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판01 <법륜과 연꽃>, 바르후트 스투파의 작은 첨탑 복원도, 연꽃과 법륜으로 불성佛性을 표현한 첨탑. 바르후트 스투파는 산치 스투파와 더불어 가장 오래된 초기 불교미술을 대표하는 유적이다. 1873년 알렉산더 커닝헴 발굴 당시 유적을 토대로 복원한 기둥 모습. 위의 좌측) (도판02 <화신불> 고려불화, 무량한 화신불이 부처님 몸체에서 분파되어 시방세계로 퍼지고 있다. <관경16관변상도>의 진신관 부분. 위의 우측) (도판03 <붓다 입상> 간다라, 어깨에서는 화염과 같은 서기瑞氣가 솟아오른다. 하단)
“아들의 얼굴 우러르자 하도 마음이 기뻐서 무어라 입으로 말을 할 줄 몰랐네!” 아버지는 탐욕으로 세속에 얽혀 있고/ 아들은 훌쩍 뛰어 성자된 것 돌아보매/ 비록 아들이라 해도 높은 도에 있거니/ 어떤 이름으로 불러야 할지 몰랐네.
- 「아버지와 아들이 만나다」『붓다차리타』
붓다 성도 후, 아버지와 상봉하다
붓다는 마가다국(라자가하) 죽림정사에서 교단을 형성하고 여러 외도들을 교화시킨다. 붓다의 교화는 한 군데 머무르지 않고 그 때 그 때의 인연에 따라 계속 유동적으로 옮겨갔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주요 무대는 죽림정사와 기원정사로 꼽히고 있지만. 그 외 주목할 만한 방문지로 다름 아닌 카필라 성(카필라바스투)이 있다. 붓다는 자신의 고향, 자신의 가족이 있는 이곳으로 향한다. 『붓다차리타』에는 위에 인용한 바와 같이 아들과 아버지가 오랜 세월을 넘어 다시 만나는 대목이 구구절절 표현되어 있다. 멀리서 차츰 가까워지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아버지 숫도다나왕(정반왕)은 마음이 기뻤으나, “무어라 불러야 할지 입을 떼지 못했네‘라고 한다. 그 이유는 다음 문구에서 알 수 있다. "그처럼 그렸건만 오늘에 무엇이라 말할 길이 없네/ 아들은 이제 고요히 앉아/ 안온하게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오랜 이별했건만 감정이 없으니/ 그것이 내 마음을 외롭고 슬프게 하는 구나!" 아버지는 "마치 오랫동안 목말랐던 사람이 우물을 만났으나 그 우물이 완전히 마른 우물이어서, 서먹한 기운이 너무 높아 도무지 따라 붙을 마음이 안 생긴다"라고 토로한다.
(도판04) <카필라바스투(카필라성)의 신통>의 부분. 아버지 숫도다나왕과 아들 석가모니 붓다가 만나는 장면. 아버지와 왕실 사람들은 자칫 빈자리 또는 허공에 대고 공양하고 합장하는 듯 보이지만, 그곳에는 어김없이 득도한 붓다가 있다. 보리수와 금강좌(좌측), 합장하고 설법을 경청하는 아버지 숫도다나왕(우측), 산치 제1탑, 북문 부조.
아버지는 있으나 아들은 없다?
