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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종의 ‘불전으로 읽는’ 붓다 일대기 ㉜

이학종 | urubella@naver.com | 2020-05-08 (금) 12:32

최초의 여성재가자 장로 위사카
 
위사카는 사왓티에 살고 있는 부유한 여인으로, 많은 자녀와 손자를 두고 있었다. 붓다가 사왓티에 머물고 있던 어느 날, 위사카는 붓다와 그 제자들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 공양을 올리겠다고 요청했다. 전날 밤에는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해 다음날 아침까지도 계속됐다.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세존과 비구들은 비를 맞으며 위사카의 집으로 향했다. 쏟아지는 비에 비구들은 어쩔 수 없이 가사를 벗어 겨드랑이에 끼고 상반신을 드러낸 채 위사카의 집에 도착했다. 붓다와 비구들이 공양을 다 마치자 위사카가 붓다에게 다가와 물었다.
 
“세존이시여, 저에게는 여덟 가지의 소원이 있습니다. 저의 소원을 들어주시겠습니까?”
“위사카여, 나는 그 소원이 무엇인지 알기 전에는 들어준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저의 소원은 무리하지도 않고 반대할 수도 업는 것일 겁니다.”
 
붓다로부터 소원을 말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후 위사카가 말을 이어나갔다.
 
“세존이시여, 앞으로 일생 동안 상가에 우기용 옷을 기부하고, 찾아오는 비구들, 떠나가는 비구들, 병든 비구들, 병자들을 돌보는 비구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며, 병든 비구들에게는 약을 제공하고, 상가에 계속적으로 쌀과 우유를 제공하고, 또한 비구니들에게는 욕의를 제공하는 것이 저의 소원입니다.”
 
위사카의 소원을 들은 붓다가 물었다.
 
“그렇다면 위사카여, 당신이 지금 열거한 것과 같은 여덟 가지 소원을 들어달라고 요청하게 된 동기는 무엇입니까?”
“저는 오늘 아침에 하녀에게 승원에 가서 식사 준비가 되었음을 알리라고 시켰습니다. 그러나 하녀는 승원에서 가서 비구들이 옷을 벗고 상반신을 드러낸 채 비를 맞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그들은 세존의 제자 비구들이 아니라 나체로 나다니는 고행자들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녀가 돌아와 제게 그렇게 보고했고, 저는 확인을 위해 그녀를 다시 승원으로 보냈습니다. 나체로 있는 비구들을 보는 것은 참으로 민망하고 딱한 노릇입니다. 스승이시여, 저는 이런 일을 겪고는 앞으로 일생 동안 우기용으로 특별히 만든 가사를 승단에 제공하는 것을 저의 첫 번째 소원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위사카는 계속해서 나머지 소원들을 고했다. 사실 위사카가 처음 시집을 왔을 때, 니칸타 교도들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수행자들을 보고 불쾌함을 느꼈던 일을 상기했던 것이었다.
 
