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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종의 ‘불전으로 읽는’ 붓다 일대기㉟

이학종 | urubella@naver.com | 2020-05-29 (금) 07:47

야차들을 제도하다
 
붓다가 대각을 이룬 지 16년째 되던 해였다. 그때 알라위 국의 왕이 뱅골 보리수에 살고 있는 식인귀(食人鬼) 야차 알라와까(Ālavaka)에게 사로잡히는 일이 발생했다. 왕은 야차 알라와까에게 매일 한 사람을 제물로 바치기로 약속하고 가까스로 풀려났다. 왕은 대신들의 도움으로 처음에는 죄수들을 제물로 바쳤으나 오래지 않아 죄인들이 다 바쳐지고 나자 각 가정의 어린아이들을 바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알라위 국의 여인들은 자기 아이의 차례가 다가오면 아이를 데리고 도시를 떠나기도 했다. 왕은 이렇게 끔찍한 대가를 치르며 12년을 버텼으나 곧 한계에 부딪치게 되었다. 마침내 왕자인 알라와까 꾸마라(Ālavaka Kumāra)만이 남게 되어 제물로 바쳐질 차례를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다. 왕은 왕자에게 옷을 잘 입히고 치장하여 야차에게 데려갔다.
그때 붓다가 천안으로 이 광경을 보고 야차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순식간에 찾아갔다. 그러나 야차들의 우두머리 알라와까는 히말라야에 가 있었다. 주인이 없는 야차들의 궁전에 도착한 붓다를 문지기 가드라와(Gadrava)가 붓다를 안내해 궁 안으로 모셨다. 가드라와는 붓다에게 무례하게 대하는 야차들을 꾸짖으며 붓다를 궁전 안으로 인도했다. 붓다는 가드라와가 붓다의 방문을 알리기 위해 히말라야로 떠난 사이에 알라와까의 보좌에 앉았다. 붓다는 알라와까의 궁녀들과 야차 싸따기라와 헤마와따에게 설법을 했다. 그들은 붓다의 설법을 듣고 크게 개심하여 붓다에게 경의를 표하고 알라와까가 있는 히말라야로 향했다. 알라와까는 가드라와와 싸따기라, 헤비와따로부터 붓다의 방문소식을 듣고 크게 화를 내었다. 그는 잠부디빠 전체를 진동시킬 만큼 큰 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외치며 궁으로 돌아왔다. 그는 자신의 보좌에 앉아 있는 붓다를 끌어내리기 위해 온갖 신통력을 동원했으나, 붓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붓다에게 가까이 다가가 말했다.
 


 
“수행자여, 나가시오.”
“벗이여, 좋습니다.”
 
붓다는 순순히 야차왕의 말을 따랐다. 그러자 야차가 다시 말했다.
 
“수행자여, 들어오시오.”
“벗이여, 좋습니다.”
 
세존이 다시 들어오자 알라와까가 다시 말했다.
 
“수행자여, 나가시오.”
“좋습니다. 벗이여.”
 
이렇게 나가고 들어오기를 세 차례나 거듭한 알라와까가 네 번째로 다시 나가라고 말하자, 붓다가 대답했다.
 
“벗이여, 나는 더 이상 나가지 않겠소. 그대 할 일이나 하시오.”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는 붓다를 향해 알라와까가 협박했다.
 
“수행자여, 그대에게 묻겠습니다. 만일 그대가 내게 대답을 못하면, 당신의 마음을 산란하게 하고 당신의 심장을 찢은 뒤, 두 다리를 잡아 강가(갠지스) 강 건너로 내던질 것이오.”
 
야차 왕의 협박에도 미소를 잃지 않은 붓다가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벗이여, 신들과 악마들과 천신들의 세계에서, 성직자들과 수행자들, 그리고 왕들과 백성들과 그 후예들의 세계에서, 내 마음을 산란하게 하고 내 심장을 찢고 두 다리를 잡아 강가 강 건너로 내던질만한 자를 나는 아직 보지 못했소. 벗이여, 그대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거든 무엇이든 물어 보시오.” 
 
붓다의 말이 끝나자 알라와까가 물었다.
 