상봉 순간의 오고간 내용은 참으로 흥미롭다. 아버지는 '아버지'로서의 반응이 가감 없이 튀어나왔으나, 그것을 받아들일 '아들'은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기갈 들린 사람이 마른 우물 대한 듯, 부모 잃어 사무치던 사람이 그림 얼굴 본 듯이" 그렇게 곤혹스럽다고 아버지는 표현하고 있다. 생사고락의 이치와 세세생생 업장의 인연을 통찰하고 이미 붓다가 된 석가모니는, 더 이상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인연과 개념'에 얽매이래야 얽매일 수도 없었겠다. 이러한 '아버지와 아들' 상봉의 순간은 산치대탑의 부조에 생생하게 새겨져 있다.(도판04) 이 부조 속의 표현을 보면, (정면에서 보아) 오른쪽에 큰 왕관 머리 장식을 하고 합장하고 있는 인물은 숫도다나왕이다. 그 뒤에는 시봉하는 하인이 원반 모양의 차양을 머리 위에 받치고 있어, 금방 주인공인 아버지를 찾을 수 있다. 왕실의 여인들이 붓다를 반기며 꽃 공양 등을 올리고 있다. 왕실의 인물들은 모두 붓다가 있는 좌측으로 일괄적으로 좌향좌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있어야 할 자리에 석가모니 붓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도판04_1)석가모니 붓다는 보리수와 금강좌로 표현되어 있다. 법신과 합일한 붓다를 향해 아버지 숫도다나왕은 합장을 하고 있다. <카필라바스투(카필라성)의 신통>의 전체. 산치 제1탑(작품 정보 상동)
붓다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붓다를 상징하는 보리수와 금강좌만 있을 뿐이다. 이는 '무불상無佛像' 시대에 붓다를 표현하는 전형적인 도상이다. '불상이 없다'라는 의미에서 '무불상'이라고 지칭하게 되었지만, 불상이 없는 것이 아니다. 단지 중생의 눈에는 (사람 모양의 신상神像을 추구하기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초기불교 미술의 시기에는 궁극의 불성(佛性, 깨달음의 성품)을 연꽃 또는 법륜 등으로 표현하고, 깨달음과 합일한 석가모니 붓다를 보리수 아래의 빈 공간, 아무도 앉아 있지 않는 금강좌, 법륜 또는 연꽃이 묘사된 족적(발바닥 자국)으로 표현한다. 이 <아버지와 아들의 상봉> 장면의 부조에서도 '보리수와 금강좌'로 석가모니 붓다의 존재를 나타내고 있다. 성도成道한 석가모니에 대한 이보다 더 적절한 표현은 없으리라.
(도판06 좌측: 바르후트 출토) (도판07 우측: 산치 제1탑 동문 부조) 보리수 나무로 상징되는 깨달음의 조형. 초기불교미술의 시대에는 보리수, 금강좌, 법륜, 족적 등으로 붓다의 현존을 표현하였다.
'제상비상諸相非相'의 원리를 평생 설하신 붓다의 모습을 상相으로 표현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추후에 상相이 없이는 붓다의 가르침도 흩어지고 교단도 흩어질 우려가 생겨나는 시점에 '유有불상' 시대가 전개되는데, 대승불교에서는 응신應身으로서의 석가모니 붓다의 개념이 적용되어 또 다른 조형미술의 세계가 펼쳐진다. 하지만, 초기 불교미술의 이 시기 만큼, 본질적인 불성佛性에 충실한 (어느 시대 보다 적절한) 조형적 표현은 없다. 아버지와 왕실 사람들은 자칫 빈자리 또는 허공에 대고 공양하고 합장하는 듯 보이지만, 그곳에는 어김없이 득도한 붓다가 있다. 아름드리 보리수 아래에는 장방형의 금강좌가 있다. 그 금강좌에는 아무도 앉아있지 않지만, 바로 그 자리에는 바탕자리(법신)와 합일한 붓다의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석가모니는 이제 '법 그 자체로 오셨다'는 뜻을 가진 '여래如來'이기에, 이러한 '공空'의 조형 방식으로 본체의 모습을 그대로 나타내는 '설법'을 베풀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 숫도다나왕은 이러한 설법을 합장한 채로 서서 경청하는 모습을 취하고 있다. 과연, 붓다가 된 아들은 아버지에게 어떤 설법을 하였을까? 아버지는 들으려 했을까? 들었다면 알아들었을까? 본 부조가 보여주는 장면에 대한 소의경전 대목을 찾아서 그 설법의 내용을 살펴보자.
너는 지금 밥을 빌고 다니는구나!