“사왓티를 찾아오는 비구는 길을 모르기 때문에 음식을 탁발할 수 있는 곳을 몰라서 애를 먹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저는 앞으로 일생 동안 찾아오는 비구들을 위한 음식을 상가에 제공하는 것을 두 번째 소원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또한 사왓티를 떠나는 비구는 탁발을 하다가 때를 놓쳐 밥을 굶는 채로 길을 떠나야 하므로 애를 먹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저는 앞으로 일생 동안 떠나는 비구를 위한 음식을 제공하는 것을 세 번째 소원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병든 비구가 적당한 음식을 먹지 못하면 병이 악화되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비구를 돕는 것이 저의 네 번째 소원입니다. 병자를 돌보는 비구는 자신의 음식을 탁발할 시간을 놓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비구를 돕는 것이 저의 다섯 번째 소원입니다. 병든 비구에게 적당한 약을 먹이지 않으면 병이 악화되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비구를 돕는 것이 저의 여섯 번째 소원입니다. 저는 세존께서 쌀과 우유는 정신을 맑게 해주고, 기아와 갈증을 없애주고, 건강한 사람에게는 좋은 영양식이 되고 병자에게는 약이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앞으로 일생 동안 계속해서 쌀과 우유를 상가에 공급하는 것을 저의 일곱 번째 소원으로 삼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비구니들이 아치라바티 강물에서 창녀들과 함께 나체로 목욕을 하는데, 그럴 때면 창녀들은 비구니들을 놀려대면서 ‘젊은 당신네들은 무엇이 좋다고 순결을 지키고 있지? 늙을 때까지 순결을 지킨다고 해서 젊음과 순결 두 가지가 지켜질까? 라며 놀리곤 합니다. 하물며 비구니들이 이런 여자들 앞에서 나체를 드러내는 것은 참으로 민망하고, 구역질나는 딱한 노릇입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런 이유로 앞으로 일생 동안 욕의(浴衣)를 비구니에게 공급하는 것을 저의 여덟 번째 소원으로 삼겠습니다.”
 
위사카의 순수하고도 절절한 소원을 듣는 붓다의 표정이 밝아졌다. 붓다가 물었다.
 
“위사카여, 그렇다면 나에게 여덟 가지 소원을 들어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그대에게 어떤 이익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우기가 끝나면 이곳저곳으로부터 비구들이 세존을 찾아뵙기 위해 사왓티로 몰려들 것입니다. 그들은 세존을 만나자마자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스승이시여, 아무개 비구가 죽었습니다. 이제 그의 운명은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세존께서는 ‘죽은 비구는 신앙의 음덕으로 니르바나에 이르렀거나 아라한이 되었다’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세존이시여, 저라면 그런 경우에 이렇게 묻겠습니다. ‘그 죽은 비구는 과거부터 사왓티에 살고 있었던 사람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들으면 저는 죽은 비구의 사망 원인이 우기에 옷이 허술했기 때문인지, 찾아오는 비구나 떠나는 비구가 굶주렸기 때문인지, 병든 비구가 적당한 음식을 못 먹었기 때문인지, 병자를 돌보는 비구가 굶주렸기 때문인지, 병든 비구가 약을 쓰지 못했기 때문인지, 쌀과 우유를 계속해서 제공받지 못했기 때문인지 확실하게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결론을 얻고 나면 저에게는 기쁨이 솟아날 것이며 따라서 저의 마음은 평안과 만족감으로 행복이 넘칠 것입니다. 이러한 감정은 제게는 덕행과 일곱 가지 지혜의 촉진제가 됩니다. 세존께서 저의 소원을 들어주실 때 제가 얻을 수 있는 이익은 바로 이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붓다는 위사카의 요청을 밝은 미소로서 흔쾌히 수락하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좋습니다. 위사카여, 그대는 참으로 훌륭합니다. 그런 이익을 바라고 내게 소원을 들어달라고 부탁한 것이라면 잘한 일입니다. 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들에게 베푸는 자비는 비옥한 땅에 씨를 뿌려 풍성한 수확을 거두어들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번뇌 속에서 신음하는 사람에게 베푸는 공양은 척박한 땅에 씨를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번뇌는 미덕의 싹을 말려죽이기 때문입니다.”
 
이어 붓다는 위사카에게 게송으로 고마움을 표시했다.
 
올곧게 살아가는 부인,
알고 보니 나의 참 제자일세.
베푸는 마음 즐겁고 너그러우니,
그대의 천국 같은 공양물
슬픔을 없애주고 축복을 안겨주네.
그대의 축복받은 생활,
타락과 부정을 멀리 하네.
선을 추구하는 그대는 행복하고,
자비심 넘치는 그대의 마음은 기쁨뿐이네.
 
엄청난 재산을 가지고 있었던 위사카는 또한 상가에 동원정사(東園精舍, 또는 ‘녹자모강당’이라고도 부름)을 지어 봉헌했다. 그녀는 붓다의 여성제자 우바이 가운데 첫 여성재가자 장로가 되었다. 
 