“수행자여, 세상에서 사람의 으뜸가는 재산은 무엇이고, 무엇을 잘 닦아야 안락을 가져오며, 무엇이 참으로 가장 감미로운 맛이고, 어떠한 삶이 최상의 삶이라고 일컬어지는가?”
“믿음이 세상에서 으뜸가는 재산이고, 가르침을 잘 닦아야 안락을 얻으며, 진리가 참으로 가장 감미로운 맛이고, 지혜로운 삶이 최상의 삶이라고 아시오.”
“사람은 어떻게 거센 흐름을 건너는가? 어떻게 커다란 바다를 건너고, 어떻게 괴로움을 뛰어넘는가? 그리고 어떻게 완전히 청정해질 수 있는가?”
“벗이여, 사람은 믿음으로 거센 흐름을 건너고, 방일하지 않음으로 커다란 바다를 건너며, 정진으로 괴로움을 뛰어넘고, 지혜로 완전히 청정해 질 수 있음을 아시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떻게 해서 지혜를 얻습니까? 또 어떻게 해서 재물을 얻으며, 어떻게 해서 명성을 떨칩니까? 그리고 어떻게 해서 친교를 맺으며, 어떻게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가서 슬픔을 여의는가?”
“벗이여, 열반에 도달하기 위하여 거룩한 님의 가르침을 믿고 방일하지 않고 현명한 자라면, 배우려는 열망을 통해 지혜를 얻는다오. 알맞은 일을 하고 멍에를 지고 열심히 노력하는 자는 재물을 얻고, 진실함으로 명성을 떨치고, 보시함으로 친교를 맺는다네. 가정생활을 하는 신도일지라도, 진실 진리 결단 보시라는 네 가지의 원리를 갖추면 내세에 가서도 걱정이 없다네. 그리고 진실과 자제, 보시와 인내보다 세상에 더 나은 것이 있다면, 그것을 널리 수행자나 바라문에게 물어보도록 하시오.”
 
붓다의 설명을 들고 감동과 함께 귀의의 마음을 낸 순간 야차의 왕 알라와까는 성자의 흐름에 들었다. 알라와까가 붓다에게 예의를 표하며 말했다.
 
“스승이시여, 어찌 다른 수행자들이나 바라문들에게 물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미래의 삶에 유익한 것을 저는 오늘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깨달은 님께서 알라위에서 지내려고 오신 것은 참으로 저에게 유익했으니 커다란 과보가 있는 가르침을 받았음을 오늘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올바로 깨달은 님과 잘 설해진 가르침에 예경하면서 저는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이 산에서 저 산으로 돌아다닐 것입니다.”     
 
날이 밝자 알라위 국의 왕과 신하들이 알라와까 꾸마라 왕자를 제물로 바치기 위해 야차를 찾아왔다. 왕자를 제물로 바치기 위해 궁으로 들어서는 순간, 그들은 야차들의 환호소리를 듣고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놀란 가슴을 달래며 알라위 국의 왕이 야차왕에게 왕자를 제물로 바치러 왔다며 건네려 하자 야차 알라와까는 붓다가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야차왕은 왕자를 붓다에게 건넸고, 붓다는 아이를 축복한 후 왕과 신하들에게 돌려주었다. 이 아이는 훗날 알라와까의 손에서 붓다의 손으로 건네졌다는 의미에서 핫타까 알라와까로 불렸다. 알라위국 왕과 신하, 시민들은 공포스러운 야차왕 알라와까가 붓다의 제자가 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벳싸와나(Vessavana) 근처에 특별한 궁전을 마련하고 꽃과 향료를 보시했다.  
 
기생을 짝사랑한 비구, 성자가 되다
 
라자가하에 시리마(Sirimā)라는 빼어난 미모를 지닌 유명한 기생이 있었다. 그녀는 살라와띠(Sālavatī)의 딸로 붓다의 주치의 지와까(Jīvaka)의 여동생이기도 했다. 아름다움과 총명함을 갖춘 그녀는 뭇 사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녀가 어느 해 우기철에 재정관 수마나의 며느리이자 재정관 뿐나까의 딸인 웃따라에게 뜨거운 기름을 부운 적이 있었다. 이 일로 웃따라와 시리마는 소원한 사이가 되었는데, 마음씨 고운 웃따라가 시리마와 다시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며 시리마를 용서해줄 것을, 붓다와 비구들을 공양초청한 날 붓다에게 요청했다. 붓다는 웃따라의 고운 마음을 수용해 시리마에게 적절한 법문을 내렸다.
 
“자애로써 분노를 이기라. 선으로써 악을 이기라. 베풂으로써 인색한 자를 이기라. 진실로써 거짓말쟁이를 이기라.”
 
