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란 내 부름의 응답이다

 

 

중국 밀인사에 들렀다가 특이한 전각인 경책전(警策殿)에서 향을 사르고 위산(爲山) 선사가 지은 <위산경책> 한 구절을 떠올리면서 새삼 친구란 무엇인지 명상에 잠겨본 적이 있다. 누구나 자신에게 진정한 친구가 있는지 한 번쯤은 생각해 보지 않았을까 싶다.

 

먼 길을 갈 적에는 좋은 도반(道伴)과 동행하여 자주자주 눈과 귀를 맑게 하고, 머무를 때에도 반드시 도반을 가려 때때로 아직 듣지 못한 것을 들어야 한다. 그러므로 속서(俗書)에도 이르기를 "나를 낳아준 사람은 부모이고 나를 완성시켜 준 사람은 벗이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착한 사람을 가까이하는 사람은 마치 안개와 이슬 속을 가는 것 같아서, 비록 당장에 옷이 젖지는 않아도 점점 촉촉하게 적셔진다.
-위산 선사의 <위산경책>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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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료하고 심심하니까 그저 시간을 함께 보내기 위해서 친구를 찾는다면 그건 '우정'일 수 없다. 시간을 죽이기 위해 찾는 친구는 좋은 친구가 아니다. 시간을 살리기 위해 만나는 친구야말로 믿을 수 있는 좋은 친구 사이다.
친구 사이의 만남에는 서로 영혼의 메아리를 주고받을 수 있어야 한다. 너무 자주 만나게 되면 상호간에 그 무게를 축적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다.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마음의 그림자처럼 함께 할 수 있는 그런 사이가 좋은 친구일 것이다. 만남에는 그리움이 따라야 한다. 그리움이 따르지 않는 만남은 이내 시들해지게 마련이다.
진정한 만남은 상호간의 눈뜸(開眼)이다. 영혼의 진동이 없으면 그건 만남이 아니라 한때의 마주침이다. 그런 만남을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끝없이 가꾸고 다스려야한다. 좋은 친구를 만나려면 먼저 나 자신이 좋은 친구감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친구란 내 부름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늘처럼 맑아 보일 때가 있다. 그때 나는 그 사람에게서 하늘 냄새를 맡는다. 행복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절제에 뿌리를 두고 있다. 생각이나 행동에 있어서 지나친 것은 행복을 침식한다. 사람끼리 만나는 일에도 이런 전제가 있어야 한다. 그러니 따뜻한 마음이 고였을 때, 그리움이 가득 넘치려고 할 때, 영혼의 향기가 배어 있을 때 친구도 만나야 한다. 습관적으로 만나면 우정도 행복도 쌓이지 않는다.
혹시 이런 경험은 없는가. 텃밭에서 이슬이 내려앉은 애호박을 보았을 때 친구한테 따서 보내주고 싶은 그런 생각 말이다. 혹은 들길이나 산길을 거닐다가 청초하게 피어 있는 들꽃과 마주쳤을 때, 그 아름다움의 설렘을 친구에게 전해주고 싶은 그런 경험은 없는가. 이런 마음을 지닌 사람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영혼의 그림자처럼 함께 있어 좋은 친구일 것이다. 좋은 친구를 통해서 삶의 바탕을 가꾸라.

 

 