여인에 대한 연민, 대법사를 낳다
 
라자가하에 살던 한 젊은 부인이 남편에게 집을 떠나 비구니가 되겠다며 출가를 허락해줄 것을 간청했다. 어렵게 남편에게 허락을 받은 여인은 집을 나왔다. 막상 집을 나왔으나 바른 수행에 대한 이해도 없었고, 또 어디로 가야할지도 몰랐다. 이 여인은 발길이 닿는 대로 가다가 당시 라자가하 상가를 책임지고 있던 데와닷따의 허락을 거쳐 이곳의 비구니 수행처로 들어가게 되었다.
출가를 허락받고 수행하던 어느 날 이 여인은 자신이 임신을 한 상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배가 불러왔고, 여인이 아이를 가진 것이 라자가하 상가 내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자 비구니들이 그녀를 라자가하 상가의 스승인 데와닷따에게 데리고 가서 자초지종을 말했다. 이야기를 들은 데와닷따는 여인을 부정하게 여기고는 즉시 가정으로 돌려보내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에게 애원해서 어렵게 출가한 입장에서 다시금 가정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붓다가 머물고 있는 사왓티의 기원정사로 찾아가 부정한 여인으로 몰려 라자가하 상가에서 쫓겨난 억울함을 호소하기로 했다.
사왓티까지 찾아온 여인으로부터 사정 이야기를 들은 붓다는 상가회의를 소집해 이 문제를 직접 다루지 않고 첫 우바이 장로 위사카와 우빨리 장로 등에게 여인의 문제를 합리적으로 처리할 것을 위임했다. 먼저 위사카가 여인을 커튼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임신을 한 시기와 현재의 신체 상황 등을 자세하게 검토했다. 위사카는 조사결과 이 여인이 비구니가 되기 전에 임신한 것이 틀림없음을 확인했다. 위사카가 자신이 조사한 사실을 우빨리 장로에게 알리자, 그는 여인의 무죄를 내외에 선포했다.
이렇게 해서 여인은 위사카의 보호아래 열 달을 채우고 아들을 출산했다. 태어난 아들은 붓다의 요청에 따라 빠세나디 국왕의 양자로 들어갔다. 아들의 이름은 꾸마라까싸빠였다. 왕자의 신분으로 궁에서 자라던 꾸마라까싸빠는 일곱 살이 되던 해 자신의 어머니가 비구니인 것을 알고는, 붓다께 귀의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즉시 붓다를 찾아뵙고 자신의 뜻을 말씀드리자 붓다는 기쁜 마음으로 법문을 들려주고 이어 출가를 허락했다.
그는 통찰수행을 닦으며 산 꼭대기에 머물며 붓다의 가르침을 공부하고 실천했다. 부지런히 정진한 끝에 꾸마라까싸빠는 오래지 않아 아라한과를 성취할 수 있었다. 할 일을 다 마친 꾸마라까싸빠는 자신이 이뤄낸 경계를 게송을 읊었다.
 
깨달은 님들은 불가사의하다.
가르침들은 기적이다.
우리 스승께서 성취한 것들은 놀라운 것이다.
제자도 거기서 그와 같은 가르침을 깨달으리.
 
헤아릴 수 없는 겁을 거쳐서
자신의 몸을 얻었는데,
그 가운데서 이것이 마지막이고
이것이 최후의 몸이니,
태어남과 죽음의 윤회 속에서
이제 결코 다시 태어남은 없으리. 
 