시리마는 이 법문을 듣고 그 자리에서 성자의 흐름에 드는 경지, 즉 수다원과를 성취했다. 시리마는 수다원과를 얻고 난 다음 날 붓다와 비구들을 집으로 초청해 공양을 올렸다. 그날부터 그녀는 여덟 개의 음식표에 따라 매일 여덟 명의 비구에게 공양을 올렸다.
 
“버터기름을 받으십시오. 우유를 받으십시오.”
 
시리마는 비구들의 발우에 음식을 넣어드리면서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녀가 비구 한 명에게 올리는 공양은 서너 명이 먹어도 충분할 만큼 넉넉한 양이었다. 이렇게 공양을 올리기 위해 그녀는 매일 적지 않은 돈을 지출했다.
어느 날 한 비구가 여덟 개의 음식표 중 하나를 받아 그녀의 집에서 공양하고 3요자나를 걸어 어떤 사원에 들렀다. 저녁이 되어 사원에 앉아 있을 때 비구들이 그에게 물었다.
 
“여기 오기 전에 어디서 공양하셨습니까?”
“시리마가 매일 여덟 명의 음식표에 따라 올리는 음식을 받아먹었습니다.”
“그녀가 올리는 음식 맛은 어떻습니까?”
“그녀가 올리는 음식 맛을 말로 설명하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녀가 올리는 음식은 최상의 재료로만 만든 것입니다. 또 음식량이 많아 1인분을 서너 사람이 먹어도 충분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음식도 좋지만 그녀를 보는 것만으로도 기쁨이 넘칩니다. 그녀의 뛰어난 아름다움은 음식 맛보다 더 설명하기가 불가능합니다.”
 
그 비구는 이렇게 시리마에 대해 최상의 찬사를 늘어놓았다.
이 이야기를 들은 한 비구가 시리마를 한 번도 본적이 없었는데도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그는 그녀를 꼭 만나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꾸띠로 돌아가면서 시리마에게 공양을 받았던 비구에게 어떻게 하면 시리마의 집에 가서 공양을 받을 수 있는지를 물었다. 그러자 그 비구는 내일 웰루와나로 가 아침 음식표를 배정하는 방으로 들어가서 장로인체 하고 앉아 있으면 여덟 장의 음식표 중 하나를 배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비구는 즉시 가사와 발우를 챙겨 웰루와나로 향했다. 다음 날 아침 그는 일찍 일어나 음식표를 배정받는 방으로 가서 장로인 체하고 앉아 있다가 시리마의 집에서 주는 음식표를 받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시리마는 돌연 병에 걸려 직접 공양을 올리지 못하고 하녀들에게 대신 공양 올릴 것을 시킨 후, 나중에 예경을 올리기 위해 부축을 받으며 나와 간신히 비구들에게 절을 올렸다. 
이 비구는 시리마의 모습을 보는 순간 욕정이 불타오른 것을 주체할 수 없었다. ‘병이 들었는데도 이렇게 아름다운데 건강한 몸으로 화장하고 장신구를 달고 있으면 얼마나 아름다울 것인가!’ 주위가 텅 빈 것처럼 그녀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음식을 먹을 수조차 없었다. 그는 사원으로 돌아가 발우 뚜껑을 닫아 한쪽 구석에 처박아놓고 가사를 뒤집어쓴 채 누워 시름시름 않기 시작했다. 친한 비구가 와서 공양할 것을 권해도 그는 끝내 먹기를 거부했다.
한편 시리마는 병에서 회복되지 못하고 그날 저녁 죽어버렸다. 빔비사라 왕은 신하를 보내 붓다에게 그녀의 죽음을 알렸다.
 
“세존이시여, 지와까의 막내 여동생 시리마가 죽었습니다.”
 
붓다는 이 소식을 듣고 왕에게 말을 전했다.
 
“시리마의 시신을 화장하지 말고 화장터에 그대로 놔두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까마귀와 개들로 인해 시체가 훼손되지 않도록 지켜 주십시오.”
 
