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종의 불교명저산책 15

 

 

 

부처님은 불교의 교주다. 부처님은 귀의의 대상이다. 귀의처이기에 부처님은 중생들의 간절한 원력을 들어줄 수 있는 전지전능한 분이어야 한다. 적어도 이 땅에서 부처님을 만난 사람들에게 부처님은 그런 존재였다. 일제강점기 이후 한 세기 동안 우리 사회가 기독교화하면서 부처님은 본의 아니게 서양종교의 하나님과 경쟁하는 존재가 되었다. 사실 종교, 즉 최고의 가르침에 포함되는 종교는 불교이며, 굳이 범위를 확대한다면 유교 정도가 포함될 수 있겠지만, 사람들은 기독교와 같은 신앙체계까지도 종교라고 여긴다. 최고의 가르침 체계와 신앙체계가 뒤범벅이 되어 있는 것이 오늘날의 종교계 현실이다. 물론 불교도 중생들의 근기에 맞추어 타력적인 요소가 개입되었지만, 어디까지나 ‘방편’이라는 대전제 아래에서였음을 허투루 넘겨선 안 된다.  
  
스리랑카 세일론 대학 출신인 데이비드 깔루빠나와 인두라니 깔루빠나가 지은 <혁명가 붓다>(도서출판 숨 펴냄)에서 만나는 붓다는 우리가 그동안 보고 듣고 배워온 부처님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다. 이 책을 번역한 재연스님이 이 책에서 부처님을 만났을 때의 감상을 적은 글은 매우 인상적이다.

 

 

재연스님에게 ‘혁명가 붓다’는 이렇게 다가왔다. 재연스님이 받았던 이 신선한 충격은 아마도 재연스님의 마음속에 도사렸던 대자비심을 자극했던 모양이다. 당신이 경험한 ‘걸쭉한 깨죽을 배불리 먹고 난 다음 한 입 베어 문 덜 익은 매실과도 같은’ 그 상큼하고도 개운한 맛을 이 땅의 모든 중생들과 공유하기로 발원을 했으니, 말이다. 재연스님의 글을 더 읽어보기로 하자.
 
나는 신비한 종교적 체험이나 경험 이전의 세계를 부정할 만큼 용감하지는 못하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기적이란 무엇일까?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네 인간이 이 몸뚱이와 말짱한 정신을 가지고 이룰 수 있는 최상의 경지는 어떤 것일까?
그 분, 고따마 붓다는 말한다. “나는 나를 길들이는 기적을 이뤘노라!” 또 그 분께서 말한다. “눈, 코, 귓구멍이 열려 있고,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는 인간이 어떤 갈망과 증오에도 흔들리지 않고 의연할 수 있다면, 나는 그것을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최고의 능력이라고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내가 이룬 것이며, 그것이 바로 내가 주창하는 수행의 궁극적 목표다.” 그보다 더한 기적과 그 이상의 경지는 말해서 무엇하랴!

 

깨달음을 신비화하는 것이 문제로 지적되는 풍토에 익숙한 수행자로서 고따마 붓다의 이런 선언은 신선하다 못해 충격적이다. 이런 신선함은 이 책 전반에 걸쳐 흐른다.  
고따마 붓다의 두 상수제자 사리뿟따와 목갈라나 존자의 부음을 듣고 붓다가 말하는 내용에서도 재연스님은 마치 감전된 듯한 충격을 받는다.

 

 

사랑하고 존경했던 두 제자의 죽음 앞에서 고따마 붓다가 보인 이 장면! 너무도 인간적이고 인간적인 광경에 재연스님은 이렇게 말한다. “당장 누군가 내 눈앞에서 하늘을 날아가는 기적을 보인다 하더라도, 나는 이 구절을 읽었을 때와 같은 전율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라고.
재연스님은 오랜 세월, 진리의 길을 함께 걸었던 길동무들을 먼저 보내고 난 붓다의 절제된 슬픔, 너무나 평범한 그 말이 머리를 쭈뼛거리게 했다고 술회한다.

 

재연스님이 이 책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어찌 보면 싱거운 인연이었다. 스님이 방콕의 한 사원에서 살고 있던 1985년 여름쯤이었다. 그 곳 도서관에서 냐나몰리 스님의 를 찾느라 서가를 뒤적거리다, 이 책이 우연히 그의 눈에 띈 것이다. 애초 생각했던 책은 끝내 찾지 못했고, ‘꿩 대신 닭’이라는 생각으로 들고 왔던 이 책이 그를 이토록 감동시킬 줄이야. 대충 훑어보겠다던 처음 생각과는 달리, 노트에 우리말로 옮기면서 정독하게 되었다. 덕분에 한 달 남짓 더위도 잊고 지낼 수 있었을 정도로.

 

이 작품은 종래의 고타마 붓다 전기와는 다른 시각에서 붓다를 묘사하고 그의 가르침을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거의 모든 이야기의 출처는 빨리 경전이며, 불교의 경험주의와 실용주의적인 요소를 조금 더 강조했을 뿐, 보편적인 학계의 이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책에 나타난 붓다의 모습은 지극히 인간적이다. 우리와 동떨어진 범접할 수 없는 그런 분이 아니다. 붓다의 모습은 다양하다. 이교도와의 논쟁에서는 더 없이 치열하고 예리하며 송곳도 들이밀 틈이 없이 완전한 논리를 갖추고 있다. 군왕을 만날 때는 그들을 조복할 위엄을 뿜어내고, 데와닷따와 같이 승가를 분열시키고 질서를 무너뜨리는 배반자에겐 서릿발같은 엄격함을 드러낸다. 담마를 전하는 데, 공덕을 짓는 데는 추호의 양보도 없으며, 제자를 교화해 열반에 이르게 하는 데는 처절할 정도로 혼신을 다한다. ‘아라한의 사후, 혹은 윤회가 끝난 다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해 의문을 가졌던 사리뿟따와의 문답은 붓다의 제자에 대한 교화 열정의 단면을 잘 보여준다.

 

 

이 문답이 있은 후 사리뿟따는 곧 아라한과를 성취하였다. 또한 붓다는 육신의 소멸을 앞둔 마지막 순간까지 전법의 의지를 놓지 않는다. 붓다의 입멸직전 친견을 요구하는 수밧다를 제지하는 아난다를 향해 붓다는 아난다를 불러 이렇게 말한다.

 

 

재연스님의 말씀처럼 이 책은 고따마 붓다에 대한 갖가지 편견을 지우고, 법당 탁자 위에 근엄하게 앉아 계신 부처님을 보다 젊은 붓다로, 우리와 함께 보대끼고 기쁨과 슬픔을 함께하는 인간 스승으로 다시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 인간붓다의 모습을 읽어가다 보면, 그 어떤 휘황찬란한 수사로 장엄한 붓다보다도 더 위대하고 존경스러우며 사랑스러운 붓다를 친견하는 청량한 기쁨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