가까운 곳에서 아들의 성장을 지켜볼 수 있었던 어머니 비구니는 뿌듯했다. 그녀는 비록 출가한 몸이지만 자식에 대한 애정은 조금도 식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꾸마라까싸빠는 아라한과를 성취하고는 숲속 깊은 곳으로 들어가 12년 동안 일체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아들을 볼 수 없게 된 어머니 비구니는 상심이 컸다. 자나 깨나 아들을 걱정하며 그리워하다가 어느 날 아들이 머물고 있는 제따와나 수도원으로 직접 아들을 찾아갔다. 어머니 비구니는 그곳에 도착하여 아들을 만나자 기쁘고도 반가운 마음에 눈물을 흘리면서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꾸마라까싸빠는 어머니가 자기에 대한 애착이 깊은 것을 느끼고 ‘만약에 내가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상대해 드리면 어머니는 계속해서 자신에 대해 집착할 것이고, 이로 인해 어머니의 삶은 가련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일부러 단호하게 말했다.
 
“비구니로서 이 무슨 꼴입니까? 아직도 아들에 대한 애착 하나 끊지 못하셨단 말입니까?”
 
아들의 냉혹한 호통에 어머니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지금 무엇이라고 말했느냐?”
 
아들은 똑같은 말을 매몰차게 거듭했다. 아들의 차가운 태도에 놀란 어머니는 비탄에 빠졌다.
‘아, 나는 아들을 그리워하며 12년 동안 눈물로 살아왔는데 내 아들은 나를 이토록 차갑게 대하는구나. 이런 자식에게 애착한들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자식이란 모름지기 의지할 바가 못 되는 줄 이제야 알겠다.’
그녀는 이 일을 계기로 자기를 깊이 돌아보게 되었다. 자식에 대한 애착을 부끄럽게 여기고 이제부터라도 진심으로 공부해서 자식에 대한 모든 애착과 애정을 끊으리라 결심했다. 이후 이 비구니도 아라한과를 성취하게 되었다. 이 일이 있고나서 얼마 후 비구들이 붓다께 여쭈었다.
 
“스승이시여, 만약 꾸마라까싸빠의 어머니가 처음 들어갔던 데와닷따의 수도원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면 비구니와 그 아들이 어떻게 아라한과를 성취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랬다면 데와닷따는 그들을 잘못 인도하여 불행에 빠뜨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이시여, 부처님께서는 지금도 아라한과를 성취한 그들의 의지처가 되시는지요?”
 
이에 붓다가 말했다.
 
“비구들이여, 아라한과를 이루려는 사람은 결코 남을 의지할 수 없다. 자신을 위한 일은 오직 자신만이 할 수 있으니, 자기 스스로 열성적이고 진지하게 노력해나가야 한다.”
 
그리고는 게송으로써 제자들에게 일렀다.
 
진정 자기야말로 자기의 의지처,
어떻게 남을 자기의 의지처로 삼으랴?
자기를 잘 단련시켜야만
자기를 의지처로 만들 수 있는 것.
이는 실로 성취하기 어렵다.
 
이처럼 대중에게 가장 사랑받던 법사로 ‘가장 재기에 넘친 설교를 하는 님 가운데 제일’이라는 칭호를 받은 꾸마라까싸빠는 붓다의 세심한 배려가 없었다면 세상에 빛을 발하지 못했을 위대한 수행자였다. 아이를 잉태한 사실을 모르고 출가한 비구니를 연민으로 품어 안았던 붓다의 따뜻한 마음이 위대한 수행자 꾸마라까싸빠와 그의 어머니 아라한을 탄생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 기이한 인연을!
 
사왓티에 머물던 붓다가 많은 비구들을 이끌고 코살라 국의 이곳저곳을 유행하다가 살라(Sāle) 마을의 바라문 촌을 방문하게 되었다. 살라 사람들은 이미 붓다의 좋은 평판을 익히 듣고 있던 터라 그의 방문을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붓다가 머무는 곳으로 많은 살라의 바라문들과 주민들이 모여들었다. 그들과 이야기하던 도중에 붓다가 물었다.
 