왕은 붓다의 부탁대로 시리마의 시신을 보전했다. 3일이 지나 4일째가 되자 시체가 푸르뎅뎅하니 부풀어 오르고 아홉 구멍에서 상처가 나서 피고름이 흐르고 구더기가 기어 나왔다. 왕은 부하들을 시켜 북을 치며 온 도시에 시리마의 시신을 구경하도록 알렸다. 붓다 역시 비구들을 다 대동하고 시리마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화장터로 향했다. 나흘 동안 끙끙 앓고만 있던 문제의 비구도 ‘시리마를 보러가자’는 말에 벌떡 일어나 동료들의 부축을 받으며 화장터로 향했다.  
붓다는 비구들과 함께 시리마의 시체가 놓인 한 쪽에 자리 잡고 앉았다. 비구니들과 왕, 신하, 남녀 재가신도들은 시신의 반대편에 자리를 잡았다. 다른 시민들도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모두가 자리를 잡자 붓다가 왕을 향해 물었다.
 
“대왕이여, 이 여인이 누굽니까?”
“세존이시여, 이 여인은 지와까의 여동생 시리마입니다.”
“시리마가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이 여인이 시리마가 맞으면 북을 울리고 ‘누구든 일정한 액수의 돈을 내면 시리마를 데려갈 수 있다’고 공지하시겠습니까?”
 
붓다의 말을 들은 왕은 북을 울리고 공지하도록 신하들에게 명령했다.
 
“누구라도 돈을 내면 시리마를 데려갈 수 있다. 누구라도 시리마를 데려갈 수 있다. 누구라도…”
 
그러나 단 한 사람도 시리마를 데려가겠다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 나서기는커녕 조그만 움직임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붓다가 다시 말했다.
 
“왕이시여, 그렇다면 가격을 내려 보십시오.”
 
그러나 점차 가격을 내려도 시리마의 시체를 가져가겠다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왕이 마지막으로 ‘그냥 가져가도 좋다’고 공지했지만 여전히 시리마의 시체를 갖겠다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자 붓다가 비구들을 향해 말했다.
 
“비구들이여, 군중들은 이 여인이 아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 도시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이 여인과 하룻밤을 보기기 위해 큰돈의 지불도 마다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제는 거저 가져가라고 해도 데려가려는 사람이 없다. 여인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이렇게 사라져 없어지는 무상한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 시체가 썩어가는 모습을 자세히 보라.”
 
썩어문드러지는 시신을 본 비구들의 얼굴에는 역겨움과 불편함이 서렸다. 이 자리에 모인 대중들의 표정은 말할 것도 없었다. 잠시 침묵하던 붓다가 게송으로 법을 설했다.
 
보라, 이 분칠한 모습을.
뼈마디로 엮어 이루어지고
오물로 가득 찬 가죽주머니를.
자주 병들고
번뇌망상으로 가득한 몸뚱이를.
이곳 어디에 항상함이 있고 견고함이 있는가?
 
붓다의 설법을 듣고 있던 한 비구, 시리마를 짝사랑했던 비구는 붓다의 게송이 끝나는 동시에 성자의 흐름에 들었다.    
 
진실에 이르는 다섯 가지 실마리
 
붓다의 전법 여정은 중단 없이 계속됐다. 코살라 국에 머물던 고따마 붓다는 왕국의 전역을 종횡으로 누볐다. 때로는 초청에 따라, 때로는 자진해서 도시와 마을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한 번은 깔라마 족에 속한 께사뿟따라는 작은 도시에 들렀던 적이 있었다. 이곳은 수많은 고행자와 방랑수행자들이 자주 지나치는 곳이었지만, 깔라마인들은 어느 특정 종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사끼야 족 왕자 출신 고따마 붓다가 마을에 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깔라마 지도자들이 모여 붓다를 토론에 초대했다. 초대를 받아 온 붓다에게 깔라마인들이 물었다.
 
“세존이시여, 사문과 바라문들이 잇따라 께사뿟따에 옵니다. 그들은 각기 자기가 생각하는 선과 악, 정과 사에 관한 견해를 설명합니다. 그들에게 우리가 이전에 들었던 다른 견해를 이야기하면 그들은 한결같이 남들의 견해를 비방하고, 자화자찬에 열을 올립니다. 우리는 그들의 태도에 당황하고 그들의 생각을 의심하게 됩니다. 누가 진실을 말하며, 누구 말이 그른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깔라마인들이여, 여러분들이 어리둥절해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의심할 수밖에 없는 것에 의구심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여러분들이 선과 악, 정과 사를 탐구함에 있어 몇 가지 피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그것이 무엇인지 듣고 싶습니다.”
“깔라마인들이여, 전적으로 전통에 의지하는 것은 정당하게 선악을 판단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보고, 혹은 바람을 타고 온 소문, 그리고 경전의 권위에 대한 의존도 마찬가지입니다. 논리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다거나, 그럴싸한 추론이 진실한 것이 될 수도 없습니다. 생김새로 봐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 전제니까, 이 경우에는 이게 옳을 듯해서, 혹은 스승에 대한 존경심 등의 이유는 바르게 선악을 판단하는 준거가 되지 못합니다.”
“세존이시여, 당신은 우리가 무언가를 판단하고 알아낼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열거하고 부정했습니다. 그것 말고 무슨 수로 선악과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알 수 있습니까?”
 
