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장산 중턱.
 뱀 꼬리처럼 꼬부라진 산길.
 옥아와 이구가 앉아 있었다. 패랭이 꽃밭이었다. 아랫마을을 내려다보면서. 옥아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꽃잎 하나를 입에 물었다. 옥아는 이구와 이렇게 둘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끼고 있었다. 옥아는 일부러 자꾸만 자신의 눈과 마주치려는 이구의 눈을 피했다. 이구는 단호한 표정이었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이구는 언제나 옥아 앞에서는 말 한마디 행동 하나를 조심했다. 그런데 오늘은 아니었다. 옥아는 미안했다. 정작 간도 바람을 넣은 것은 자신이었기 때문이었다.
“작년엔 동구 밖 버찌가 익으면 간다고 했지요. 재작년엔 산에 참꽃이 피면 간다고 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어요. 밤낮으로 먹는 것에만 매달려 살아야 한다면 그건 짐승이나 한 가지지요. 전택경이 절 노리고 있습니다.”
“전택경은 조선인이면 누구든 노리지요.” 
 옥아는 한숨을 쉬었다. 기실 자신이 떠나지 못하는 것은 순전히 회산 때문임을 알고 있었다. 옥아는 바로 옆의 이구에게서 나는 거친 숨소리를 듣고 있었다. 회산에게서는 느끼지 못한 숨결이었다. 땀 냄새였다. 옥아는 이구의 말을 들으면서도 줄곧 회산의 얼굴을 그리고 있었다. 스님은 전택경과 만나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하루하루가 지옥입니다. 가족이 없는 아씨 스님은 모를 겁니다.”
 이구의 그 말이 옥아의 가슴을 찔렀다. 정말 아팠다. 그렇다면 내게는 가족이 없는 것인가. 자신은 여태 회산과 김처사를 가족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구는... 옥아는 비로소 이구의 눈을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풀 죽 한 사발에 목숨을 거는 가족들을 보느니 차라리 내가 먼저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처음에는 저 대신 보국대로 끌려간 형님에게 미안했습니다. 너무 미안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형님이 원망스럽습니다. 온 가족의 명줄을 내게 맡긴 하늘이 원망스럽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옥아는 알고 있었다. 그것은 비단 이구 집안의 문제가 아니었다. 하룻밤에 몇 마을이 비고 있었던 것이다. 옥아는 이제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회산 때문이었다.

 

 

 

 꼭 시계추처럼 소쩍새, 부엉새가 우는 밤.
“스님, 총독부가 필요하다면 저도 보내시겠네요?”
 옥아의 말에는 가시가 돋쳐있었다.
 회산이 멀거니 그녀를 올려보았다.
“김처사님께는 말씀하셨습니까?”
“아니.”
“처사님이 가시겠어요?”
“가시겠지. 처사님은 가족도 없는데.”
“가족이 없는 사람도 있나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울음이 묻어났다. 이구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냐?”
“전 스님이 그런 사람들 만나는 것 싫어요. 왜 그런 사람들 만나세요?”
“안 만나면?”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도 해야 했다.
“스님은 조선 사람 아니세요?”
“글쎄.”
“처사님은 절대 안 돼요. 그는 우리 가족이잖아요.”
“그럼, 마을 사람들은 우리 가족이 아니라서 괜찮고?”“어쩔 수는 없어도 일부러 나서서 보낼 필요는 없잖아요.”
“아마 김처사님은 가실 게다.”
“처사님 나이가 몇인 줄 아세요?”
“나보다 열 살이 많다. 내가 아주 어릴 때 만났지. 나보다 부처님을 몇 백배 잘 따르는 분이야. 그분이 왜 머리를 깎지 않는 줄 아느냐?”
“예?”
“우리 때문이다.”
“그걸 알고 계시면서......”
 바로 그때, 밖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스님, 저는 갑니다.”
 김처사였다. 김처사는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어떤 경우에도 자신보다 나이 어린 회산의 말을 듣지 않은 적이 없었다. 옳고 그른 것은 뒷전이었다. 판단을 하지 않았다. 김처사는 회산의 심부름으로 눈코 뜰 새가 없었다. 무슨 일인지 부산, 간도, 평양, 경성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그러고도 절 살림은 모두 도맡아 했다. 잠시도 몸을 놀리는 법이 없었다. 
“옥아, 서양의 어느 시인이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대로 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머지않아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내 말 알겠냐?”
 무슨 말인지 알지 못했다.
“김처사님은 바로 그렇게 살고 계신 분이다.”
 거기서 옥아와 회산의 이야기는 중단되었다. 옥아는 아주 조용히 물러났다. 언제나 부드러운 회산, 그런데도 김처사와 옥아는 회산이 천자문을 보라면 천자문을 보았고, 당장 내일 이사를 가자면 그날 저녁 짐을 쌌었다. 옥아와 김처사의 의견은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이번엔 회산에게 지고 싶지 않았다. 여직 한 번도 이겨보질 못했던 것이다.

