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고익진 박사(전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교수)의 저서 『현대한국불교의 방향』을 요약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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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족(知足) 출발(出發)

무엇을 하려고 해도 가진 것이 없어서 못하겠다는 사람들을 흔히 본다. 공부를 하려고 해도 시간적 여유가 없고, 돈을 벌려고 해도 자본이 없다는 것이다. 또는 이제 새삼스럽게 시작하려고 하니 늦은 감이 있고, 좋은 일을 하고 싶어도 워낙 줄 것이 없다고도 한다.

그리하여 아무것도 착수하지 못한 채 초조하게 시간만 보내고 있다. 부모를 탓하고 사회를 탓하고 시대를 탓해 본다. 그렇다고 뽀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다. 결국은 술이나 타락으로 외로움을 달래게 되지만 그렇다고 허전한 마음이 뿌듯해질 리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처해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불교의 ‘지족(知足)’이라는 말을 음미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게 무슨 대단한 말이냐고 할지 모르지만 매우 미묘한 뜻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지족이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자기의 현실에 만족한다는 뜻이다. 다분히 소극적인 인생관에 직결된 듯한 인상을 준다. 있으면 있는 그대로, 없으면 없는 그대로 자기 현실에 만족해서 살아가라는 뜻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족이라는 말이 뜻하는 진정한 의미는 결코 그렇게 소극적인 것이 아니다.

생업에 쫓기다 보면 정말이지 공부할 시간을 가질 여유가 없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하루에 단 30분이라도 책을 대할 시간을 가질 수 없을 만큼 그렇게 바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무리 자본이 없다고 하더라고 하다못해 포장마차를 경영할 만큼의 밑천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것마저도 여의치 못하다면 품팔이 노동이라도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젊음과 건강은 인생 최대의 자본이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잃었다면 그런 처지에서 할 수 있는 또 어떤 ‘조그마한 보람’쯤은 찾을 수가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용기와 열의만 있다면 아무것도 ‘시작(commencement), 할 수 없다고 할 만큼 그렇게 무엇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 모두에게 갖추어져 있는 이 자연적인 요건, 그것을 불교는 ’지족‘이라는 말로 부르고 있다. 지족은 단순한 현실 만족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과감함 결단과 새로운 출발을 전제로 한 자기 현 위치에 대한 뚜렷한 자각임을 음미할 일이다.