청중 가운데 한 사람이 일어나 물었다. 붓다는 이들이 올바른 기준을 가지고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해주는 것이 필요하겠다고 판단, 설법을 시작했다. 
 
“깔라마인들이여,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사악한 행위는 탐욕과 증오와 무지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밖에 다른 원인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이유들은 모두 그 범주 안에 들어갈 것입니다.”
“실로 이 세 가지가 모든 악행의 근원입니다. 깔라마인들이여, 이 탐욕과 증오와 미혹에 의해 유발된 행위는 자신은 물론 남들을 해롭게 하고 괴롭히는 것입니다. 현자들이 비난하고 질책하고 경멸하는 그런 행위가 선입니까? 혹은 악입니까?”
“세존이시여, 그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 말은 곧, 탐욕과 증오와 미혹에 의해 유발되지 않은 것, 그리고 사람들을 번영과 행복으로 인도하는 것이 바로 선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깔라마인들이여, 선과 악을 판단하고 결정하는데, 전통, 보고, 풍문, 경전의 권위, 논리, 추론, 외관, 공준(Postulate, 公準), 적합성, 혹은 스승에 대한 존경심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은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어떤 행위의 결과를 미리 짐작할 수 없을 때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그대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누군가 알 만한 사람에게 묻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올바른 이해는 두 가지 조건에 의해 성립됩니다. 첫째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들은 것과, 둘째는 그렇게 받아들인 것을 연기의 원리에 따라 다시 숙고하는 것입니다.”
“자세하게 설명해주십시오. 세존이시여.”
“우선, 우리가 이해할 필요가 있는 상황에 생소하거나 전혀 경험이 없다면, 우리는 그것에 대한 지식을 가진 사람을 의존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존이시여,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자기가 말하는 것이 진실이라고 주장하는 사기꾼을 믿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럴 때, 어떻게 그게 옳은지 그른지 확인할 수 있습니까?”
“깔라마인들이여, 사람들이 진실에 이르는 다섯 가지 실마리가 있습니다. 신뢰, 기호, 전통, 외관, 그리고 이미 수락한 공준에 참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다섯 가지 실마리는 각각 두 가지 결론을 만들어냅니다. 때로 선의의 신뢰감으로 받아들인 것이 그릇되고 공허하며 실제와 다른 것일 수 있는가 하면, 확신을 가지고 부정해 버린 것이 오히려 진실이고 실제 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깔라마인들이여, 오직 이것만이 참이요, 나머지는 모두 그릇된 것이라는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으로부터 들은 것을 참인지 그릇된 것인지 판단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미 탐욕과 증오와 미혹에 의해 유발된 소행이 악이라고 규정한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신뢰하고 귀를 기울이고자 하는 사람이 탐욕과 증오와 미혹에 자극된 사람인지 밝혀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이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지 면밀히 살펴봄으로써 가능합니다. 그것이 곧 가장 정확한 잣대가 될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이 다름을 알았을 때, 어찌해야 되겠습니까?”
“깔라마인들이여, 그것을 알았다면, 다음에 할 일도 안 것이 아닙니까?”
“세존이시여, 그렇습니다. 더 이상 그를 신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과 행동이 일치할 때, 우리는 그를 신뢰하고 그가 말하는 것을 모두 받아들여야 합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깔라마인들이여. 그대들은 그를 신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단지 신뢰감을 근거로 모든 것을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스승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신뢰하는 스승이라고 해서 그가 말하는 것이라면 모두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때 내가 이미 언급한 두 번째 조건이 매우 중요하게 됩니다. 즉 의존적 발생의 원리에 따른 숙고는 그대가 신뢰 속에 수락한 것이 진실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깔라마인들은 붓다의 명쾌한 설법에 점점 빠져들었다. 그들의 관심은 보다 본질적인 것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세존이시여, 의존적 발생의 원리에 따른 숙고란 무엇입니까?”
“깔라마인들이여, 그것은 바로 존재하는 사물이 어떻게 생성되고 변화하는지를 숙고하는 것입니다. 깔라마인들이여, 어떤 사물이 생겨날 때 그것은 스스로 일어난 것입니까? 혹은 다양한 요소와 조건에 의존하여 발생한 것입니까?”
“세존이시여, 우리가 아는 바로는 이 세상에 그것 스스로 생겨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깔라마인들이여, 만약 지금까지 우리가 경험한 것 모두가 의존적으로 발생한 것이라면, 어떤 사물이 일어나도록 한 조건들을 무시하고 그 사물을 있는 그대로 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따라서 깔라마인들이여, 그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되돌아보십시오. 지금까지 그것들은 의존적으로 발생해 왔습니다. 사물이 어떻게 일어났으며, 어떻게 소멸하는지 신중하게 숙고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악을 피하고 선을 증진시키게 합니다. 깔라마인들이여, 악을 피하고 선을 늘리는 것, 이것이 모든 정각자, 깨달은 사람들의 가르침입니다.”
 
