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계를 반납하는 환계의 날이 밝았다. 채 한 달이 못되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막상 환계를 하게 되니, 새벽을 맞는 느낌이 색다르다. 환계식은 낮 12시 30분 사야도 실에서 있을 예정이다. 내 생에 있어 가장 기억에 남을 비구의 삶을 마치게 되니 시원섭섭하기도 하고 착잡하기도 하다.
테라와다 교단의 비구로서는 마지막 날, 유종의 미를 거둔다는 의미로 마지막 탁발공양에 각별한 마음으로 나섰다. 지난 탁발에서 보았던 어린 소녀의 눈망울이 못내 그리웠고, 다시 한 번 미얀마 불자들의 감동적인 불심을 느끼고 싶었다.
오전 8시에 담마마마까 수행센터의 정문에 탁발에 나설 비구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었다. 드디어 마지막 탁발이 시작됐다. 오늘은 더 정신 바짝 차려 사띠를 챙기고, 발을 찔리는 일이 없도록 더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며 한 발 한 발 내딛었다. 맨발로 공손히 서서 비구행렬들에게 정성을 다해 공양을 올리는 불자들 모두에게 나는 ‘아유 완노 수캉 발랑(ayu vanno Sukham Balam)!’이라는 축원을 해 주었다. ‘장수하고, 아름답고, 건강하고, 행복하라.’는 팔리어 축원문이다. 그들의 맑고 경건한 표정을 보며 정말로 앞으로는 새로운 삶을 살아가겠다는 다짐을 다지고 또 다졌다.

 

 

 

이제 비로소 부처님께서 걸어가셨던 ‘붓다의 옛길’을 만났으니, 지체하거나 게으름을 피울 시간이 없다. 모든 이에게 사랑과 연민을 보내고, 스스로는 사띠를 챙기도록 늘 채찍을 가하는 삶을 살아가겠다는 다짐을 했다. 이 다짐이 얼마나 실행으로 옮겨질지는 모르겠으나,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는 마지막 순간까지 당부한 것이 ‘한 순간도 게으르지 말고 사띠를 챙기라’는 것이었으니, 부처님의 제자로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야하지 않겠는가. 

 

비구로 사는 동안, 비록 길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미얀마 비구들과 똑같은 생활을 했다. 그 시간은 그분들에게 공경하는 마음이 일어난 시간이기도 했다. 새벽부터 정진을 하고 아침공양을 하고, 탁발을 나가고, 점심 공양을 하고, 도량청소나 선원 내 정원에 심은 수없이 많은 나무들에게 물을 주는 등의 제각각에게 주어진 소임을 틈틈이 실행하고, 그 사이사이에 앉음수행과 걸음수행을 한다. 저녁시간에는 시마홀에서 경전과 아비담마를 공부한다. 사야도나 공무를 위해 가끔씩 선원 바깥을 나갈 뿐, 모든 비구들은 탁발시간 외에 선원 밖을 나갈 일이 없다. 설사 나갈 일이 있어도 밖으로 나가게 되면 계율을 어기게 될 환경을 만날 수도 있어 아예 선원 안에서 생활하는 것이 그들의 일상이다. 비구들의 이런 하루 일과를 모를 리 없는 미얀마의 재가불자들이 테라와다 상가에 지극한 마음으로 귀의하고 공양을 올리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환계하면 다시 재가불자로 돌아가겠지만, 비구 생활을 하면서 체험하고 배운 생활패턴을 이곳에 있는 동안에는 그대로 유지할 생각이다. 더는 탁발공양을 받을 수는 없지만 가능한 그 뒤를 따르며 탁발의 의미를 재차 생각하고, 미얀마 불자들의 마음을 읽어볼 생각이다.
그동안 가사를 걸치고 있어 마음껏 촬영하지 못한 장면도 카메라에 담아야 한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테라와다의 가사는 사띠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옷이라고 할 수 있다. 조금만 방심하면 훌러덩 벗겨지기 일쑤다. 앉거나 걷거나, 절을 할 때 여간 주의하지 않으면 실례를 할 가능성이 크다. 언제나 가사의 상태를 점검하고 바르게 정돈해야 한다. 이것은 비구 생활을 하면서 가장 성가시고 어려웠던 점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가사를 ‘사띠를 부르는 옷’이라고 명명해보았다.