“살라의 재가자들이여, 여러분들이 이성적으로 믿고 신뢰할 만한 스승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스승이시여!” 
“그런 스승이 없다면, 훗날 그대들에게 훌륭한 스승을 가늠할 수 있는 안전한 원리를 설명하겠습니다. 잘 간수하면 여러분들의 평안과 행복을 지키는 좋은 잣대가 될 것입니다.”
 
살라 사람들은 고따마 붓다가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게 훌륭한 스승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잔뜩 긴장했다. 무리 가운데 나이 많은 노인이 물었다.
 
“스승이시여, 그게 어떤 것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재가자들이여, 어떤 사람은 방종한 삶을 찬양하며 보시나 희생의식이 쓸데없는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선행이나 악행이나 그것으로 끝이며, 다음에 일어날 일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내생도 없으며, 이생에서 행한 선행의 과보로 천상에 태어나는 일 따위도 없다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스스로 도덕적인 삶을 시작하고 해탈과 행복을 성취할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다고 합니다. 그들은 설령 어떤 사람이 해탈과 행복을 성취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인간의 능력 밖에 있는 자연적인 힘에 의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아직까지 떠돌이 궤변론자들에게 오염되지 않고 서로 돕고 의지하며 사는 순박한 살라 사람들로서는 어떻게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는지 의아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노인이 물었다.
 
“스승이시여, 왜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겁니까?”
“악행의 불행한 결과와 선행의 좋은 과보를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붓다는 이어 이미 언급한 잣대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앞서 말한 문제에 대해 현명한 사람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만약 그가 말한 대로 내생이 없다면, 깨끗한 삶을 부정하고 악행을 저지른다고 해도 죽은 다음에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생이 있다면 그 사람은 그가 말하는 대로 살아간다면 틀림없이 사람들의 비난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생도 내생도 다 잃는 것이다.’라고. 여러분들은 이생과 내생 모두 괴로움으로 이끄는 사람의 말을 신뢰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스승이시여.”
 
살라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붓다가 설법을 이어갔다. 
 
“마찬가지로 재가자들이여, 현명한 사람은 또 이렇게 생각합니다. ‘설령 내생이 없다고 하더라도 선하게 이생을 보낸 사람은 그렇게 한 세상을 잘 산 것이다. 그런데 만약 내생이 있다면 그 사람은 좋은 곳에 복되게 태어날 것이다. 내생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잘 사람은 바른 견해를 가진 고결한 사람이라는 칭송을 듣는다. 따라서 이 사람은 이생과 내생을 모두 얻은 것이다’라고. 여러분들은 이생과 내생 모두 얻는 이런 견해를 신뢰합니까?”
“그렇습니다. 스승이시여.”
 