한번도 들어본 일 없는 명쾌한 설법에 깔라마인들은 붓다에게 귀의하고 이후 성실한 신봉자가 되었다.
 
‘언어는 항상 변화의 흐름 속에 떠 있는 것’
 
고따마 붓다가 사왓티의 기원정사에 머물고 있던 어느 날, 비구들과 함께 정진하던 쑤부띠(須菩提)가 기쁨에 넘치는 감흥을 한 편의 시구를 읊었다.
 
“지붕 잘 덮이고 바람은 솔솔
비야 뿌리려면 마음껏 뿌려봐라!
잘 길들여 깨있는 마음 편안하기만
비야 쏟아지려면 얼마든지 쏟아져라!”
 
쑤부띠의 시구를 들은 몇몇 젊은 제자들은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아리송하기만 했다. 고민하던 그들은 붓다를 찾아가 물었다.
 
“스승이시여, 쑤부띠 존자가 말하기를 ‘오두막 지붕은 잘 덮이고 통풍도 잘 된다. 잘 길들여져서 항상 깨어 있는 마음은 편안하다’고 했습니다. 오두막과 그분의 삶에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저희는 뭐가 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비구들이여, 쑤부띠는 세상과 부딪치지 않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내 제자들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제자 중 하나다. 그가 말하는 오두막은 정신(名)과 육체(色)의 조합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말하는 것이다. 그의 마음이 잘 제어되었을 때, 그의 육체와 정신은 외부로부터 오는 감각적 자극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세속적인 일들, 말하자면, 이해득실, 명성 혹은 오명, 칭찬이나 비난, 쾌감 혹은 고통 따위의 비가 아무리 쏟아져도 그는 흔들림이 없다. 빗물은 그래서, 잘 덮인 그의 지붕을 뚫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게 세상의 온갖 현상에 흔들리지 않으면서도 그는 세상에 무관심하지 않다. 그는 세상을 향한 자비심으로 다른 사람들을 염려하고, 늘 깨어 있다. 이것이 바로 그의 오두막이 통풍이 잘 되어 바람이 솔솔 통한다는 뜻이다. 쑤부띠는 고립된 섬에 홀로 격리되어 바깥세상과 무관하게 사는 것이 아니다.”
 
붓다의 설법을 들은 비구들이 거듭 간청했다.
 
“스승이시여, 어떻게 하면 그런 평안과 갈등 없는 경지를 이룰 수 있는지 상세히 가르쳐주십시오.”
“비구들이여, 마음의 평안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잘 들어라.”
“예, 스승이시여.” 
“평안은 쾌락을 탐닉하거나 몸뚱이를 괴롭히는 고행으로 얻을 수 없다. 감각적 쾌락은 저속하고 천박하며, 이기적이며, 무시할 만하고, 결실이 없는 것이다. 고행 역시 고통스럽고 무시할 만하며 결실이 없다. 온화한 사람은, 이 양극단을 피하고 자신과 남을 해롭게 하지 않는 중도를 따른다. 이것이 곧 성스러운 팔정도다. 평안은 어떤 것을 인정하거나 부인함으로써가 아니라 단지 도덕적 원칙, 즉 계(戒)를 실천함으로써 온다.”
 