 

 

 

 항상 바깥에서 일만 하는 김처사가 방으로 들어가기를 기다려 옥아는 김처사 처소를 침입했다. 방안에 가득 찬 영감 냄새. 옥아는 코맹맹이 소리를 하기로 하였다. 어리광을 부리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눈물 대신 콧속에 물이 차서 그런지는 옥아 자신도 알지 못했다.
“처사님, 우리 금강산으로 가요.”
“누구하고요?”
“우리 셋이요.”
 김처사가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옥아의 눈에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려 있었다. 이런 분이 아버지였으면. 옥아는 솟구쳐 오르는 눈물을 감추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김처사가 희미하게 웃었다.
 “아씨 스님?”
 “예?”
 “아씨 스님은 글을 잘 알지요?”
 “무슨 말씀이세요?”
 “저는 까막눈입니다.”
 진짜로 김처사는 글을 볼 줄 몰랐다.
 “스님께서 아씨 스님께는 그렇게 죽도록 글을 가르치면서 저는 가르쳐 주질 않았습니다.”
 옥아는 할 말이 없었다.
 “전 그 이유를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왜요?”
 옥아는 정말 알고 싶었다.
 “흐흐흐, 나 일 부려먹을라구.”
 옥아는 웃지 못했다.
 그런데도 김처사는 한껏 웃었다.
 “아마 내가 일찍 글을 알았으면 아씨 스님도 만나지 못했을 겁니다. 벌써 스님 곁을 떠났겠지요. 스님은 누구보다도 그걸 잘 알고 계신 분이지요.”
 “글을 모르는데 어떻게 그렇게 신의주로, 평양으로 책을 구하러 다니지요?”
 “스님이 원하는 책이 그곳에 있으니까요.” 
 그만한 거짓말에 넘어갈 옥아는 아니었다. 나쁜 김처사님. 신의주에 무슨 책이 있으며, 간도 어디에서 책을 구한단 말인가? 옥아는 김처사를 쳐다보며 슬쩍 웃었다. 옥아는 늘 김처사가 이처사가 아닌 걸 아주 다행으로 여기고 있었다. 이씨 조선이 싫었던 것이다.
 “간도에도 스님이 보실 책이 있던가요?”
 그런데 당황해야 할 김처사가 기다렸다는 듯 싱긋 웃었다.
“스님이 원하는 책은 책방에서 구하는 책이 아닙니다.”
“예?”
“나중에 스님의 곁방을 뒤져보세요. 모올래.”
 김처사가 또 웃었다.
 어차피 김처사와는 진지한 대화를 할 수 없었다. 김처사는 옥아보다, 아니 회산보다 몇 수 위인 것이다. 옥아는 입맛을 다셨다. 이 분은 회산을 따라다니면서 무얼 보고, 무얼 배운 것일까? 누구를 닮았을까?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검은 안색에 건장한 체격, 그렇지. 회산과는 아주 정반대의 형상. 술 냄새와 담배 냄새를 끔찍이도 싫어하는 그녀였지만 오직 한 사람, 김처사의 냄새는 달랐다.
“절대로 처사님을 보낼 수는 없어요.”
 옥아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일본 좋지요.”
“거기 가면 죽어요.”
 김처사가 고개를 흔들었다.
“여기서도 죽어요.”
“당장 내일이라도 여기를 떠나면 되잖아요? 우리가 그런 일 한두 번 했나요?”
“난 이제 산이 싫어요. 하도 나무를 많이 했더니...... 나무가 무슨 죄가 있다고.”
 옥아는 어이가 없었다.
“거기 가서 무슨 일을 하는지 아세요?”
“탄광에서 일하겠지요. 아니면 비행기 활주로를 만들든가.”
“다 알고 계시네요?”
“마을 사람들 귀동냥을 했지요.”
“그런데요?”
“아씨 스님,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는 제가 알지요. 그렇지만 회산스님이 가라고 한다면 이유가 있겠지요.”
“이유 없어요.”
“그럴까요. 하기야 이제 내가 늙어서 스님에게 필요가 없는지도 모르지요.”
 김처사가 또 웃었다.
“제가 다시 스님께 말씀드릴게요.”
“아마, 안 될 겁니다. 제가 고집이 세거든요. 허허.”
 옥아는 회산에게서처럼 순순히 물러설 수 없었다.
“저는 처사님보다 고집이 더 세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