나에게는 외국인 친구가 한 명 있다. 오스트리아 작곡가인 헤르베르트 빌리(Herbert Willi) 씨이다. 하루에 한 끼만 먹고 한국 음식을 좋아하는 작곡가이다. 전생에 한국인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내가 빌리 씨를 만난 것은 몇 해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내 책의 애독자인 오스트리아 교포 한 분이 내 산방을 찾아왔다가 간 적이 있다. 그분은 클래식음악기획사를 운영하는 권숙녀 사장이다. 권 사장이 빌리 씨에게 내 작품세계를 이야기했는데, 그것이 빌리 씨와의 인연이 되었다. 권 사장이 나를 오스트리아로 두 번이나 초대했지만 나는 응하지 못했다. 빌리 씨가 나를 꼭 만나고 싶다는데도 나는 연재물 때문에 오스트리아 여행을 결정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권 사장으로부터 세 번째 초대 전화가 또 왔다. 이번에는 빌리 씨가 권 사장에게 “정 작가를 납치라도 해서 데리고 오라.” 했다며 하소연을 했다. 할 수 없이 나는 아내와 함께 오스트리아 빈으로 갔다. 권 사장이 내준 숙소에서 이틀쯤 머무르다가 빌리 씨 작업실이 있는 알프스 몬타폰으로 승용차를 타고 갔다. 승용차 운전은 의사 출신인 권 사장의 남편 베흐나 박사가 해주었다.
몬타폰에 도착한 나는 빌리 씨 작업실 옆의 콘도를 빌려 여장을 풀었다. 그때부터 3박 4일 동안 빌리 씨 작업실로 가서 종일 대화를 나누었다. 빌리 씨는 반드시 내가 올 줄 알았다고 말했다. 확신했다는 말에 나는 놀랐다. 빌리 씨가 정신세계 속에 사는 선사 같았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권 사장이 통역했는데 나중에는 서로 눈빛만 보고도 대화가 되는 것 같았다. 인생관과 우주관이 일치했다. 사고가 동양적인 그는 서구문화의 이단아 같았다. 내 앞에서 감격에 겨워 울기도 했다. 하루는 알프스 산자락을 그와 함께 산책하는데 그가 해발 1100미터쯤에서 내게 말했다.
 “여기서부터 소리가 들립니다. 저는 머리로 작곡하지 않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소리를 받아 적을뿐입니다. 그 소리들을 색연필로 빛깔로 표시할 수도 있습니다. 소리가 생생하게 들리는 곳은 저 위쪽 산정입니다. 알프스가 오염돼  가고 있는데 걱정입니다.”

 

나는 2년 전 봄에도 그를 만났다. 이번에는 내가 그를 만나러 갔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 같다. 나는 대하소설 <이순신의 7년>(전 7권)을 발간하고 난 뒤 휴식차 1달간 일정으로 유럽을 갔는데 이탈리아에서 15일, 오스트리아에서 15일을 머물렀던 것이다. 오스트리아 빈을 가서 또 권 사장과 빌리 씨를 만났다. 그의 일정이 몹시 분주했지만 우리는 틈틈이 세 번을 만나 대화했다. 그는 한국인의 독특한 감정인 <정(情)> 10악장을 작곡해 놓고 있었다. 부제는 ‘절대자유와 평화를 위하여’였다. 나는 그에게 1악장부터 10악장까지의 설명을 들으면서 십우도와 흡사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소 발자국, 소꼬리, 소 와 목동 등을 그려가며 내 나름대로 <정>을 해석해 주었다. 그의 반응은 자신의 설명과 내 해석이 일치한다고 좋아했다. 헤어지면서 그는 나를 만나서 너무 행복하다고 고백했다. 나는 ‘우리는 영혼의 친구’라고 말했다. 비록 짧은 만남이었지만 며칠 동안 대화한 것 같았다. 산중에서 오랫동안 자연을 벗 삼아 사는 우리의 영혼이 흡사하기 때문이었다. 한국에 돌아온 나는 그의 요구로 십우도 해설을 영문으로 번역해 보내주기도 했다. 권 사장과 약속한 대로 내년(2020년) 봄쯤 그가 한국으로 와서 침대 없는 내 산방에서 하룻밤 머물기를 나는 바라고 있다. 2021년 2월에 그가 작곡한 <정>이 빈필하모닉에서 초연된다고 하니 그때는 내가 오스트리아로 그를 만나러 갈 것 같다. 클래식음악에 문외한인 내가 어떤 이유로 그에게 빠져드는지 모르겠다. 그 역시 불교에 문외한인 그가 어떤 이유로 나에게 빠져들었는지 모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