제자들은 약간 혼란스러웠다. 그들 가운데 하나가 물었다.
 
“스승이시여, 올바른 견해를 인정하고 사견을 부정하는 것이 잘못입니까?”
“만약 그대가 생각하는 바른 견해라는 것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 아님을 알고, 그대가 생각하는 사견이 절대적으로 그른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면 잘못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인정이나 부정은 절대적인 이분법적 사고로부터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항상 기억하라. 항상 제3의 길, 두 극단을 지양하는 중도가 있다는 것을! 그것은 오직 편견을 버리고, 어느 한쪽 극단에 경도되지 않은 사람에게만 보이는 것이다.”
 
붓다의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제자들은 한 마디도 놓치지 않기 위해 온갖 신경을 곤두세웠다. 붓다의 설법이 물 흐르듯 이어졌다.
 
“평안은 행복이 무엇인지 판단할 수 없는 사람에게 오지 않는다. 세상에 만연한 충돌과 갈등은 거의 모두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판별할 수 없는데서 온다. 사람들은 달갑고, 기껍고, 마음에 들고, 부추기고, 매혹적인 감각적 대상, 즉 형상과 소리, 냄새, 맛, 그리고 감촉대상에서만 행복을 느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감각적 쾌감으로부터 초연함으로 생겨나는 기쁨과 행복을 훨씬 수승(殊勝)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질적으로 다른 기쁨이요 행복이다. 다시 집중으로 인한 기쁨과 행복감은 그보다 훨씬 고양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온갖 형태의 행복을 초월하여, 온전한 집중과 평정으로 이루어진 제4선정에서 진정한 출가의 행복과 평화 그리고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다.”
“스승이시여, 그런 형태의 평온과 평화는 외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내적인 것이라고 해도 되겠습니까?”
“그렇다. 그러나 내적인 평온은 외적인 평화의 바탕이다. 그런 경지를 이룬 사람은 남들의 비밀을 들추거나, 얼굴을 맞대고 남을 성가시게 하는 이야기를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사람은 화난 얼굴로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며, 항상 자비심으로 사람을 대할 것이다. 설령 남의 비밀을 이야기하거나 남이 싫어하는 소리를 하더라도, 그것이 진실이고 사실이며 결실이 있는 경우에만, 그것도 적절할 때에만 할 것이다. 제자들이여, 이미 언급한 그 조건들 말고도 사회를 평화와 화해로 이끄는 또 다른 조건들이 있다. 이것은 대화하는 태도와 방법에 관한 것이다. 첫째,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이야기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서둘러 이야기하는 것은 자신을 해칠뿐더러 의사전달도 제대로 안 된다. 그런 사람은 대화에 서툰 사람이다. 세상에는 적절한 대화의 부족으로 생기는 갈등이 많다.”
“스승이시여, 대화가 어려운 이유 가운데는 수없이 많은 방언도 있습니다.”
“방언 자체가 갈등의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참으로 대화를 원한다면 그가 대화하고자 하는 사람의 말을 배우면 될 것이다. 갈등을 일으키는 원인은 방언 자체가 아니라 그 방언을 다루는 태도에 달려 있는 것이다.”
“스승이시여,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방언을 어떻게 대해야 되겠습니까?”
“제자들이여, 내가 지금 들고 있는 이 발우, 빳따(patta)를 어떤 사람은 빠띠라고 부르기도 한다. 어떤 지역에서는 윗타, 또 다른 곳에서는 사라와, 다로빠, 뽀나, 삐실라라고도 한다. 그런데 보통 ‘그릇’으로 통용되는 이 ‘빳따’라는 단어가 어떤 언어에서는 특정한 용도의 그릇을 지칭하는 말로 쓰일 수도 있다. 우리는 지금 탁발할 때 쓰는 이 그릇을 ‘빳따’라고 부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빳따’가 밥 지을 때 쓰는 솥을 가리키는 것이거나, 물 긷는 그릇이거나 밥 먹는 그릇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빳따’라는 단어가 오직 이것만을 뜻하며, 나머지는 모두 틀렸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아닙니다. 스승이시여,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자들이여, 인간 갈등의 가장 주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다. 사용하는 단어가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언어를 대하는 태도가 문제인 것이다.”
“스승이시여, 어떻게 그런 불화와 갈등을 피할 수 있습니까?”
“현명한 사람은 특정 단어의 어원에 집착하지 않고, 언어의 공통성을 너무 확장시켜 해석하지 않는다. 대신 이 말이 여기서는 이런 뜻으로 사용된다고 알면 그렇게 사용하면 될 것이다. 이것이 곧, 특정 지역의 어원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요, 공통어법을 어기지 않는 것이다.”
 
