라는 사람을 생각하고 있었다. 세상에는 별 이상한 일로 목숨을 거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이구는 그런 사람들을 숱하게 보았다. 여럿이 무리를 지어 이 산 저 산을 떠도는 거지 아닌 거지 떼들을. 그들은 이곳 백두산 근처에도 얼마든지 있었다.
 이구가 궁금한 것은 오직 하나였다.
 옥아.
 이구는 옥아의 동그만 얼굴을 떠올렸다. 죽기 전에 단 한 번이라도 보고 싶은 얼굴. 아무리 불러도 성이 차지 않는 서러운 이름. 그러나 회산 앞에서 먼저 옥아의 이름을 들먹일 수는 없었다. 그것이 이구의 가슴을 찔렀다.
 회산이 오두막의 문을 열어젖혔다.
 참으로 추운 날씨. 나뭇가지 위에, 혹은 말라죽은 풀잎 위에도 눈은 작은 잿빛의 찬란한 구슬들처럼 반짝거리는 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이가 시린 한겨울, 그들은 하염없이 쏟아지는 눈송이를 보면서 말없이 앉아 있었다. 눈 위엔 벌써 어느 짐승의 발자국이 남겨져 있었다. 멋진 세상, 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화덕의 불이 거의 꺼짐과 동시에 어둠이 몰려오고 있었다. 눈은 쌓이고 또 쌓였다.
“왜 오셨습니까?”
 회산이 고개를 흔들었다.
“자네도 중이 되고 싶은가?”
“이곳까지 오는 도중에 많은 절을 들렀습니다. 그런데 제가 있을 곳은 한 군데도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혼자 있고 싶습니다.”
“여기를 떠날 수는 없나?”
“......”
 이구가 고개를 흔들었다.
 회산이 빙긋 웃었다.
“나는 이걸 가지고 왔지.”
 회산은 이구에게 작은 바랑을 건넸다. 
“이건?”
 이구는 까닭 없이 옥아의 얼굴을 떠올렸다.
“나 내려가면 열어보게. 흐흐. 가시나무하기 힘들지?”
“예?”
 회산이 한참 이구를 쳐다봤다.
“그럼, 나는 내려간다.”
 회산이 천천히 일어났다.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갑자기 눈보라가 이렇게 치는 날에 회산이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 그렇다고 그것을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기실 정말로 물어보고 싶었다. 당신은 도대체 무엇을 하는 사람이오? 그러나 그 말은 그의 입술을 움직이지 못했다.
 회산은 아무렇지도 않게 떠나고 있었다. 참으로 싱거운 일이었다. 설피도 신지 않았고, 특별히 쌓인 눈을 헤치고 갈만한 어떠한 도구도 없었다. 그런데도 회산은 땅거미 내리는 산 밑으로 천연덕스럽게 내려가고 있었다. 참으로 빠른 몸놀림이었다.
“옥아에게서 편지가 왔다. 일본에서... 그런데 그곳 방적공장에서 야학을 하고 있다더군.”
 회산은 산을 내려가면서 큰소리로 말했다.
“흐흐, 저를 가르쳤던 것처럼요.”
 이구 또한 큰소리로 응수했다.
“그게 아니지 그곳에서 그런 일을 하다가 발각이 되면 어떻게 되겠나? 내게 그런 편지를 썼으니 이미 일본인들이 다 알고 있는 게지.”
“예?”
“차라리 죽이면 낫지?”
“그럼?”
 이구는 눈을 감았다. 아득했다. 
“자네가 가 줘야겠네.” 
 이구는 눈을 감았다.
 이제 일이 생긴 것이다.
“다녀오면 여기서 봄세.”
 이구는 회산의 마지막 말을 들으며 한없이 기뻐했다. 옥아가 있는 곳이 지옥이라도 갈 판이었다. 이구는 회산이 준 바랑을 열었다. 옥아와 회산이 나눈 편지였다. 그러나 편지에는 별다른 내용이 없었다. 옥아와 회산이 나눈 편지 아닌 편지와 또 한 가지, 이구가 태어나서 처음 보는 많은 돈.
 
     그 성성한 보리수 아래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그 황막한 자갈의 사막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사람이 다니지 않은 풀섶 풀섶
     오늘도 사라져버린 길을 찾는다.
     그러나 사방 어디에도 길은 없다.
     소란스러움, 그리고 사나움
     바람을 따라가던 사람들
     물결을 따라가던 사람들
     지금 내 앞에는 아무도 없다.
 

삽화 염정우

 
 일본군들은 조선 여성을 유난히 좋아했다. 일본의 여성들과는 달리 정조관념이 투철했던 조선 여성을 더 선호했다는 것은 기록에서뿐만 아니라 범죄에 동참했던 당시 현역 일본군들의 증언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당시 일본인들은 강제로 데려온 각국의 여성들에게는 성병검사를 실시하였지만 유독 조선 여성은 대부분 실시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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