 
살라 사람들이 대답했다. 설법을 마치고 기원정사로 돌아온 붓다는 비구와 비구니들에게 살라 사람들에게 했던 이야기를 다시금 설명했다. 우선 붓다는 살라 사람들에게 도덕적 삶을 권장하기 위한 방편으로 업보와 내생을 ‘내기 돈’에 비유해 설명했다고 말했다. 붓다는 이미 출가하여 수행생활을 하고 있으면서도 아직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제자들을 위해 그들이 납득하고 이해할 만한 설법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비구들이여, 내가 천국과 지옥을 이야기할 때,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다. 다만 내가 말하는 천국과 지옥은 아주 극단적인 쾌락과 극단적인 고통의 다른 표현인 것이다. 이런저런 천상의 신들이란 극단적인 쾌락의 한 상징이다. 지옥 역시 우리가 경험하는 극단적인 형태의 고통과 다르지 않다. 이러한 상징은 초심자들로 하여금 도덕적인 삶을 수락하게 하는 데 아주 유용한 수단이 된다. 그러나 이미 출가하여 수행에 전념하는 그대들로서는 천국과 지옥에 대한 그런 식의 신앙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그대들이 볼 수 있는 눈앞의 현상에 그대들의 관심을 집중하라.”
“예, 세존이시여.”
“먼저, 이 땅에 사는 곤충, 새, 물짐승, 그리고 동물들을 보라. 그것을 헤아릴 수 있는가?”
“아닙니다. 스승이시여. 그것들은 거의 셀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나는 이들을 축생이라고 부른다. 제각기 다른 종들 사이의 교접이나 번식은 되지 않는다. 그 많은 종 가운데는 다른 생물을 포식하는 것도 있고, 순전히 풀을 먹는 것, 인간의 배설물로 사는 것도 있다. 어떤 것은 어둠 속에서 태어나 어둠 속에 살고, 그 속에서 죽는다. 어떤 것은 물속에서 태어나 거기서 살고, 그렇게 죽는다. 그들의 생존과 그대들의 삶을 견주어 보라. 그대들 자신의 삶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인간으로 태어난 우리는 실로 다행입니다.”
“그렇다. 실로 우리는 복 받은 존재들이다. 제자들이여! 이 인간의 생명은 쉽게 얻어진 것이 아니다. 제자들이여, 바다 속에 한 마리 눈 먼 거북이 있다. 이 거북이는 백 년에 한 번씩 물 밖으로 머리를 내민다. 파도와 조류를 타고 흘러간다. 마침 거기 떠 있는 통나무 구멍에 거북이의 머리가 낀다. 거북이가 거기에 의지해서 하늘을 바라본다. 제자들이여, 이 기이한 인연은 어떤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지극히 어려운 인연입니다.”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이 인간으로 태어나는 기연이다. 이토록 어렵게 만난 이 인간의 생을 그대들은 어찌해야 되겠는가?”
“스승이시여, 단 한 순간도 허비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 제자들이여! 이 귀중한 생을 허비해서는 안 된다. 바로 그것을 위해서 나는 팔정도를 설했다. 팔정도는 그대 자신과 남들의 귀중한 삶을 허비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설해진 것이다.”
 
붓다의 설법을 듣던 한 젊은 비구가 나서 간청했다.
 
“스승이시여, 다시 한 번 상세하게 설명해주십시오.”
“팔정도를 성스러운(아리야) 것이라고 말할 때, 종족으로서의 ‘아리안’이나 피부색, 사회적 지위를 가리키는 게 아니다. 그것은 안정과 평안, 복지, 그리고 그런 평화와 복지에 따르는 기쁨의 고결함을 말하는 것이다. 성스럽다는 것은 해탈을 향해 애써 가는 과정과 그 목표 모두를 이르는 것이다. 깨달음과 해탈에 이르기 전에 나는 잘못된 길을 걸었었다. 출가하기 전에 나는 편안하고 호사스럽게 감각적 쾌락을 누렸다. 나는 몰랐었다. 내게 그런 편안함을 주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해야만 하는지. 심지어 병들거나 늙고, 죽은 사람들을 볼 수 없게 가려져 있었다. 출가한 다음에는 극심한 고행으로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다. 성스러운 팔정도는 바로 이 양극단을 지양한 중도다. 따라서 그것이 성스러운 것이기 위해서는 자신은 물론 타인을 해롭게 해서는 안 된다.”
 
붓다는 상세한 설명을 요청한 비구에게 물었다.
 
“자, 설명에 들어가기 전에 그대에게 묻겠다. 그대는 팔정도가 무엇 무엇인지 아는가?”
“예, 스승이시여.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고(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계(正命), 바른 노력(正精進), 바른 기억챙김(正念), 바른 집중(正定)입니다.”
“그렇다.”
 