출가하기 전에 바라문 사제로 전통적인 언어학을 전공한 나이든 제자가 의문을 제기했다.
 
“스승이시여, 어원학과 문법은 전통적인 언어학의 두 갈래입니다. 일반적으로 어원분석을 통해서 언어의 근본요소를 취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마치 존재의 근본요소를 찾아내듯이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문법을 통해서는 언어의 근본요소들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으며, 이 관계는 곧 가장 넓은 의미의 보편성의 반영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 그것이 바로 전통적인 철학자들의 언어에 관한 이해다. 그것은 실재에 관한 자기들의 개념, 아트만과 브라흐마, 개체와 전체라는 구도에 모순되지 않고 상호 호환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실재를 체험한 적이 없다. 따라서 내가 체험한 사실을 표현하기 위한 언어의 개념은 바라문 전통에 따른 언어 개념과는 다른 것이다.”
“스승이시여, 그것은 전혀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입니다. 실로 희유하고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는 아직까지 언어에 어원학과 문법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부디 세존이시여, 우리에게 언어의 본질을 설명하여 주십시오.”
“신중히 들으라, 제자들이여! 언어 속에는 분석으로서의 어원학과 종합으로서의 문법만 있는 게 아니다. 첫째, 언어 속에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합의와 관례가 들어 있다. 이 소리, 혹은 이런저런 소리의 조합, 그리고 이런저런 자음과 모음의 조합이 우리가 경험하는 어떤 대상을 지칭한다는 합의가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 언어는 이렇게 합의에 기초한 것이며, 이 합의는 집단과 사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각각 환경과 요구가 다르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언어는 정체된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필요에 따라 끊임없이 바뀌고 변화한다. 아마 우리는 지금 우리 조상들보다 훨씬 많은 어휘를 사용하고 있을 것이다. 언어는 항상 변화의 흐름 속에 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용법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언어란 대화의 수단이지, 성스러운 것으로 신전에 모셔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언어를 ‘빠나띠(pannatti)’라고 한다. 체험의 표현이란 뜻이다.”
“하지만 스승이시여.” 언어학자가 이의를 제기했다. “그런 용어는 아직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런 단어가 이전에 없었다는 것은 나도 안다. 그래서 내가 이미 말하지 않았는가. ‘언어는 항상 변화의 흐름 속에 떠 있는 것’이라고. 이미 있는 용어가 정형화된 의미로 쓰일 때, 한 가지의 좁은 의미로 굳어버렸을 때, 새로운 체험을 표현할 다른 방법이 없을 때, 사람들은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적절한 용어를 모색하게 된다. 지혜를 표현할 때 사람들은 누구라도 ‘빠냐(panna)’라는 단어를 쓴다. 그러나 내가 보는 지혜는 근본적 실재에 관한, 혹은 절대적 진리에 관한 지식이 아니라, 조건에 따라 일어나고 소멸하는 현상에 관한 지식이다. 그래서 언어는 ‘앎’이나 ‘아는 것’이 아니고 ‘알게 해주는 것, 알게 만들어 주는 것, 지시하는 것, 빠나띠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혜의 표현’으로서의 언어는 실재, 근본, 혹은 절대의 언어가 아니라, ‘연기(緣起)의 언어’여야 할 것이다.”
 
이 설법이 끝나면서 붓다에게 질문을 거듭했던 제자 앙가니까-바라드와자는 깨달음과 해탈을 이루었다. 그가 해탈의 벅찬 감회를 게송으로 읊었다.
 
잘못된 청정을 찾아
숲 속에서 불을 섬겼네.
청정의 길 알지 못하고
영생을 찾아 고행 닦았네.
 
그러나 고행의 길 다시 밟지 않고도
행복을 통해 행복 찾았노라!
보라, 이 불법의 아름다움!
삼명(三明)을 얻고 붓다가 가리킨 곳, 끝에 이르렀노라!
 
내 일찍이 범신의 자식이더니,
이제야 비로소 참 바라문 되었네.
비로소 깨끗이 닦고,
평안하네, 지혜의 눈 얻었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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