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9일은 독일의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지 30년이 되는 날이었다. 벌써 오래 전 일이라 젊은 세대들은 베를린에 동서독을 가르는 장벽이 있었는지도 모를 수 있다. 그러나 아직도 그 때의 감동을 잊지 못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올 해 기념식은 베를린 장벽 박물관에서 여렸고, 이어서 분단의 상징물이었던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의 기념공연이 성황리에 열렸다. 독일의 메르켈 총리는 “장벽이 너무 높고 두껍더라도 결국 뚫린다”는 말을 남겼다. 필자가 지난달 베를린의 장벽 박물관을 비롯해서 기념이 될 만한 장소들을 방문했을 때 청소년을 비롯한 독일 사람들의 높은 관심에 적지 않게 놀란 적이 있다. 30년이나 지났음에도 말이다. 하물며 다른 나라와 미국의 청소년들도 수학여행을 와서 베를린 장벽의 역사에 대해 공부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었다. 그만큼 역사의 교훈이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에게는 얼마나, 그리고 더 중요할까!

 

그리고 내년은 독일 통일 3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의 개천절과 같은 날인 10월 3일이 통일 기념일이다. 한반도에도 시사하는 바가 큰 독일의 통일 30주년을 남과 북이 다함께 축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생각해 본다.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열릴 기념 퍼포먼스에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인 남북한의 지도자가 함께 참여하고 우리의 세계적인 아이돌 가수들이 무대를 달군다면 아마 몇 배의 감동이 더해지지 않을까 싶다. 풀릴 듯하다가도 풀리지 않고 있는 북미관계와 한반도문제를 볼 때마다 ‘도둑같이 찾아온 독일의 통일’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연말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 새로운 화두가 하나 던져졌다. ‘안정적인 평화체제’(stable peace regime)! 일주일 전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세미나에서 미 국무부 북한담당 부차관보 알렉스 웡이 개회사에서 표현한 단어이다. 바로 평화체제가 “북한의 밝은 미래를 위한” 트럼프대통령 정책의 핵심(key)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두 가지 점에서 놀라웠다. 우선 웡 부차관보가 공개적으로 발언을 했다는 점이다. 그는 국무부의 북한담당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으면서도 대중에 모습을 공개하고 발언한 경우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아마도 스티브 비건 대북정책특별대표가 부장관으로 승진하게 되면서 웡 부차관보의 역할이 변화된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북미대화에도 적지 않게 모습을 드러낼 것으로 예측된다. 두 번째는 평화체제를 언급했다는 점이다. 한반도에 평화체제가 만들어진다는 것은 비핵화 해결만 아니라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전제 위에서 가능한 것이다. 쉽게 말해서 북미수교와 같이 마지막 단계라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이런 중요한 용어가 트럼프정부 대북정책의 핵심이라고 표현한 것은 중대한 대북 메시지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리고 미국정부는 북한이 원하고 있는 목표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이미 지난 4월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올 연말까지 미국이 새로운 계산법을 가지고 대화를 제의한다면 응할 용의가 있다며 대화 시한을 못박았다. 그 계산법은 지난 3월 최선희 외무성 부상의 기자회견에서 알려졌다. 결의안 28항의 내용에서와 같이 북한이 유엔제재를 준수할 경우 제재를 수정하거나, 중단하거나, 폐기할 수 있다는 내용인데, 북한이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를 당시 15개월여 동안을 유예했음에도 불구하고 제재의 변화가 없다는 것을 이상한 계산법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렇다면 새로운 계산법은 북한의 요구대로 최근 네 개의 유엔결의안 중에 민수와 민생 경제에 관련된 내용들의 제재를 해제한다는 배경에서 제안되어야 한다. 미국이 평화체제를 언급한다는 것은 이미 이러한 제안을 뛰어 넘는 수준의 최종 결론인 셈이다. 이제 곧 연말이다. 미국도 내년에 대선 ‘레이스’가 본격화되기 때문에 북미관계를 다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최근 스티븐 비건 부장관은 북미대화의 진전을 위해서는 최선희 제1부상이 나와야 한다는 언급을 했지만, 모스크바를 방문한 최선희 제1부상은 핵문제 관련 논의는 협상테이블에서 내려졌다고 본다고 밝힌 바 있다. 아직은 북미대화가 열릴지 불투명하다. 그러나 북미실무협상이 열릴 것이라는 긍정적인 전망들도 나오고 있다. 아직은 좀 더 지켜봐야할 때인 것 같다.

 

이제 유럽은 30년 전에 (2차대전) 전후 질서가 바뀌어 냉전이 끝나고 새로운 체제의 30주년을 축하하고 있다. 그런데 아시아-태평양 지역은 30년된 북한 핵문제로 인해 태평양전쟁 이후의 전후 냉전질서가 소련의 붕괴 이후에도 지금까지 그대로 유지되는 기이한 현상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북미가 핵문제를 풀어내고 국교수립과 평화체제를 이끌어낸다면 이것은 한반도의 변화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드디어 70년된 아시아-태평양의 전후 질서가 바뀌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아마도 한반도에서 평화체제로의 진전이 이루어진다면 내년 독일통일 30주년 기념식은 남북한 지도자만이 아니라 트럼프 대통령과 세계 지도자들이 함께 자리하는 역사적인 장면을 연출할 수 있을 것이다. 지구상에서 냉전의 완전한 해체가 드디어 이루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