그런데 그 설법의 내용을 보기 전에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사건이 하나 있다. 한 가지 특이한 사건이 벌어지는데 그것을 먼저 보도록 하자. 특이한 사건이란, 붓다가 설법 이전에 갑자기 '신통'을 보인 사연이다.
너는 지금 밥을 빌고 다니는구나! 이 길이 무엇이 그리도 영화로우냐?/ 편안하고 고요하기가 수미산 같고 빛나는 얼굴은 밝은 태양 같고/ 안정한 걸음걸이는 소 걸음 같고/ 두려움 없기는 사자후 같으니/ 사천하의 물려줌을 받지 않고 구걸하여 그 몸을 기루는 구나.
"어떻게 먼지를 뒤집어쓰며 발우를 들고 밥을 빌러 다니는가?" 붓다가 자신의 고향인 카필라성에 와서 허름한 가사를 걸치고 여기저기 걸식 하는 모습은 그곳 사람들에게 상당한 충격을 준 것 같다. 그들은 "놀라고 기쁘고 큰 소리쳤고/ 안팎으로 서로서로 그 소식을 전하고/ 어른이나 아이나 달려와서 그 모습을 보고/ 창문을 열고 어깨를 맞대고 눈을 치뜨며" 보았다고 전한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슬프고 기쁘고 합장하며 눈물 흘렸네”라는 대목에서 사람들의 반응이, 슬픔 · 기쁨 · 비난 · 조롱 · 안타까움 · 존경 등, 여러 가지로 엇갈렸던 것을 알 수 있다. (본 글의 " " 따옴표 인용과 문단 개별 인용은 모두 경전에서의 직접 인용임을 밝힌다.)
또 걸식하는 아들을 보고 아버지 숫도다나왕은 "왜 우리 가문을 부끄럽게 하시오?"라며 힐난했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 때 아들의 대답이 기가 막히다. “왕이시여! 왕의 가계는 당신의 가계이고, 나의 가계는 붓다의 가계입니다. 그분들(디팡카라, 꼰단냐에서 깟사빠에 이르기 까지)과 수천의 붓다들은 모두 걸식에 의해 삶을 유지했던 것이오.” (Thomas, E.J. 1992『The Life of Buddha as Legend and History』, p.99-100, 마성. 2010 『사캬무니 붓다』, p.222에서 재인용함. 왕의 가문이 아니라, 붓다의 가문이라고 하는 대목에서 아버지는 여전히 아들이라는 사념에 사로잡혀 있지만. 붓다는 더 이상 아들이라는 생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본 대목은 소의경전에서는 아직 확인할 수 없었으나, 이상의 2차 자료에서는 찾아볼 수 있었다.) “이와 같이 많은 사람들/ 서로 시끄럽게 지껄였으나/ 붓다는 마음에 집착이 없어/ 기뻐하거나 슬퍼하지 않았나니/ 그저 자비로서 중생들을 연민하여/ 가난과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하려 하셨네.”
붓다의 신통, 분신무량分身無量과 물불水火 내뿜다
붓다는 고향을 방문해서 아버지와 석가족 사람들에게 '신통'을 내게 되는데 그 대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신통으로 허공에 올라 공중에 두루 돌아다니며) 몸을 나누어 한량이 없다가/ 도로 다시 합하여 하나가 되고/ 물을 밟기를 땅인 듯 하고/ 땅에 들어가기를 물인 듯하니/ 석벽도 그 몸을 막지 못하고/ 몸의 왼쪽과 오른 쪽으로 물과 불을 내뿜었네.
아버지 왕이 그것을 보고 크게 기뻐/ 아버지와 아들의 정情은 한 번에 사라지고/ 붓다는 공중의 연꽃에 앉아/ 왕을 위해 설법했네.
(도판08_2 좌측)(도판08_3 우측) <붓다 설법상>의 좌우 부분. 몸을 무량하게 분신하는 모습.
