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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사람 김성채의 '문화탐방' 24

수원사람 김성채 객원기자 | ansanks@hanmail.net | 2019-05-02 (목) 07:45

영인산 세심사 (1)
 
절로 오르며 내는 마음
 
지방도로에서 벗어나 세심사로 올라가는 길이 좁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마을길도 좁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작은 마을을 거쳐 산길로 들어서면서 ‘내려오는 차를 만나면 어찌할거나’라 생각하자마자 곧 어떤 공사를 마치고 내려오는 대형 트럭과 마주쳤습니다. 앞으로 가는 것만 잘하는 운전솜씨로 구불구불 간신히 후진하여 길가 옆 좁은 공터에서 트럭과 뒤를 따르는 승용차 세대를 보냈습니다. 크게 한숨을 내뱉으며 또 이런 일이 생기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어서 차라리 걸어 올라갔습니다.
 

세심사 오르는 산길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산길 옆에 매달린 색색의 연등은 세심사가 멀리까지 보내준 친절한 안내자였습니다. 마을이 끝나고 나타난 산기슭의 엄나무가지 끄트머리에 매달린 새 순은 이제 무성해질 날만 남았습니다. 1Km 쯤 걸었는데, 길가와 산 녘 소나무가 그리 굵지는 않아도 아름다워서 영인산의 정취를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절로 향하는 동안은 세간에서 부딪혔던 시끌시끌한 일을 털어내고, 부처님을 뵙기 위해 마음을 가다듬는 시간입니다. 잘한 일을 생각하기 보다는 잘못한 일을 되짚어 참회도 하고, 다음에는 어찌어찌 해야 하겠다고 생각을 추스르면서 마음이 편해지는 그런 시간입니다. 절 바로 아래에 넓은 주차장을 만들어 접근성을 좋게 한 곳이 많지만, 마음정리도 못한 채 부처님을 뵙는 것이 마음수행을 중요시 하는 불교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입니다. 그러고 보니 세심사는 차를 저 밑에다 놓고, 스스로 마음을 씻으면서 올라야 되는 절인가 싶습니다.
깨달음이 경지에 이른 혜능대사는 티끌이며 때가 낄 리 없을지 몰라도, 범부중생은 수시로 마음을 털어내고 닦아야 합니다. 그렇기에 “마음을 닦아내는 절”이라는 이름을 가진 세심사를 오르며 깨끗한 불자의 마음을 지키자는 각오를 다졌습니다.
 
이름이 없어도 그만인 것을 
 
산자락의 기울기가 급해지는 곳에 축대를 쌓고 터를 조성하여 누각을 세웠습니다.
 

축대를 쌓아 이루어진 터에 지은 세심사
 
 
세심사 출입문은 누각인데, 현판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대들보에 “불기2553년 ․ ․ ․ 주지 지성”이라 기록되어 서기2009년에 상량한 것을 알 수 있는데, 누각 짓는 불사가 만만치 않기에 오랫동안 축원하셨으면서도 스님께서는 누각 이름은 짓지 않고자 하셨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찰의 누각이 하나의 이름을 갖고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은 때문인지(어떤 누각은 앞쪽과 뒤쪽에 다른 이름의 현판을 걸기도 했지만), 누각이 이름에 얽매이는 것을 원치 않은 때문인지 궁금증이 일어났습니다.
 

일주문, 천왕문 등을 거치지 않고 만나는 누각(세심사 출입문)
 
 
절을 찾을 때 ‘이제 다 왔구나!’라는 생각이 일어나는 곳이 일주문입니다. 그런데 세심사에는 사바세계와 부처님 나라의 경계가 되는 일주문이 없습니다. 부처님을 뵈러 올라오는 동안에 참회하고, 마음을 씻어내는 순간이 부처님 나라에 들어선 것이기에 일주문은 필요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일주문이 없으니 천왕문도, 금강문도 지을 까닭이 없습니다. 생각해보면 나무와 돌을 깎아 조성하지 않아도 사천왕과 금강역사는 처처 어느 곳에서든 깨끗한 마음을 지닌 불자를 지켜주고, 불법을 수호해 줄 것입니다.    
 
누각 아래 계단을 오르면 대웅전 마당으로 들어서게 됩니다. 계단 끝에서 대웅전을 향해 합장을 하고 반배를 올린 후, 누각 마루에 들어섰습니다. 누각을 법회나 대중이 모이는 용도로 사용하고자 법당 쪽만 터놓고 삼면을 막기도 하지만 세심사 누각은 기둥만 세워서 절 아래쪽 펼쳐진 풍광을 한눈에 담아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으니, ‘굳이 누각 이름을 지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층탑
   
누각과 대웅전의 중앙을 직선으로 잇는 중간에 구층탑이 서 있습니다.
 

누각 아래층 계단을 오르면 구층탑이, 그 뒤로 대웅전이 보입니다.
 