붓다는 팔정도가 어떻게 자신과 남들의 삶을 허비하지 않고 행복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하는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바른 견해란, 제자들이여. 절대적인 견해를 갖는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독단적인 견해와 무 견해의 중도다. 독단적인 견해는 자신의 견해만 옳고 나머지는 모두 잘못이라는 견해다. 인간 지식을, 절대로 오류를 범할 수 없고 불변하는 것으로 믿는 것이다. 그런 잘못된 확신은 자기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 반대로 전혀 어떤 견해도 갖지 않는다면 상황에 대처할 어떤 수단도, 잣대도, 판단 근거도 갖지 않는 것이다. 아무런 준거도 없이 행동하는 것은 맹목적인 것이다. 어둠 속에 쏘아댄 화살은 누군가를 다치게 할 것이다. 이런 두 가지 견해에 반해 바른 견해는 인간에게 가능한 모든 지식을 포괄적으로 숙고하고, 인간과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에 이로운 방향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견해다. 이런 견해는 바른 사고(의도, 목적, 계획)에 의해서만 나올 수 있다. 우리의 모든 인식과 개념 작용에는 이미 어떤 동기가 부여되어 있다. 완벽주의자는 말할 것이다. ‘아니다. 우리는 먼저 진실을 발견하고, 그 진실을 근거로 사물을 설명하고 사물은 이해한다.’라고. 그러나 인간과 인간 심리를 아는 나로서는 그런 관점을 그대로 수용하기는 곤란하다. 인간이 어떤 사물을 인지하는 데는 수없이 많은 동기가 관여한다. 두려움, 특히 죽음에 관한 공포는 가장 중요한 동기요소 가운데 하나다. 어떤 사람은 자연을 통제할 힘을 얻고자 꾀한다. 어떤 사람은 감각적 쾌락에 생각이 맞춰져 있고, 혹은 남을 해칠 생각으로 사물을 본다. 통치자는 보다 넓은 영토를 점령하고 저항하는 세력을 정복할 작전을 생각한다. 나는 출가사문으로서 악의를 씻고 누구도 해롭게 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앞선다. 끊임없이 이런 생각을 품고 키움으로써 사람들은 자비로워진다. 제자들이여! 어떻게 이 바른 사고가 나와 남을 해치는 것을 막을 수 있는지 알겠는가?”
“예, 스승이시여.” 제자들이 대답했다.
“바른 말은, 제자들이여. 아주 중요하다. 어떤 사람이 몸으로 누군가를 해치지 않고, 말로 잘못된 생각이나 믿음을 주어 그를 파멸로 이끌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린아이에게 잘못된 생각을 심어두면 그는 결국 인간 괴물이 될 것이다. 언어의 도덕성은 우리에게 진실과 타당성을 요구한다. 평온에 안주하는 현자는 잘 설해진 것을 칭찬하고 좋은 것을 말하며 악을 말하지 않는다. 기쁜 일을 이야기하고 달갑지 않은 것을 말하지 않는다. 진실을 이야기하고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그런 평온에 이르는 길은 그것이 법이건, 절대건, 혹은 최상의 존재건 인간을 구속하고 종속시키는 것은 아예 말하지 않는 것이다. 바른 말은 거짓이나, 악의에 찬 말, 험한 말, 경박한 말을 삼가는 것이다.”
“스승이시여, 바라문 전통에 따르면 ‘말’과 ‘브라흐마’는 신성하다고 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것과 세존께서 설명하는 ‘말’과는 다르다는 뜻입니까?” 나이 들어 출가한 제자가 물었다.
“비구여, 나는 어떤 단어 혹은 말이 그것 자체로 신성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만약 신성함을 인정하려면, 그것은 전적으로 좋은 결과를 낸다는 전제 아래 가능하다. 더구나 브라흐마가 아래 세 계급의 창조자라고 주장할 때, 그것은 하부 카스트를 브라흐마에게 종속시키는 것이 된다. 그런 사상은 인간의 잠재력을 계발하기는커녕 인간을 억압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다.”
 
붓다는 이어 바른 행위에 대한 설명을 이어나갔다.
 