(도판08) <붓다 설법상> 간다라, 2세기, 편암, 라호르 박물관Lahore Museum 소장, 파키스탄. 두 손을 가슴에 모아 쥐고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고 있는 설법인을 취하고 있다.
(도판08_1) <붓다 설법상>의 아랫부분. 천개의 연잎이 만개하는 모습. 붓다의 위와 아래로는 법신과 계합한 상징적 도상들을 장엄하게 연출하고 있다.
(도판08_4) 연화화생蓮花化生의 바탕인 법신法身 자리를 소용돌이치는 물의 기운으로 표현하고 있다. <붓다 설법상>의 가장 아랫부분.
카필라성에서 보인 이러한 신통을 마치 고스란히 옮겨 놓은 듯한 장면을 라호르박물관 소장 <붓다 설법상>(도판08)에서 찾아볼 수 있다. 본 작품에 관해서는 다양한 제목과 학설이 있지만, 본 연재에서는 붓다상의 수인이 '설법인說法印'을 취하고 있으므로 <붓다 설법상>으로 소개한다. 두 손을 가슴에 모아 쥐고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고 있는 설법인을 취하고 있어서, 붓다가 설법을 하고 있는 장면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마치 그 설법의 내용을 자신의 주변으로 펼쳐서 보여주고 있는 듯한 형식을 재현하고 있다.
신통과 설법〔神通力과 深妙法〕, 고향집에서 베풀다.
다채로운 장면의 묘사들이 붓다상을 둘러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출가 전 궁궐에서 사유하는 모습도 보이고, 득도하여 붓다가 된 모습, 몸을 무량하게 분신하는 모습 등. 그 외에도 붓다의 위와 아래로는 법신과 계합한 상징적 도상들을 장엄하게 연출하고 있다. 유형과 무형을 넘나들며, 속계와 법계를 넘나들며, 자신이 체득한 깨달음을 설법하고 있는 형상을 취하고 있다. '신통과 설법〔神通力과 深妙法〕'을 석가족 사람들과 백성들에게 보였다라는 내용을 적용할 수 있는 형식적 특징을 본 작품은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다양한 조형미술로 표현되는 붓다의 설법상을 관통하는 설법의 내용은 무엇인가? 아버지에게 베푼 설법의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아버지가 자비의 마음으로 아들을 위해 더욱 근심하고 슬퍼하는 줄 아나니, 끊임없는 아들 사상 마땅히 그것을 속히 버려야 하네. 애정을 쉬어 그 마음을 고요히 하고, 당신의 아들이 받드는 법을 받으시라.
설법의 요지, '생사고生死苦를 멸하는 법'
한 때 아들의 인연이었던, 이제는 고집멸도의 진리를 통찰한 석가모니 붓다는, 아버지가 애정을 쉬고 마음을 고요히 하여 법法을 보기만을 오로지 바랬다. 그래서 붓다는 "아들로서 드리지 못한 것, 아비로서 아들에게 받지 못한 것, 그것을 이제 바친다"라며, 자신이 드릴 수 있는 최상의 선물을 드리게 된다. 그것은 바로 "훌륭하고 묘한 감로의 이치〔勝妙甘露道〕"이다. 여기서 '감로'는 불법佛法을 터득함에 맛볼 수 있는 열반의 시원함을 상징한다. '감로도' 또는 '감로법甘露法'이란, '불도佛道' 또는 '불법佛法'과 같은 말이다.
붓다가 베푼 설법의 요지는 '생사고生死苦를 멸滅하는 방법〔道〕'이다. 그 방법은 '업業의 인과因果를 명료히 관찰〔諦觀〕하는 것'이다. 그의 설법에는 '사성제와 팔정도'의 핵심이 들어있다. 그것을 관찰하는 방법으로 "지금 마땅히 그 힘을 다하여/ 몸과 말의 업을 청정하게 다스린다/ 밤낮으로 부지런히 닦아 익혀/ 어지러운 마음을 쉬고 고요히 하라"라고 하시며, "오직 이것만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 이것에서 벗어나 있는 모든 것은 '나'가 아니다"라고 하신다.