 

 

오후 1시 사야도실에서 에인다까 사야도께 비구계와 사미계를 차례로 반납했다. 환계식을 거행한 것이다. 수계식과는 달리 환계식의 절차는 간단했다. 비구 227계를 반납하고, 이어10계를 포함한 사미 105계를 반납했다. 그리고 이어 재가계, 즉 삼귀의계와 5계를 다시 받았다. 순식간에 비구에서 재가자 우바새로 2단계나 지위가 추락한(?) 것이다. 계를 반납하고 내려오는 것을 ‘떼이까 차’라고 한다. 사야도께서 ‘떼이까 차’를 선창하시면 환계자가 따라서 복창해야 한다. 반면 재가자에서 사미, 비구로 계위가 올라갈 때는 ‘떼이까 타’를 복창해야 한다. 사야도께 2번에 걸쳐 ‘떼이까 차’를 신고하는 의식을 거쳐 나는 다시 재가자로 돌아왔다.
에인다까 사야도께서는 이제부터는 재가자로서 삼보를 잘 호지하고, 5계를 잘 지키는 불자가 되라고 당부하셨다. 그리고는 출국 날짜를 물어보시고, 기회가 되면 다시 이곳에 와 수행 정진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씀해주셨다.
환계를 하고 나서 즉시 꾸띠로 돌아와 가사를 벗었다. 환계를 한 후 가사를 입는 것은 엄청난 불선업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가사를 벗고 옷을 갈아입는 것으로 나는 완전하게 재가자로 돌아왔다. 그런데 기분이 참 묘하다. 나는 가사를 세탁해 꾸띠의 난간에 펼쳐 걸었다. 이 가사는 귀국할 때 기념으로 가져갈 예정이다. 집안 잘 보이는 곳에 보관하면서 비구로서 수행했던 마음가짐을 잊지 않고 다잡는 표징으로 삼을 계획이다.

 

오후 2시 법문시간에 맞춰 한국관 법당에 도착하니, 미리 와 있던 한국인 수행자들이 승복을 벗고 속복을 입고 나타난 나를 보며 환하게 웃는다. 나는 ‘여러분들께서 도와주신 덕분에 비구 생활을 잘 할 수 있었습니다.’라고 공손히 인사했다. 모두들 고생 많았다며 격려를 해주셨다. 하나 같이 고마운 인연들이다. 오늘의 사야도 법문 주제는 ‘수다원이 되는 4가지 조건’이다. 이미 이 선원에 처음 왔을 때 한 번 들었던 내용의 법문이다. 그러나 다시 들으니 더욱 더 가슴에 와 닿는다. 법문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오늘의 녹음법문처럼 사야도의 법문을 듣다보면 반복되는 것이 적지 않다. 그러나 법에 관한 법문은 반복해 들을수록 새로운 각성을 주는 마법이 있다. 듣고 또 들으면서 내 자신이 변해가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일 것이다. 또한 같은 말이라도 사야도의 법문을 통해 들으면 울림이 크다. 그 목소리에 수십 년간의 수행과 교학공부의 경륜과 열정, 연민이 실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삭발하고 가사를 걸치고 비구계를 받았던 것이 평생 잊지 못할 큰 감동이자 충격이었지만, 비구계를 반납한 것도 나름대로 마음에 어떤 작용을 미치고 있는 것 같다. 환계를 마치고 난 후 왠지 몸과 마음이 가라앉는다. 가사를 세탁하여 널어놓고 2시 한국관 법문을 들은 후 나는 넋 나간 사람처럼 꾸띠에 앉아 한동안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다. 허전하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하고, 또 일면 시원하기도 한 복잡한 심경이었다. 법당에 가서 앉아도 수행이 제대로 될 것 같지 않아 책을 읽거나 침상에 누워 휴식을 취했다.
오후 6시 앉음수행을 하기 위해 법당을 찾을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고 3시간이 넘게 흘렀다. 법당에 가서 비구들의 자리에 있던 내 좌복과 모기 망을 거둬 재가 남성수행자의 자리로 옮겼다. 속복으로 갈아입을 때와 자리를 옮길 때의 심정이 비슷했다. 부담이 덜어져 편안한 마음도 있었지만, 왠지 도와 과, 열반의 자리에서 더 멀어진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감 같은 것이 나의 심신을 무겁게 만들고 있는 것 같았다.
 
자, 이제 다시 시작이다. 내심 마음을 다잡고 숨을 고른 후 두 눈을 지긋하게 감은 채 ‘일어남 사라짐’을 관찰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