“바른 행위는 생명을 해치는 것을 삼가고, 주어지지 않은 것을 취하지 않으며,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자제하는 것이다. 이 바른 행위가 어떻게 나와 남을 행복으로 이끄는지는 더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스승이시여.” 제자들이 대답했다.
“재가자로서 취할 바른 생계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차례 설명한 바가 있다. 우선 자신과 남을 해치지 않아야 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사기나 속임수에 의지하지 않고 정당한 노력에 의해 재산을 벌어들였다면, 그는 쓰는 기쁨과 빚 없는 기쁨, 비난받을 일 없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이런 사람은 기꺼이 자기가 가진 것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베푸는 자비로운 사람일 것이다. 제자들이여, 나는 남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여기서도 중도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내 제자인 출가 비구의 바른 생계에 대해서라면 나는 이렇게 말하리라. 오직 날개 무게로만 날아가는 새처럼 하라! 현자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을 상하지 않게 하는 벌처럼 마을을 지나간다.”
 
팔정도에 대한 붓다의 가르침은 열정적으로 계속됐다.
 
“제자들이여, 조건에 의지해서 발생하는 원리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바른 노력은 삶의 중요한 전제조건이 된다. 조건에 의지해 발생하는 원리가 절대적인 법칙이 아닌 한, 자신의 조건을 개선하고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증진시킬 수 있는 여지가 거기에 있는 것이다. 만약 사람들이 노력하지 않는다면, 인간사회는 마치 노 없는 배처럼 그저 흐름을 따라 흘러갈 것이다. 우선 예방하기 위해 노력한다. 즉 아직 일어나지 않은 해로운 성향들, 나와 남을 해롭게 하는 것들이 일어나지 않게 막는 것이다. 두 번째는 놓아버리는 것이다. 즉, 지금까지 키워온 해로운 성향들을 내던져버리려는 결의다. 세 번째는 유익하고 이로운 성향을 일으키고 증진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렇게 이루고 가꾼 것들을 유지하고 지속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스승이시여, 마지막 목표를 성취한 사람도 노력해야 합니까?” 한 제자가 물었다.
“그렇지 않다. 도덕적으로 완벽한 사람에게 다시 해롭거나 건전하지 않은 성향이 일어날 수는 없다. 마치 어린아이가 불붙은 숯에 손을 댔다가 거둬들이는 것과 같다. 이미 해탈한 사람은 유익한 성향을 증진시키거나 유지하려는 어떤 노력도 필요 없이, 거의 자동적으로 나쁜 성향의 유입을 막아버린다. 그러나 제자들이여, 이러한 논리는 바른 알아차림(기억챙김)에도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나는 도덕적인 삶을 위해 정진하는 초심자나 이미 해탈을 이루고 도덕적으로 완벽해진 사람이라 하더라도 끊임없이 바른 알아차림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친다. 나는 시공을 초월하여 ‘존재하는바 그대로 사물을 이해하는 지식’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어떤 것도 알려고 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지식을 가졌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나는 다만 그 사물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 안다고 말한다. 조건에 따라 발생하는 사물에 대해 절대 확실성을 가지고 단언할 길은 없으며, 그런 까닭에 절대적으로 옳은 예상이란 없다. 그렇다면, 끊임없이 마음을 챙기고 깨어 있는 수밖에는 없다. 바른 알아차림은 바른 집중(삼매)과 결합되어야 한다. 그것은 곧, 건전하고 유익한 사실과 상태, 그리고 과정에 대한 주의집중이다. 여기서 유익한 것의 판단근거는 다시 자신과 타인의 행복을 위해 바람직한가 하는 것이다.”
 
설명을 마친 붓다가 처음 질문했던 젊은 비구에게 물었다.
 
“비구여, 이제 알겠는가? 이 귀중한 생을 허비하지 않고 자신과 타인의 행복을 이루는 것이 팔정도라는 이해할 수 있는가?”
“예, 스승이시여! 조항 하나하나에 지극한 자비와 배려가 스며들어 있습니다. 가히 고결하고 신성한 길임에 분명합니다. 스승이시여, 위없는 깨달음과 해탈을 성취하신 위대한 성자, 세존께서도 계속 팔정도를 걷고 계시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 겸손하게 하고 더욱 열심히 정진하게 합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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