인간의 왕으로 오욕五欲을 즐기나 이는 위험이 많고 공포스러워 마치 독사와 같이 사는 것 같으니 어찌 잠깐인들 기뻐할 수 있을까. 탐진히 항복 받으면 천하의 어떤 적도 당하지 못하리. 괴로움을 알고 괴로움의 원인을 끊고 적멸을 증득하고 방편을 닦아 사성제의 바르게 깨달으면 악의 세계와 두려움은 없어지리!
붓다의 묘한 신통과 설법을 듣고 "세속의 얽매임이 싫어져 모두 집 떠날 마음을 내었다"고 한다. 석가족의 여러 왕자들과 친족, 그리고 다수의 궁정 사람들은 붓다를 따라 출가하게 된다. 석가모니의 이복동생 난다, 사촌 동생 아난다. 아들 라후라, 부인 야수다라 그리고 친족과 귀족인 킴빌라, 아나룻다, 우다이 등이 있다. 결국 왕족의 대가 끊어져, 대를 이를 후손을 다른 곳에서 구했다는 설이 있다.
법신과 응신을 넘나드는, 불교미술의 표현
라호르박물관 소장 <붓다 설법상>은 <사위성의 신변>, <붓다 설법상>, <아미타 정토상> 등 다양한 학설들이 존재한다. 해당 박물관은 <사위성의 신변(The Miracle of Sravasti)>으로 일단 제목을 기재해 놓는다고 밝히고 있어, 확실한 명칭에 대해 조심스런 태도를 보이고 있다. 물론 무량분신과 물과 불의 방사 등의 동일한 신통을 사위성의 신통(또는 신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특히 무량분신과 같은 신통은 카필라성의 신통, 사위성의 신통 이외에도 성도 당시뿐만 아니라 붓다의 족적 다양한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고 또 대승경전류에서는 일반적이라고 할 정도로 너무나도 자주 확인할 수 있다. 또 기존의 쌍신변(雙神變), 즉 '물과 불의 방사' 표현이라고 단정하는 도상들은 딱히 물과 불로 한정하기에는 애매한 부분이 있다. 그 이유는 붓다의 몸체에서 방사되는 서기瑞氣는 참으로 다채로운 방식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가장 흔하게는 방사선의 빛줄기 그리고 나선형의 식물 줄기, 파장 형식의 화염 자락 등 다양한 방편으로 만물 속의 근원적인 에너지를 표현하고 있다. 이는 광배(두광 및 신광)으로 정형화되는 과정을 거친다. 물론 초기 불교미술 시기에는 이러한 표현을 보다 원초적으로 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고졸古拙한 듯하지만, 강건한 힘을 느끼게 한다.(<사위성의 신통> 작품 관련해서는 《다음 호》에 이어서 상세하게 게재함.)
《다음호에 계속》
글ㆍ사진: 강소연(불교문화재학 전공ㆍ중앙승가대학 교수)
<필자 소개>
○강소연: 중앙승가대학(불교문화재학) 교수. 문화재청 전문위원, 조계종 국제위원, 문화창달위원회 위원, 전통사찰보존위원회 위원 등. 30년 간 오로지 불교문화재를 연구한 베테랑 학자. (경력)홍익대 겸임교수(10년 근속),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BK연구원, 동국대 불교학과 연구교수,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 역임. 조선일보 공채 전임기자, 대만 국립중앙연구원 역사어언연구소 장학연구원, 교토대학 대학원 연구조교 역임. (수상)일본 최고 명예학술상 ‘국화상’ 논문상, 불교소장학자 ‘우수논문상’. (저서)『명화에서 길을 찾다-매혹적인 우리 불화 속 지혜-』(시공아트), 『사찰불화 명작강의』(불광출판사), 『잃어버린 문화유산을 찾아서』(부엔리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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