 
기대석은 방형으로 화강암을 3단 놓았는데 올라갈수록 좁아졌고, 그 위 구층의 탑신부는 벼루를 만드는 청석(점판암)으로 쌓았습니다. 청석은 돌이 단단하지 않아 석공이 원하는 모양을 쉽게 깎아낼 수 있지만 세월을 견뎌내는 힘이 약해 원형을 유지하기 힘들다는 단점도 있습니다. 그래서 청석으로 쌓은 탑 대부분도 기대석은 화강암으로 놓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구층탑 기단부
 
 
기단부를 이루는 하대갑석은 활짝 핀 연꽃잎이 조각되었는데, 지나간 세월만큼이나 켜켜이 갈라져있어 순간적으로 나무 조각 작품처럼 보였지만 한쪽 모서리의 떨어져 나간 상태를 보고서야 나무가 아니라 돌이라는 것을 확연히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위에 네 장의 판석(板石)으로 상대중석을 세우고, 앙련과 복련을 놓아 기단부를 완성하였습니다.   
구층의 탑신부는 각 층마다 네 귀퉁이를 기둥이 있는 것처럼 조각한 몸돌 위에 지붕돌을 쌓아 올렸습니다. 지붕돌은 한옥 사모지붕이 처마선을 내리듯 경사졌는데, 청석의 재질이 무르면서 부드럽고, 입자가 거칠지 않아 매끄럽게 지붕면을 살려냈습니다.
상륜부는 위로 올라가면서 점점 작아진 다섯 개의 보륜과 수연이 청석으로 을 조각되어 올려 졌습니다. 수연은 불꽃 문양을 새기는데, 부처님의 말씀이 인간세계에 널리 퍼진다는 의미를 상징하고 있다고 합니다.
 
안내판에 “이 탑은 대웅전 앞에 옥신 없이 연꽃무늬가 있는 큰 돌 위에 옥개석만 있었는데, 1956년 일타스님과 도견스님이 새로운 돌을 끼워 현재의 모습을 갖추어 놓았다”고 쓰인 것을 보면, 두 스님께서 홀대 받던 아홉 개의 몸돌과 지붕돌을 짝 맞추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사라져버린 보륜과 수연을 새로 제작하여 올린 듯싶습니다. 아무쪼록 탑을 올리며 축원하신 것처럼 부처님 말씀이 세심사를 찾은 탐방객뿐만 아니라 온누리에 전파되기를 기원합니다.
 
검둥개의 눈망울
 
공양간 앞에서 바가지로 시원한 약수를 마시면서, 한량없는 자유를 만끽하는 털이 길고 검은 큰 개를 보았습니다.
한옥에는 방으로 드나듦이 편하도록 댓돌을 밟은 다음 올라서는 쪽마루가 붙어있습니다. “ㄱ”자형 집이기에 꺾인 곳 쪽마루는 조금은 더 넓어지는데, 검둥개는 그곳에서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검둥 개와 봄이 한참인데도 아직까지 신으시는 댓돌위 스님의 털신
 
 
개가 사람을 만나서 취하는 태도는 두 가지로 알고 있습니다. 하나는 첫 만남이지만 오래 전부터 친했던 사람을 만난 듯 꼬리가 빠지도록 흔들어 반가움을 나타내는 것이고, 또 하나는 주인에게 손해를 끼칠 인물로 보여서 살펴봄도 없이 무작정 짖어대는 것입니다.
검둥개는 개답지 않게, 어떤 기척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처음 마주쳤을 때 무슨 검은 보따리가 있는 것으로 착각했으나, 그것이 작은 움직임도 없이 엎드린 털 복숭이 개인 것을 알아채고는 호기심이 일었습니다. 이리저리 어슬렁거리고, 가까이 다가서기도 하고, 바로 앞에 쪼그려 앉기도 하고, “쯧쯧”하고 혀 차는 소리도 내었지만 눈만 잠깐 떴다 감았을 뿐 몸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잠깐 떴다가 감는 검둥개의 눈망울에서 ‘어떤 분야를 꿰차서 달관에 이르렀음’과 ‘도대체 나에게 무엇이 궁금한 것이냐? 나는 네가 무엇을 하러 이곳에 왔는지 알고 있다. 쓸데없는 짓하지 말고, 네 할 일이나 하거라’는 간절함을 본 듯하였습니다.
달리 말하면 ‘네가 움직일 것인가? 계속 그대로 있을 것인가?’라는 쓸 데 없는 호기심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에서, 그것은 ‘중생들이 생각할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난 문제’라며 답변하지 않으시고 미루어 놓으신 부처님의 사치기(捨置記)가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이 검둥개는 생각을 할 줄 아는 불성을 가진 개가 아닌가?’하는 엉뚱함이 일어났고, ‘이 검둥개만큼도 생각할 줄 모르는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계속)
 
 *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 무기설(無記說)이라는 독특한 가르침이 있다. 구체적으로 답하지 않고 옆으로 미루어 놓았다는 의미로, 사치기(捨置記)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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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달마아리랑 2019-05-02 08:4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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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심사를 몇번 갔으돼  걸어오르지 않은 제게 풍경과 더불어 청아한 목탁의 울림을 듣습니다. 덕분입니댜, 근념하셨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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